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통감 일가족은 왜 한복을 입었을까? 伊藤統監一家は、なぜ韓服を着たのだろうか?

33

    • 1二日市保養所  Nikkaichi Town Rape Safety Office2018/06/17(Sun) 10:36:47ID:gyNDIzOTU(1/13)NG報告

      이토 통감 일가족은 왜 한복을 입었을까? 伊藤統監一家は、なぜ韓服を着たのだろうか?

      그러니까 이 사진들은 1906년 12월에 대한제국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1870~1928)이 특파대사로 일본 동경에 갔을 때에 이토 히로부미 내외에게 한복을 지어 선물로 건네준 것을 기념하기 위해 촬영한 것이었다. 아울러 등장인물의 면면은 왼쪽부터 특파대사의 수행원이던 한성판윤(漢城判尹) 박의병(朴義秉, 1853~1929) 내외이고, 가운데가 이토 통감 내외, 오른쪽이 특파대사 이지용 내외, 그리고 앞쪽 맨 오른쪽이 이토의 딸이다.
      だからこの写真は1906年12月に大韓帝国内部の代わりに李址鎔(李址鎔、1870〜1928年)が特派大使として日本の東京に行った時に伊藤博文内外に韓服を作ってプレゼントに渡したことを記念するために撮影したものであった。 また、登場人物の面々は、左から特派大使の従者だったハンソン判尹(漢城判尹)バクウイビョン(朴義秉、1853〜1929)内外であり、中には伊藤統監内外、右が特派大使李址鎔内外、そして前方右端この伊藤の娘である。

    • 2名無し2018/06/17(Sun) 11:52:23ID:g2MDcyNzk(1/1)NG報告

      韓国人の感想が聞きたいね

    • 3名無し2018/06/17(Sun) 11:56:47ID:Y3NjgwNzQ(1/1)NG報告

      가식과 이미지 정치

    • 4二日市保養所  Nikkaichi Town Rape Safety Office2018/06/17(Sun) 11:58:17ID:gyNDIzOTU(2/13)NG報告

      朝鮮服を着て後ろ右に線夫人は工作伊藤博文氏の未亡人梅子(梅子)であり、左側は伊藤公爵の娘末松(末松)自作の奥さんのりこ(德子)であり、今後、日本の服を着て右手に座った妻は李址鎔氏夫人イオクギョン(李鈺卿:ホンオクギョン-筆者)であり、左側はバクウイビョン氏夫人バクジュギョン(朴洲卿)からである。 この写真は、過去明治39年(1906年)11月に李址鎔氏が特派大使として東京に行った時に、伊藤、末松二夫人に朝鮮衣服をプレゼントしたお礼に二夫人がこの、パク二夫人に日本の衣服をプレゼントした記念写真。
      조선옷을 입고 뒤로 오른편에 선 부인은 공작 이토 히로부미 씨의 미망인 우메코(梅子)요, 왼편은 이토 공작의 딸 스에마츠(末松) 자작의 부인 노리코(德子)요, 앞으로 일본옷을 입고 오른편에 앉은 부인은 이지용 씨 부인 이옥경(李鈺卿: 홍옥경-필자)이요, 왼편은 박의병 씨 부인 박주경(朴洲卿)이라. 이 사진은 지난 명치 39년(1906년) 11월 이지용 씨가 특파대사로 동경 갔을 때에 이토, 스에마츠 두 부인에게 조선의복을 선사한 답례로 두 부인이 이, 박 두 부인에게 일본의복을 선사한 기념사진.

    • 5名無し2018/06/17(Sun) 11:58:40ID:IwNTMzODI(1/1)NG報告

      その頃韓国はなかった
      朝鮮服が正しい

    • 6名無し2018/06/17(Sun) 11:58:51ID:MwNTI4MzA(1/1)NG報告

      韓国人なら安重根は英雄で伊藤博文は日帝の極悪人というステレオタイプばかりだろよ

    • 7二日市保養所  Nikkaichi Town Rape Safety Office2018/06/17(Sun) 12:07:06ID:gyNDIzOTU(3/13)NG報告

      >>3
      加飾と画像政治

    • 8二日市保養所  Nikkaichi Town Rape Safety Office2018/06/17(Sun) 12:10:02ID:gyNDIzOTU(4/13)NG報告

