新羅の女王の諱につい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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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名無し2019/11/17(Sun) 07:49:09ID:Y0NTQyODU(1/8)NG報告

      新羅の3人の女王は、全員諱に「曼」の字が付いていますが、日本の皇族の子に「仁」や「子」を付けるのと似たようなものですか?
      善徳女王=徳曼
      真徳女王=勝曼
      真聖女王=曼

    • 2名無し2019/11/17(Sun) 10:33:46ID:I4MDQ2OTM(1/6)NG報告

      ごめん。わからないくせに来ちゃったw 善徳女王てドラマやってたのと三国志?三国記?に載ってたと思うけど…
      有名なのですか?

    • 3熊五郎2019/11/17(Sun) 10:39:56ID:U5OTA5NDY(1/2)NG報告

      それは「まん」と読むのですか?
      ならばそんなにおかしくないと思います

      ではまた…

    • 4名無し2019/11/17(Sun) 10:43:32ID:Y0NTQyODU(2/8)NG報告

      >>2
      すみません
      有名かどうかは分かりませんが、ドラマでやっていたのなら、ほどほどには名は知れてい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 5名無し2019/11/17(Sun) 10:47:17ID:Y0NTQyODU(3/8)NG報告

      >>3
      日本語でも韓国語でも「まん」で大丈夫だと思います
      確かに、「まん」が名前に付いている人はいますもんね

    • 6熊五郎2019/11/17(Sun) 10:51:59ID:U5OTA5NDY(2/2)NG報告

      ま、あんまり「面白いかな?」と思って適当に書くのもどうかと思われますので…

      【曼】
      意味

      ①ひく。ひっぱる。 ②ながい。ひろい。ひろがる。「曼曼」 ③うつくしい。「曼姫」 ④梵語(ボンゴ)の音訳に用いられる。「曼珠沙華(マンジュシャゲ)」

      意味合い的には女人につけるのにそんなに不思議では無さそうでありますな
      諱とは普段一般的には使わず目上の人や近しい人のみが使う名前だと聞きましたので
      いわゆる「隠し名」です
      「~ちゃん」程度の事ではあるまいか?

      もっとも中国・日本の事なので朝鮮ではどうだったかわかりません
      全て予想の話です 言葉の意味からの

      ではまた…

    • 7名無し2019/11/17(Sun) 10:59:07ID:Y0NTQyODU(4/8)NG報告

      >>6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
      確かに、③の意味なら違和感はありませんよね

    • 8名無し2019/11/17(Sun) 11:06:51ID:I4MDQ2OTM(2/6)NG報告

      >>4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
      書き方が悪かったですね。
      三人の中で唯一、聞いたことがある名前なので何をした人なのか気になりました。ただそれだけです
      ごめんなさいねw

    • 9名無し2019/11/17(Sun) 11:10:16ID:c1MzIzMzY(1/1)NG報告

      신라는 불교 국가입니다.
      그들의 만「曼」 자는 대승 불교의 초기 경전인 승만경(勝鬘經)에서 유래합니다.
      승만경은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여래장 사상을 담은 경전으로서
      사위국의 공주인 승만(勝曼)부인이 고타마 붓다가 가르친 정법(正法)에 대해서 자설(自說)을 말하였더니
      고타마 붓다가 하나하나 찬성하고 귀를 기울여주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대승 불교에서 남녀 차별이 없었던 것을 보여주는 사례로도 꼽힙니다.
      신라 진흥왕 때 승만경이 도입 된 후
      승만 부인의 원력을 잇길 바라는 마음에서 「曼」 자를 돌림자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 10名無し2019/11/17(Sun) 11:23:30ID:I4MDQ2OTM(3/6)NG報告

      >>9因みに折角なので簡単でいいので三人とも何をした人なのか教えて貰えればありがたいです

    • 11名無し2019/11/17(Sun) 11:33:08ID:Y0NTQyODU(5/8)NG報告

      >>9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
      勝鬘経という大乗仏教の経典が由来なんですね
      インドの勝曼(勝鬘?)夫人が仏に対して自説を唱えたんですね

