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625전쟁 및 한국전쟁이 옳은 용어이고
조선전쟁이라고부르는곳은 일본 중국밖에 없음
한국이 탄생한 이후에 생긴 전쟁이니 한국전쟁이고
한국에서는 625전쟁으로 불러
바꿔말하면 일본인이 일본에서 생긴 전쟁은 일본전쟁이라고 부르겠냐?
일제시대는 36년간이지만
워낙 바뀐게 많고
세계사적으로도 20세기초는 중요한 시기였다.
또한 10년대 20년대 30년대 독립운동도 시기에 따라 서술되어있다.
정치사+문화사+ 경제사+ 독립운동사까지 더하니까
문제가 많은것은 당연한 일
조선에 자치를 허용했으면 그렇게 많은 서술도 없겠지 ㅋㅋㅋ
또한 임시정부는 일본인이 볼때만 테러집단이고 중국이나 미국에 있어선 순전히 독립운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각색도 아니고 시점이 다를뿐 .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블라디보스토크 간도 만주 상하이 충칭 옌안 에서 일어난 도립활동은 사실 그대로의 서술이야
그리고 이승만은 독재자가 아니야
너의 말은 전형적인 한국 좌파의 시각
이 점에서 넷우익들은 한국을 욕하기위해선 시시각각 때에 따라 변하면서
한국좌파의 시각도 한국우파의 시각도 수용하는것을 알수있다.>>47
완전 엉터리 대답이잖아
일제에 협력한 것도 양반출신이 더 많은데?
독립군에는 양반도 있고 평민도 있고 평민출신이 더 많았다
만주에서 싸운것도 일본책에는 없겠지
중국군벌에게 뇌물을 줘서 서로 싸우게하고 종국에 괴뢰 만주국을 만든것은 어느나라?
토지를 준 양반이 만들었다. 평민은 조선 시대보다 풍부해진 -> 풍부해졌는데 왜 만주에서 잡곡을 수입해???
설마 조선인은 천황의 은총 아래서 하얀 쌀보다 잡곡을 좋아하게 된거야?
일본은 자국의 산업 단지 제국군을 만든 것일까? -> 그 물량은 일본에서만 나오지 않아
서양 각국이 조선에 나눠 갖고 있던 삼림채벌권 ,채굴권 병합하면서 다 누가 가져갔지?
수탈의 말을하고 있다면 일본에서 조선에 대한 투자는 종전까지 마이너스였던 -> 왜 마이너스 상태이면서까지
무리하게 억지로 조선을 차지하려고했을까? 일본인은 착해서? 아시아를 구하려고?
죄다 변명이잖아 멍청아
답변은 그럴듯하게 해라 제3자인 외국인도 이해할수있게
정말 넷우익은 이렇게 지독한 멍청이 밖에 없는가http://www.ilbe.com/10158322707
딱 이 정도가 일본의 역사인식수준인듯>>49
> 625전쟁 및 한국전쟁이 옳은 용어이고
> 조선전쟁이라고부르는곳은 일본 중국밖에 없음
これは、Koreaの訳し方の違いだろう。Koreaは韓国とも訳すが、朝鮮とも訳す。
Englishでは、North Koreaと South Koreaだ。
歴史的には韓国と言うよりも、朝鮮時代のが長いので中国や日本では朝鮮の方がなじみが深い。
> 각색도 아니고 시점이 다를뿐 .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블라디보스토크 간도 만주 상하이 충칭 옌안 에서 일어난 도립활동은 사실 그대로의 서술이야
その独立運動が、過大に評価されていることは理解できないだろうか?
韓国は、臨時政府の独立運動によって出来たのではない、アメリカの手によって運よく政権を獲得できたのだ。
> 그리고 이승만은 독재자가 아니야
李承晩は、世界的な基準で見れば独裁者である。保導連盟事件では、赤と疑われただけでたくさんの若者が虐殺されてしまった。
> 너의 말은 전형적인 한국 좌파의 시각
まるで、北朝鮮人に「あなたの言葉は、アメリカに毒されている。金日成は真の英雄だ!」と反論されているようだ。
洗脳とは怖いものだ。>>53
독립운동은 전혀 과대평가 없다
오히려 그 독립운동이 없었으면 한국이랑 일본이 다른게 없으니까
미국소련이 왜 일본과 한국을 갈라놨는지 이해를 못 하는건가?
단순히 일본의 힘을 빼놓기 위해서?
완전히 다른 민족인데
'운좋게 독립했다'는 니가 하고싶은 말을 끼워넣기 위함이고
실제 국내에서도 독립군 수준으로 일본을 싫어한사람이 엄청많은거야
왜 시인이 잡혀가서 감옥에서 죽나?