      例えば伊藤統監を続け痛感の桁に残るよう請願することを実行すると同時に、李ジュン鎔と朴泳孝など亡命の特使に関する問題を処理することが特派大使が日本に渡った目的だった。 当時特派大使に選ばれた李址鎔は、すでに1904年にも伊藤の訪韓によるボビング大使(報聘大使)の任務を一回実行した経歴があった。

      彼は、元の留学(幼學)イフイし(李熙夏)の息子で用具(龍駒)という名前を持つ身分に過ぎなかったが、1881年に興宣大院君の型されるフンイン群イチェウン(興仁君李最應)の孫でチュルギェして高宗皇帝の5寸志割印近親皇族に変身する人物であった。

      フンイン軍の相続がされた直後には、イウンヨン(李垠鎔)としたが、1900年9月英親王(英親王)が続く(李垠)という名前を持つようになると、この文字を避けて李址鎔(李址鎔)に再改名した。

    • 9二日市保養所  Nikkaichi Town Rape Safety Office2018/06/17(Sun) 12:10:18ID:gyNDIzOTU(5/13)NG報告

      >>8
      이를테면 이토 통감을 계속 통감의 자리에 남아 있도록 청원하는 일을 수행하는 동시에 이준용과 박영효 등 망명객의 특사에 관한 문제를 처리하는 것이 특파대사가 일본으로 건너간 목적이었다. 당시 특파대사로 선정된 이지용은 이미 1904년에도 이토의 방한에 따른 보빙대사(報聘大使)의 임무를 한 차례 수행한 경력이 있었다.

      그는 원래 유학(幼學) 이희하(李熙夏)의 아들로 용구(龍駒)라는 이름을 지닌 신분에 지나지 않았으나 1881년에 흥선대원군의 형 되는 흥인군 이최응(興仁君 李最應)의 손자로 출계하여 고종황제의 5촌지간인 근친황족으로 변신하는 인물이었다.

      흥인군의 후사가 된 직후에는 이은용(李垠鎔)이라 했다가 1900년 9월 영친왕(英親王)이 이은(李垠)이라는이름을 갖게 되자 이 글자를 피해 이지용(李址鎔)으로 다시 개명하였다.

      그는 황족이기에 앞서 그 누구보다도 친일매국의 행렬에 앞장섰던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1904년 러일전쟁이 터지자 서둘러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에 서명한 당사자가 바로 외부대신 임시서리였던 그였다. 이 협약을 통해 일본은 전쟁 수행에 필요한 군용지를 마음껏 징발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했으며, 이것은 그대로 대한제국에 대한 국권침탈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 10二日市保養所  Nikkaichi Town Rape Safety Office2018/06/17(Sun) 12:12:13ID:gyNDIzOTU(6/13)NG報告

      >>3
      彼は皇族である前に、誰よりも親日売国の行列の先頭に立っこと悪名が高かった。 1904年日露戦争が勃発すると、急いで日韓議定書(韓日議定書)に署名した当事者が直接外部の代わりに一時的霜だった彼だった。 この条約により、日本は戦争遂行に必要な軍用地を存分に依頼することができる権限を確保しており、これはそのままの帝国の国権侵奪を加速するきっかけとなった。

      彼は1905年に35歳で内部の代わりにの位置を占めていて、いわゆる「乙巳保護条約」の締結にも積極的に賛同していた乙巳五賊(乙巳五賊)の一人であった。 このように、親日と売国の先頭に立った功労と皇族という身分に支えられて、彼は韓日併合以来、日本から中枢院顧問に任命される一方、朝鮮貴族領に基づいて「カウント(伯爵)」という比較的高い爵位を与えられた。

    • 11二日市保養所  Nikkaichi Town Rape Safety Office2018/06/17(Sun) 12:12:50ID:gyNDIzOTU(7/13)NG報告

      >>10
      그는 1905년 35세의 나이로 내부대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의 체결에도 적극 찬동했던 을사오적(乙巳五賊)의 한 사람이었다. 이처럼 친일과 매국에 앞장 선 공로와 황족이라는 신분에 힘입어, 그는 경술국치 이후 일제로부터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되는 한편 조선귀족령에 따라 ‘백작(伯爵)’이라는 비교적 높은 작위를 부여받았다.