      ドルリムジャも興味深かったです
      兄弟間で同じ字を使うのは日本でもありそうですね

    • 12名無し2019/11/17(Sun) 11:49:28ID:Y0NTQyODU(6/8)NG報告

      >>10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
      詳しくは知りませんが、

      善徳女王は、両親が王族である聖骨の男子がいなくなっていたために、父真平王の死後に即位しました。
      予知ができたようです。
      寺を建てたり、瞻星台という天文台を建てたりしました。
      当時高句麗と百済が同盟を結び、孤立していた新羅は唐に援助を求めましたが、援軍を送る条件として女王を廃位して唐の皇室から王を即位させることを求められ、新羅国内では親唐派が反乱を起こし、善徳女王はその乱の鎮圧中に没しました。

    • 13名無し2019/11/17(Sun) 11:58:22ID:Y0NTQyODU(7/8)NG報告

      真徳女王は、先の親唐派の反乱を鎮めた人々によって擁立され、王族である真骨の金春秋(のちの武烈王)と彼の子を唐に派遣し、唐からの援軍の了承を得て、唐の衣服や官制を取り入れました。

    • 14새로운 닉네임2019/11/17(Sun) 12:03:45ID:MzMDE4MTU(1/1)NG報告

      신라가 일본인들에게 인기가 많이있네.

      유물이나 여러 문화에서 재미있는 요소가 많이 있기는 하지.

    • 15名無し2019/11/17(Sun) 12:15:06ID:Y0NTQyODU(8/8)NG報告

      真聖女王は、先の2人の時代からずっと後の時代の人で、父定康王の遺言により即位しました。
      即位後は、貴族の青少年等と自室で淫らな行いをし、税を上げたため、農民反乱が起こり、甥の金嶢(のちの孝恭王)に譲位しました。

    • 16名無し2019/11/17(Sun) 12:40:46ID:I4MDQ2OTM(4/6)NG報告

      >>12丁寧な説明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て事はスレと関係無くて申し訳ないのですが韓国人の言う「最初に天文を作った」というのはこの話が関係してるのかな?

    • 17名無し2019/11/17(Sun) 14:57:16ID:Y4OTcxNDQ(1/2)NG報告

      일본 메이지 천황의 어원은
      고구려의 21대 文咨明王 · ( = 明治好王 ) 이라는 연호 부터 가져 온 것이다

      일본 야마토 라는 어원은 신라 진덕 여왕의 연호 부터 나온 것이다

      즉 야마토는 신라의 자손 이라는 의미다 www

    • 18名無し2019/11/17(Sun) 16:01:22ID:Y4OTcxNDQ(2/2)NG報告

      야마토의 기원은 
      한국 眞德女王의 연호였던 太和 부터 나온 것이다 

      모노노베 
      미나모토씨 
      후지하라씨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모두 眞德女王의 혈통이다
      금발의 눈동자가 파란 백인였다


      일본의 북조의 천황가는 가야 신라계의 자손이다
      1866년 일본의 북조의 천황가와 에도 막부는
      백제계의 남조의 메이지 쿠테타로 정권을 빼앗겼다

    • 19名無し2019/11/17(Sun) 16:36:56ID:A4NzQzOTg(1/1)NG報告

      >>14
      人気なんかない。頭の変な在日が興味持っただけ。勘違いするな

    • 20名無し2019/11/17(Sun) 17:09:44ID:U5OTIzMjE(1/3)NG報告

      (新羅系の 物部氏=藤原氏と高句麗泉将軍の氏姓の連合)
      40代 天武天皇=物部大海人(=泉 大海人)672-686 高句麗の 淵蓋蘇文
      41代 持統天皇=新羅 中臣氏(藤原氏の娘)686-702
      42代 文武天皇=物部軽(新羅 文武王=泉将軍の息子)702-707=束の間日本列島が新羅領土
      45代 聖武天皇=石川君子724-749から
      48代 称徳天皇=石川阿倍765-770まで
      (百済 伴氏=和氏)クーデタで百済係が掌握,桓武天皇が新羅,高句麗係の和書たちを
      燃やした事件!
      49代 光仁天皇=伴白壁770-781から
      50代 桓武天皇=伴山部781-806
      51代 平城天皇=伴安殿806-809まで
      (新羅 藤原氏)
      52代 嵯峨天皇=藤原神野809-823から
      56代 清和天皇=藤原惟仁850-881
      87代 四條天皇=藤原秀仁1232-1242まで

      徳川家康の先祖>>松平家は少なくとも清康の時代から「新田氏支流世良田氏系統の清和源氏」であると自称していたがこの改姓に伴い家康は「本姓」を「藤原氏」とした (Wikipedia)
      徳川家康の先祖は清和天皇で,56代 清和天皇の完全な名前は藤原惟仁である