      그런데 이지용의 친일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그가 유명한 노름꾼이었다는 사실도 드러난다. 예를 들어 <대한매일신보> 1908년 11월 21일자를 비롯한 여러 신문기사에는 그가 용산 강정(龍山江亭)에 박의병과 김승규 등을 불러 화투판을 크게 벌였다는 소식이 기재되어 있다. 이 기사에 등장하는 화투판 동료 ‘박의병’은 다름 아닌 1906년에 이지용이 특파대사로 일본에 갔을 때 그를 수행했던 박의병과 동일인이다.

    • 12ジャギにはジャギの言い分がある2018/06/17(Sun) 12:13:27ID:I0NjgwMzI(1/1)NG報告

      何故って…
      融和策だろうよ
      統治を上手くいく為の
      報道されるのは解って居るんだから
      不思議か?
      逆に聴くが中国やロシアならそうしたと思うか?

    • 13二日市保養所  Nikkaichi Town Rape Safety Office2018/06/17(Sun) 12:14:42ID:gyNDIzOTU(8/13)NG報告

      >>10
      ところが李址鎔の親日行跡を追っていくと、彼は有名なギャンブラーだったという事実にも表れている。 たとえば、<の毎日新報> 1908年11月21日を含む複数の新聞記事には、彼が龍山江汀(龍山江亭)にバクウイ兵科キム・スンギュなどを呼んでファツパンを大きくしたというニュースが記載されている。 この記事に登場するファツパン仲間」バクウイビョン」は他でもない1906年に李址鎔が特派大使として日本に行った時、彼実行したバクウイ病気と同一人である。

      彼は1905年以来、漢城府尹を務め、龍山一帯の軍用地受容に深く関与しており、1907年9月には、一時的軍事および鉄道用紙調査局長を務め、日本海軍がジンヘマン一帯を掌握して、海軍基地を造成することに先駆けた人物でもあった。

      一方、1910年6月頃の新聞記事には、李址鎔がファツパンを急襲した日本憲兵を避け逃走途中顔を負傷したか、またはそれらに"私は再びキャッチに手を出さない」と謝罪までし恥をかいたことが相次いで収録されている。 国の運命が今日、明日する状況でも、彼がどのよう花札賭けることに夢中になるあったかを推測することができます部分がないかである。

    • 14二日市保養所  Nikkaichi Town Rape Safety Office2018/06/17(Sun) 12:15:44ID:gyNDIzOTU(9/13)NG報告

      >>13
      그런데 이지용의 친일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그가 유명한 노름꾼이었다는 사실도 드러난다. 예를 들어 <대한매일신보> 1908년 11월 21일자를 비롯한 여러 신문기사에는 그가 용산 강정(龍山江亭)에 박의병과 김승규 등을 불러 화투판을 크게 벌였다는 소식이 기재되어 있다. 이 기사에 등장하는 화투판 동료 ‘박의병’은 다름 아닌 1906년에 이지용이 특파대사로 일본에 갔을 때 그를 수행했던 박의병과 동일인이다.

      그는 1905년 이후 한성부윤을 지내면서 용산 일대의 군용지 수용에 깊이 관여하였고, 1907년 9월에는 임시군용 및 철도용지조사국장을 맡아 일본해군이 진해만 일대를 장악하여 해군기지를 조성하는 일에 앞장 선 인물이기도 했다.

      한편, 1910년 6월 무렵의 신문기사에는 이지용이 화투판을 급습한 일본헌병을 피해 도주하다가 얼굴을 다쳤다거나 그들에게 “다시는 잡기에 손을 대지 않겠다”고 사죄까지 하며 망신을 당한 일이 잇달아 수록되어 있다. 나라의 운명이 오늘 내일 하는 상황에서도 그가 얼마나 화투노름에 미쳐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아닌가 한다.
      20

    • 15二日市保養所  Nikkaichi Town Rape Safety Office2018/06/17(Sun) 12:17:50ID:gyNDIzOTU(10/13)NG報告

      >>13
      しかし、彼の慢性的なギャンブルのボトルは、たやすくさ脂質ず以内ファツパンを再転々 1912年正月には、他の親日権威と付き合う「ジトゴテン」版を繰り広げ発覚し、大きな師団が吸うことになった。 結局、彼はこの日公判に付されて状態(笞、媒質)100台の判決を受け、同時に「伯爵(伯爵)」の礼遇は1912年4月9一部停止状態に入ったが、後で1915年9月にガソヤやっとボクジャクされている処分を受けたことが確認される。
      もちろんその間に親日の対価として片付けた財産はほとんど使い果たしてしまったが、<東亜日報> 1920年6月18日に収録された「うわっ(嗚呼)! 二百(李伯)の言葉(末路)! 当年度映画グムアン材(當年榮華今安在)」という題の記事は手札恥であるようにした彼のみすぼらしい姿をこのように描いている。

    • 16二日市保養所  Nikkaichi Town Rape Safety Office2018/06/17(Sun) 12:18:44ID:gyNDIzOTU(11/13)NG報告

      >>15
      하지만 그의 고질적인 도박병은 쉽사리 고쳐지질 않았고 이내 화투판을 다시 전전하다가 1912년 정초에는 다른 친일 권세가들과 어울려 ‘짓고땡’ 판을 벌이다 발각되어 큰 사단이 나기에 이르렀다. 결국 그는 이 일로 공판에 회부되어 태(笞, 매질) 100대의 판결을 받았고, 동시에 ‘백작(伯爵)’의 예우는 1912년 4월 9일부로 정지 상태에 들어갔다가 나중에 1915년 9월에 가서야 겨우 복작되는 처분을 받았던 것으로 확인된다.
      물론 그 사이에 친일의 대가로 치부한 재산은 대부분 탕진하고 말았는데, <동아일보> 1920년 6월 18일자에 수록된 「오호(嗚呼)! 이백(李伯)의 말로(末路)! 당년영화금안재(當年榮華今安在)」 제하의 기사는 패가망신하다시피 한 그의 몰골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 17二日市保養所  Nikkaichi Town Rape Safety Office2018/06/17(Sun) 12:21:35ID:gyNDIzOTU(12/13)NG報告

      >>15
      ここには、李址鎔の先の名前を「イホンギョン」に少なくているが、これは「ホンオクギョン」または「イオクギョン」の過ちに見える。 <皇城新聞> 1906年11月27日に「特派大使李址鎔の妻の本来の名前は「ホンギョンヒョン(洪敬賢)」や今回の日本に渡って行く車の中で「イホンギョン」に改名した」とした内容をそのまま引用したせいで行われた錯誤的なようだ。 正確には「ホンオクギョン」が迎え、「イオクギョン」としたことも、日本人の風俗に合わせて、夫の姓を伴う表記方式と見れば良い。

      とにかく紅玉卿かつての婦人会会長や女性教育会総裁の肩書きを持って日本勢力が主導していた京城社交を縦横無尽し、日本の愛国婦人会評議員と東洋婦人会評議員として活動していたことが確認される。 韓国併合直後には、作為授与の感謝(謝恩)のために組織された貴族観光団(貴族觀光團)に参加して、日本東京で皇后を拝謁して帰ってきたこともあった。

      その後は夫李址鎔のギャンブルの好みにより加えが悪いなったせいか約束手形不渡りや土地の詐欺事件に関与した話がまばら伝わっただけで、これといった活動像知られてはいなかった。 しかし、1937年に日中戦争の時期に至って親日女性関係者で組織された愛国グムチャ回(愛國金釵會)の幹事と献金者リストに戻ってホンオクギョンという名前が登場することで見ると、彼の生まれな親日本能がどのくらいの歳月持続されたかを先送り推測することができるようだ。

    • 18二日市保養所  Nikkaichi Town Rape Safety Office2018/06/17(Sun) 12:22:23ID:gyNDIzOTU(13/13)NG報告

      >>17
      여기에는 이지용의 처 이름을 ‘이홍경’으로 적고 있으나 이는 ‘홍옥경’ 또는 ‘이옥경’의 잘못으로 보인다. <황성신문> 1906년 11월 27일자에 “특파대사 이지용의 부인의 본래 이름이 ‘홍경현(洪敬賢)’이나 금번에 일본으로 건너가는 차에 ‘이홍경’으로 개명하였다”고 한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 탓에 벌어진 착오인 듯하다. 정확하게는 ‘홍옥경’이 맞으며, ‘이옥경’이라고 한 것 역시 일본인들의 풍속에 맞춰 남편의 성을 따른 표기방식이라고 보면 된다.