      徳川家康と先祖,物部氏, 藤原氏は
      金髪の瞳が青い白人だったという歴史的真実は証明された。

    • 21名無し2019/11/17(Sun) 17:21:09ID:U5OTIzMjE(2/3)NG報告

      야마토의 기원은 한국 신라의 眞德女王의  연호였던 太和 부터 나온 것이다 

      清和天皇,源氏성씨를 받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특히 天神真楊流,家全書에는 源正德·源正足 이라는 두 인물인데, 源氏 성씨가 보인다. 또 関口流의 家系계통의 清和源氏로 계명하기 위하여 장남부터 차녀의 이름들을 八万太郎義家로 개명하였다는 문헌이 존재한다.
      新羅三郞源義光·武田信玄·大東流合氣柔術(Daito-ryu Aiki Jujutsu) 종가의 상징물(깃발) 무늬가 동일하다. 특히 16세기 新羅三郞源義光의 후손 중
      武田信玄은 전국시대의 불세출 무장으로 유명하다.
      그는 軍旗에 新羅三郞源義光이라 표기하였다. 여기서 新羅明神위패를 모시었던 신라의 자손이다

      清和天皇, 新羅三郞源義光·武田信玄은
      후지하라씨의 신라 자손으로 야마토 라는
      신라 여왕의 연호를 사용하였고
      금발의 눈동자가 파란 백인였다
      스키타이의 슬라브 인종이다

    • 22名無し2019/11/17(Sun) 18:17:39ID:U5OTIzMjE(3/3)NG報告

      러시아 슬라브 민족의 시조, 한국의 단군

      Проект судостроения воскресение (조선 부활정책)는 최초로 언론에 공개하는 바입니다. 왜 조선이 들어갔을까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러시아 역사학자들의 대부분은 오늘날의 러시아인의 조상을 단군Dangun(Дэн Gary)으로 생각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소비에트 역사가들이 이미 밝혀냈고 소비에트에서는 이것을 기밀로 숨겼습니다. 왜냐하면 소비에트 지배에 있던 카자흐스탄을 비롯한 동구권 국가와 퉁구스와 투르크계통의 민족들이 연방에서 연쇄 이탈 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학자들의 단군 연구는 1970년~1990년에 절정에 달했고 이들은 비밀리에 단군 학술 회의도 개최하는 등 단군 연구에 거의 사활을 걸었습니다. 물론 그 당시 소비에트에서는 이것을 비밀로 했고 그들끼리의 서로 연구하는 암호는 "судостроения" 이었습니다. 이것은 배를 만든다는 造船으로도 읽힐 수 있는데 일부러 그렇게 표현한 것으로써 당시 소비에트 체제라서 미국, 영국 등이 알지 못하게 하려고 은어로 표기한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퉁구스나 투르크계에 엄청난 혼란을 주었는데 왜 러시아가 조선을 암호로 정했는지 해석을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러시아인의 조상인 슬라브 민족은 훈족의 후예들로써 단군을 시조신으로 모시고 있는 종족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ivan 황제 때 까지는 이것이 인정되었지만 결정적인 변화는 표트르 대제 때 시작됩니다. 표트르대제가 서방 순행을 마치고 결심한 게 서구화가 되어야 러시아가 선진국이 되고 강대국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직접 겪어보면서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표트르 대제가 돌아오자마자 단군을 그들의 역사에서 지웠습니다.

      "Борода налога в  Сан-Томи 1) и gyeora" (수염과 상투에 세금을 매겨라! )

      1)Сан-Томи : 근세 킵착 언어로 '솟구친 머리 모양'의 뜻 (당시 슬라브 러시아어는 근세 킵착 언어였다. )

    • 23名無し2019/11/18(Mon) 13:20:46ID:gyMjY2MjI(5/6)NG報告

      >>20歴史は詳しく知らないので書こうか迷ったんだけど…
      物部って日本じゃないの?たしか物部氏(神道)と新羅から来た蘇我氏(仏教)が対立した、と記憶してます。物部氏は自分のルーツがなくなるだか分からなくなるだかで仏教を広めたくなかったとか?て事は物部氏は日本人ではないかと…

    • 24名無し2019/11/18(Mon) 13:24:13ID:cxNjU4NDQ(1/8)NG報告

      >>20
      事実はこちら

      ・新羅の建国時の宰相が日本人(倭人)であり、王家の二つが倭人系統であること、また始祖の朴赫居世についても日本人説(倭人説)があること

      ・百済、新羅が大和朝廷に対し従属的地位にあったこと

      ・大和朝廷による任那(伽耶)地域の支配があったこと(半島南部における多数の前方後円墳の存在)