      아무튼 홍옥경은 일찍이 대한부인회 회장 또는 여자교육회 총재의 직함을 갖고 일본세력이 주도하던 경성사교계를 종횡무진하였으며, 일본애국부인회 평의원과 동양부인회 평의원으로 활동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한국병합 직후에는 작위수여에 대한 사은(謝恩)을 위해 조직된 귀족관광단(貴族觀光團)에 합류하여 일본 동경에서 황후를 배알하고 돌아온 일도 있었다.

      그 후로는 남편 이지용의 도박 취향으로 인해 가세가 빈약해진 탓인지 약속어음부도나 토지사기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얘기가 드문드문 전해졌을 뿐 이렇다 할 활동상이 알려진 바는 없었다. 하지만 1937년 중일전쟁 시기에 이르러 친일여성인사들로 조직된 애국금차회(愛國金釵會)의 간사 및 헌금자 명단에 다시 홍옥경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걸로 보면, 그의 태생적인 친일본능이 얼마나 오래 세월 지속되었는지를 미뤄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 19新劇の巨人2018/06/17(Sun) 12:28:11ID:YxNzQ0MzI(1/1)NG報告

      >>1
      朝鮮の文化慣習を理解するために、現地のものに倣ったんだろうね。19世紀末、日本に開国を迫ったアメリカやイギリス、フランス人は、日本の着物を身に付けたか?するわけないよね…日本文化なんかどうでも良かったし、東洋の諸国なんて未開な国と位置付けたんだから。愚民共の文化慣習なんて、真似するものではない。そんなの無視して資源をむさぼり尽くそうと、植民地にしたんだから。

      伊藤博文が朝鮮の衣服に身を包んだのは、朝鮮人を理解しようと、真摯に勤めたから。

      反日思想の強い韓国人が日本に来て、わざわざ着物に袖を通すか?って言おうと思ったが、韓国人にとっては日本の着物はコスプレの類だったな。明治期に一介の政治家が民族コスプレをしたって解釈はあり得んよ。

    • 20名無し2018/06/17(Sun) 12:51:39ID:MyNDYzNg=(1/1)NG報告

      1876年 - 日朝修好条規締結、釜山港開港
      1878年6月 - 第一国立銀行が釜山浦支店を開設
      1879年8月 - 釜山商法会議所設立、1893年1月に釜山港日本商業会議所へと改名、1908年に釜山商業会議所へと改名
      1880年5月 - 日朝修好条規に基づき元山港開港
      1880年5月 - 第一国立銀行が元山に出張所を開設
      1880年5月23日 - 元山に総領事館を開設
      1881年1月14日 - 元山に港会議所を設立、10月23日に居留民総代役所と商法会議所に分かれる。商法会議所は1891年に在元山日本人商業会議所へと改名、1893年に元山日本人商業会議所へと改名
      1882年8月30日 - 日朝修好条規続約締結、日本の公使館員が朝鮮各地に行けるようになり、その後、特命全権公使と韓国外部大臣の交渉によって開市場や居住地を広げていく。
      1883年1月 - 日朝修好条規に基づき仁川港開港、仁川日本人商業会議所設立
      1883年3月 - 日朝間海底線敷設に関する条約を締結
      1883年11月 - 第一国立銀行が仁川に出張所を開設、1888年には支店に。
      1883年 - 第一国立銀行が釜山・元山・仁川で海関税収納事務の取扱を開始
      1886年 - (イギリス領インド帝国で後期中等教育開始)
      1887年2月 - 在留邦人によって京城に商業議会が設立され、1892年4月に京城日本人商業会議所へと改名
      1888年 - 第一国立銀行が京城に出張所を開設
      1890年9月12日 - 商業会議所条例が公布される (朝鮮内の商業会議所もこの条例に準じた定款で領事の許可を得て設立している)
      1891年 - 帝国生命保険(現朝日生命保険)が釜山に代理店を設置
      1894年 - 甲午農民戦争(東学党の乱)が発生、政府軍と褓負商の商兵が東学軍と戦う
      1896年 - 第一国立銀行が第一銀行になる。
      1899年6月 - 仁川米豆取引所設立

      既に国交があり不思議には思わないよ。

    • 21世界最高美男2018/06/17(Sun) 13:11:57ID:U0MjQyMDQ(1/1)NG報告

      이토는 조선의 문화를 좋아해서 입었다고 알고 있다.