    • 25名無し2019/11/18(Mon) 13:25:51ID:cxNjU4NDQ(2/8)NG報告

      それに、以前天皇が、桓武天皇の母が百済王室に連なるという「ゆかり」を話されたら、韓国マスコミは「日王が百済王室の末であると認めた」と曲解したが、父である光仁天皇の側室が百済王家の子孫だっただけだ。
      韓国人へ、側室って分かるか?
      妾なら分かるか?
      それで全て自分たちが起源と叫ぶって、百済の血はエイズ以上の呪いなのか、それとも韓国人のオナニーなのかでしかない。
      百済経由で日本が中国文明を受け入れた時期はあるが、その担い手はほとんど漢民族だった
      それでも韓国は自分のことを勝手に兄貴だと勘違いしてる…
      なんて気持ち悪い妄想なんだろう。ストーカーなのか?

    • 26名無し2019/11/18(Mon) 13:34:43ID:cxNjU4NDQ(3/8)NG報告

      현재, 임나(任那)의 존재는 입에 올리기 거북스러운 존재로 되어 있습니다. 日本이 고대에 한반도를 통치했다는 뉘앙스를 주기 때문에, 일본內 관련 학회는 이웃 한국을 자극할 수 있으니 자제하자는 암묵적 동의가 존재하는 상태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좌익(左翼)적 분위기에 굴복한 상징적 사건이 바로 '광개토왕비(広開土王碑) 조작' 논쟁입니다. 서기 400년 前後에, 日本은 한반도 東西에서 대규모 전쟁에 주력(主力)으로 참전했고, 고구려(高句麗)의 위협으로부터 백제(百済)를 도와주는 한편, 동해안 쪽에서는 임나(任那)와 함께 북상하여, 신라(新羅)를 공략(攻略)했습니다. 日本 사상 최초로 전개된 해외에서의 대규모 전쟁이었습니다.

      당시 이 전쟁의 규모는 고구려 왕이었던 광개토왕(広開土王, 제19대・재위 392~413)의 생애를 새긴 석비(石碑)인 '광개토왕비(広開土王碑, 413년 건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광개토왕(広開土王)은 호태왕(好太王)으로도 불렸는데, 북쪽으로는 북연(北燕)을, 남쪽으로는 백제(百済)를 침공하는 등 팽창을 도모한 왕이었습니다. 당연히 비문(碑文)은 왕(王)의 공적을 나타내기 위해 연전연승(連戦連勝)을 어필하고 있는데, 왜국(倭国)과 더불어 임나(任那) 제국의 이름(諸国名 : 加羅・安羅)이 분명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왜국(倭国)과 관련된 기술(記述)은 11군데 나오는데 요약하면다음과 같습니다.

    • 27名無し2019/11/18(Mon) 13:35:03ID:cxNjU4NDQ(4/8)NG報告

      391년(辛卯) 왜(倭)가 바다(海)를 건너와 백제(百済)・신라(新羅)를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399년(己亥) 백제(百済)는 고구려(高句麗)와의 약조(約)를 깨고 왜(倭)와 통(通)했고, 평양(平壌)으로 내공(来攻), 한편, 신라(新羅)로부터 급사(急使)가 왔고, 왜인(倭人)들이 국경(国境)에 가득(満)했다.
      400년(庚子) 신라(新羅)를 구원(救援)하기 위해 오만(五万)명의 군사(兵)를 파견(派遣),했는데, 왜군(倭軍)이 성안(城中)에 가득(満)했고, 왜병(倭兵)을 무찔렀다(討).
      404년(甲辰) 왜(倭), 불법적으로(不軌) 대방군(帯方郡)으로 침입(侵入).
      407년(丁未) 오만(五万)명의 군사(兵)를 이끌고 싸웠고, 왜(倭)는 갑옷(鎧) 일만여(一万余)개를 남기고 패퇴(敗退).