    • 22名無し2018/06/17(Sun) 13:33:51ID:g5NDI4NTE(1/2)NG報告

      >>21
      伊藤博文は、最も朝鮮人敬意を持って接していた人物だと思います。

    • 23靖国で逢いましょう◆WkPRMDE3E22018/06/17(Sun) 13:48:16ID:k3ODk0NDc(1/1)NG報告

      カイカイ本スレに韓国人の意見が載っているので、どうぞ閲覧してみて下さい。

    • 24名無し2018/06/17(Sun) 23:34:55ID:ExMTMzMzY(1/1)NG報告

      >>21
      朝鮮文化が好きだから着るんではなく
      朝鮮文化に敬意を示しているから着るんですよ

      そこを勘違いしては駄目
      韓国人は他国の文化を敬意する習性はないけど
      日本は他国の文化を敬意する習性はあるのです
      だから、日本人は他国に行くと
      他国の文化を触れ、他国の文化の食事をしたり
      他国の風習にふれたり、他国の文化を尊重したりします
      とくに、伊藤のような権力者が朝鮮服を着る事に意味があるので
      朝鮮人文化が好きだから着るんではありません

    • 25名無し2018/06/18(Mon) 10:35:46ID:E1Mjg4MzQ(1/1)NG報告

      朝鮮の文化保存に尽力してたのは日本人ですからwww
      伝統文化を破壊して来たのは朝鮮人自身である!wwww

    • 26무명2018/06/18(Mon) 10:38:30ID:AwNTkxODY(1/1)NG報告

      >>25

      응. 그건 아니야.

    • 27名無し2018/06/18(Mon) 10:50:13ID:A4NDM4NDI(1/1)NG報告

      >>26
      馬鹿だね。

      李朝は小中華思想にまみれた事大主義国家だから、
      朝鮮のものはすべて未開なものと、軽視してたんだよ。
      そのせいで 高麗時代にあった朝鮮独自の文化は失われてしまった。

      それを併合期に日本人が いちいち発掘して、
      「ほら、朝鮮にもこんな素晴らしいものがある。」
      といちいち 朝鮮人に見せてやったわけ。

      それをやられた朝鮮人は恥ずかしくて、
      屈辱のあまり、日本人を逆恨みするようになった。

    • 28名無し2018/06/18(Mon) 10:50:54ID:EwOTU4NTQ(2/2)NG報告

      >>26
      世界遺産の仏国寺も酷い状態だったのを当時、日本が修復保存したのも知らないのか?
      一例だがな。

    • 29名無し2018/06/18(Mon) 11:06:44ID:g2NjY4NDg(1/1)NG報告

      伊藤博文はふつうに朝鮮のシンパだったんだろうね
      朝鮮の女もいっぱい抱いたことだろう
      最後は朝鮮併合に賛成したというが、多数決で決まるんだから一人で反対しても仕方がない
      朝鮮を背負いたくない日本のために、抵抗勢力であったのは事実である
      もし安重根に暗殺されなかったら、、併合後も元朝鮮国王の庇護者となっていて、
      朝鮮を軽んじることなく、インフラのための予算をいっぱい取っていただろうね

    • 30名無し2018/06/18(Mon) 11:10:07ID:EwMjk5Mjg(1/1)NG報告

      >>26
      朝鮮は李王朝に関係するものは保護しただろうが、遺跡や文化財の保護など考えていないだろ。

    • 31名無し2018/06/19(Tue) 10:14:28ID:gzMTI1Mjk(1/1)NG報告

      何でも自分の都合のよい解釈しかできない韓国人に客観的視点を求めても虚しい。

    • 32名無し2018/06/21(Thu) 05:41:13ID:gwNzI2OTk(1/2)NG報告

      安重根の息子が伊藤博文に謝罪し、高宗は明治天皇に謝罪し、純宗も国民を喪に服させた歴史は韓国では忘れ去られるw

    • 33名無し2018/06/21(Thu) 05:42:11ID:gwNzI2OTk(2/2)NG報告

      >>26
      そもそも朝鮮の国宝制度は総督府が始めたものという歴史を知らないだろw

レス投稿

画像をタップで並べ替え / 『×』で選択解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