      그런데, 이 광개토왕비(広開土王碑)에 대해, 1972년 재일(在日) 한국인 학자 이진희(李進熙)씨가 지금까지의 비문해석(碑文解釈)·해독(解読)에 대해 이치에 맞지도
      않는 이론(異論)을 내세워 학계에는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이 비문(碑文)은 1884년, 舊日本軍 참모본부의 사코 가케노부(酒匂景信)가 입수한 것인데, 이진희(李進熙)씨는, 근대 일본의 한반도 진출을 정당화하기 위해 舊일본군이 멋대로 탁본(拓本)을 조작했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당시 실물에 대한 검증이 불가능한 관계로 이진희(李進熙)씨의 갑작스러운 주장을 확실히 부정(否定)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이로 인해, 관련 연구는 40년간 정체(停滞)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 28名無し2019/11/18(Mon) 13:35:25ID:cxNjU4NDQ(5/8)NG報告

      아울러, 이진희(李進熙)씨는, 日本側이 광개토왕(広開土王) 비문(碑文)을 근거로 삼아 '야마토(大和) 정권이 4세기 후반에 한반도로 출병(出兵)하여, 백제(百済), 신라(新羅)를 정복(征服)했고, 가야(伽耶) 지방에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라는 통치기관(統治機関)을 두어, 2세기 동안 지배했다는 것은 역사적(歴史的) 사실(事実)'이라는 것에 대해 강하게 반발(反発)했습니다.

      하지만, 2006년 4월14일字 요미우리(読売)신문에는, <호태왕(好太王) 비(碑) 탁본(拓本) 발견…조작 논쟁에 종지부(終止符)>라는 반향 큰 기사가 게재되었습니다. 고대 日本의 한반도 진출을 기록한, 중국 길림성(吉林省) 광개토왕(広開土王) 비(碑) 최고(最古)의 탁본(拓本)이 중국에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전한 기사였습니다. 왜국(倭国, 日本)과의 관계를 나타내주는 기술(記述) 부분이, 舊日本軍이 입수한 탁본(拓本)과 새로 발견된 최고(最古)의 탁본(拓本)이 서로 일치한다는 사실을, 중국사회과학원 서건신(徐建新) 교수가 판명해낸 것입니다.

      이에 따라, 1970년 이후로 논쟁이 지속되어온 舊日本陸軍에 의한 비문(碑文)조작설은 성립하지 않는 것으로 확정이 되었습니다. 서건신(徐建新) 교수는, 동아시아 각국에 산재한 약 50종(種)의 탁본(拓本)을 확인하는 작업을 지속해 왔는데, 2006년 당시까지 최고(最古)로 여겨지던 사코(酒匂) 입수(入手) 탁본(拓本)보다 3년이 더 오래된 1881년 탁본(拓本)을 북경(北京)의 옥션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그 탁본 정보(내용)를, 사코(酒匂) 입수(入手) 탁본 정보(내용)와 함께 PC에 입력하여 상호 비교해 본 결과, 의도적으로 변조하거나 조작한 흔적이 없는 것으로 판명된 것입니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호태왕비탁본(好太王碑拓本) 연구'(東京堂出版)로 정리되어 발표되었습니다. 

    • 29名無し2019/11/18(Mon) 13:35:54ID:cxNjU4NDQ(6/8)NG報告

      이진희(李進熙)씨의 민족감정에 기초한 반일사관(反日史観)은, 과거 식민지배에 대한 속죄관(贖罪観)을 간직한 日本人 학자들을 윤리적(倫理的)으로 압박하는 공격재료로 작용했습니다. 오랜 기간, 광개토왕(広開土王) 비(碑) 연구에 브레이크를 건 바람직하지 못한 학자의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브레이크 때문인지, 1980년대 이후 日本의 역사 교과서에는 광개토왕(広開土王) 비(碑)에 대한 기술(記述)이 일제히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근린국에 대한 영합으로 인해, 역사학(歴史学)이 뒤틀리고 왜곡되는 현실을 역사학자들은 맹렬히 반성해야 합니다.

      1980년대, 한반도 남서부 전라북도(全羅北道)와 전라남도(全羅南道), 특히 남도(南道)의 영산강(栄山江) 연안에 40기(基)의 전방후원분(前方後円墳)이 잇따라 발견되었습니다. 전방후원분(前方後円墳)은 日本에서 이와테(岩手)県에서 가고시마(鹿児島)県까지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고분으로서 日本 독자(独自)의 무덤 조성 양식입니다.
      이것이 왜국(倭国, 日本)으로부터 한반도로 전해진 것입니다. 한반도에서 전방후원분(前方後円墳)이 발견된 지역은, '일본서기(日本書紀)'가 기술한 임나서부(任那西部) 지역입니다.
      임나(任那)와 관련해서는 언급하는 것조차 터부시되는 풍조(風潮)가 현재 있습니다만, 사실(史実)을 정치적 이유로 왜곡해서는 안됩니다. 한국에서는, '日本의 문화는 전부 한국으로부터 건너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아, 심지어는 전방후원분(前方後円墳)조차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우조차 있는 듯
      합니다. 한국의 학자들은, '한반도의 전방후원분(前方
      後円墳)이 일본으로부터 들어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혹은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극단적인 내쇼날리즘을 보이는 경향이 있는데, 여기에 동조하는 일부 日本人 학자도 존재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 30名無し2019/11/18(Mon) 13:36:16ID:cxNjU4NDQ(7/8)NG報告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에 걸쳐, 임나(任那)・가야(伽耶, 加羅) 지역이, 왜국(倭国)과 어떠한 형태로 외교(外
      交)・군사(軍事), 그리고 사회적 관계들을 형성했는지를
      말해주는 문헌적 증거들은 외면하고 있는 듯한 현상은 유감입니다. 이러한 한국측의 왜곡을 日本人 학자들도 충분히 알고는 있지만, 이에 대해 거의 침묵하며 영합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들 일본인 학자들은, 이러한 한국의 잘못을 지적하면 이후로 한국측으로부터 필요한 자료를 얻는 것도 불가능해질 가능성이 있고, 상호 학회교류 같은 것도 어려워지는 등의 본질이 아닌 것을 염려하는 측면이 강합니다. 대학에서 이러한 교수의 방침을 부교수가 거스를 수는 없는 것이 현실이고 학생들 또한 이에 따를 수밖에 없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임나(任那)'라는 말은 아예 입밖으로 올리기를 기피하는 것이 현실이 되어버렸습니다. 이토록 좌파적 역사관 풍조가 일본내에는 형성되어 있습니다. 현재, '임나(任那)에' 대해 부정하는 풍조(風潮)가 이어지고 있지만, 역사(歴史)라는 것은, '선악(善悪)'이나 '좋고나쁨'이라는 감정과는 별개로, 사실(史実)은 사실(史実)로서 있는 그대로 연구가 이루어져야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극단적 좌익 사관이나, 극단적 내셔널리즘에 사로 잡히지 않고 연구에 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31名無し2019/11/18(Mon) 13:50:03ID:gyMjY2MjI(6/6)NG報告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助かりました。
      (凄すぎる)
      てことは、韓国は1910~から歴史改竄ではなく古代から改竄してるって事?そう言えば昔韓国で挺対協(慰安)の話になった時13歳からって言ったのに何故か「13歳で慰安婦にされた少女もいる!!」
      話が変わってたそうな。

    • 32名無し2019/11/18(Mon) 14:41:26ID:cxNjU4NDQ(8/8)NG報告

      >>31
      ナショナリズムと歴史研究が混同しているので残念ながら朝鮮の歴史改竄は日常です。
      またスレ主は新羅の話を尋ねているので、慰安婦の話の食い違いはテーマズレしますし…あげてもキリがありませんが…ちょっと紹介すると

      例えば去年101歳で亡くなった自称朝鮮人慰安婦のキムさん
      キムさんは22歳で騙されてフィリピンに連れて行かれ、慰安婦をしていたそうです。
      キムさんがフィリピンに渡った1939年に日本軍はまだいません。

      またトランプ大統領に抱きついた事で有名な自称朝鮮人慰安婦のイ・ヨンスさん
      ①2004年に70歳だったイ・ヨンスさん
      m.tongilnews.com/news/articleVi…
      ②2018年には90歳に
      m.seoul.co.kr/news/newsView.…
      自称朝鮮人慰安婦のイおばあさんは、14年間で20歳、歳をとったことになります…

      また1991年、朝日新聞において「14歳で親にキーセンに売られた」と語っていた金学順が、裁判の中で「軍人に無理矢理慰安所に連れて行かれた」と証言を変えた際、福島が弁護人を務めた。この時福島が朝日新聞の虚報に合わせて裁判を有利にしようと工作した疑いがあります

      数え年を考慮しても、無理な数字や、あからさまな証言の二転三転を信じるわけにいきませんよ…

    • 33名無し2019/11/19(Tue) 17:12:05ID:IyNzAxMjU(1/1)NG報告

      公孫軒轅과 公孫-卑彌呼 여왕, 紅毛人

      前方後圓墳은 페르시아의 백인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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