일본인이 전국적인 감시망을 두었기때문에
바보우익의 눈에는 그저 한국인은 일제시대 내내 온종일 협력했는데
갑자기 정신병자처럼 변해서 반일을 부르지는것처럼 보이는것이지
보도연맹 사살이 없었으면
베트남처럼 게릴라전이 난무하는 혼돈의 카오스로 변했던거야
평가를 하려면 줏대를 가지고 평가해라
시시각각 좌파 우파 시각을 수용해서 한국을 낮추지말고
우익이면 우익답게 우익의 역사관으로 평가를 하든가
뜬금없이 한국좌파의 시각을 수용해서 이승만을 독재자라고 평가하는가?
좌파는 이승만을 친일이라고 보는데?
근데 또 이승만라인을 만들었기때문에 친일이라고 생각하지않잖아?
이승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50
さっさと答えろや低脳
独立軍wとかの軍隊よりも当時の朝鮮人が多く居た軍隊はどこでしょう?>>54
아니 일본은 합병 이전부터 계속 러시아나 프랑스 미국이 먼저 갖고있는
한양의 전기공사권이라든지, 삼림권 채굴권이라든지를 다시 사기위해 노력했다.
청나라 상인과 한국에서 경쟁했고, 먼저 차지한 상권이 청나라와 비슷해지려고하자
무력으로 빼았으려고 선택한 것이 전쟁
청국 vs 일본 전쟁/ 러시아 일본 전쟁
러시아의 위협으로 일본을 지키기위해서라면
한국이 북한 미사일의 위협으로부터 일본을 지키기위해서 일본을 합병해도되겠네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바보같은 논리를 사용할수록 니 바보같음을 드러낼뿐
일본에서는 '바보노출'이라고 하더군
내가 상대하는 세명중에 니가 제일 바보구나
설명을 해도 알아듣지를 못하니 설명할 여력이 없다
바보는 그대로 바보의 인생을 살면 좋다
야마토 핵잠수함 수퍼에네르기 초사이어인 바보
>>55
이것이 노인의 유머감각인가
극혐>>59
1909년 안중근의 이토히로 부미 암살
1920년 9월 14일: 박재혁이 부산 경찰서에 들어가 경찰서장을 폭사시켰다.
1920년 12월 27일: 최수봉이 밀양경찰서 소속 모든 경찰이 모인 가운데 폭탄을 투척하였다.
1921년 9월 12일: 김익상이 조선총독부 청사에 들어가 폭탄을 던졌다. 폭발로 청사 일부가 부서졌다.
1922년 3월 28일: 김익상, 이종암, 오성륜이 상해 황포탄 부두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암살하려다 체포되었다. 오성륜 의사는 가까스로 탈옥하고, 김익상 의사는 1943년 처형되었다.
1923년 1월 12일: 김상옥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1924년 1월 5일: 김지섭이 도쿄의 궁성 정문 앞 이중교에서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하였다.
1924년 6월 1일: 김병현, 김광추, 박희광이 친일파 정갑주와 가족을 사살하였다.
1924년 6월 : 김병현, 김광추, 박희광이 이토 히로부미 수양녀이자 독립운동가들의 정보를 일본경찰에 넘기던 밀정, 배정자에 대한 암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함(배정자가 은퇴하게된 사건임), 친일파 조직인 일진회 이용구회장 암살 시도중 부상만 입힌 채 실패함
1924년 6월 7일: 김병현, 김광추, 박희광이 봉천성 일본 총영사관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불발로 실패, 대서관, 금정관에서 군자금 탈취하다 현장에서 김광추는 총에 맞아 순국, 김병현과 박희광은 체포되었다.
1926년 12월 28일: 나석주가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을 습격하였다.
1931년 한인애국단의 활동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23436&cid=40942&categoryId=33384
평화로운 일본제국에서 왜 ??? 이런 일을 했을까?>>62
한반도를 외국에 가지고 가면 일본의 위협이되기 때문에 당연히 ???????
왜????????????
지금껏 한반도는 일본이 아니었는데
단순 제국주의 시대이기때문에?
일본은 섬나라야 한국을 갖고있는것이 더 문제가 생길 소지가 많다
그래서 결국 멍청하게 팽창하다가 문제가 생겼잖아
역사 모르는 것?
한국이 북한의 미사일 위협으로부터 일본을 보호하기 위해 일본을 합병해서 좋다
->
니 얘기랑 뭐가 다름?
지금은 제국주의시대가 아니지만 북한의 핵으로 인해 일촉즉발의 시대임
결국 한국이 일본을 지켜주기위해 합병해도 결국 논리는 같은것이야
그만큼 니 논리는 치우쳐져있는 병신이라는 뜻임>>60
> 역사적fact는 일본은 원자폭탄 두개를 투하당한 뒤 항복했다는 것임
つまり、臨時政府の独立運動によって韓国政府が樹立されたわけでなく、アメリカの手によって獲得できた事実を、あなたも理解しているじゃない。
> 일본인의 역사서술과는 달리 독립군이 세계각지에 있었다는 것이 fact
当時、韓国国民の内のどれだけの人数がその独立軍にいたのだ?世界中という曖昧な言葉でなく、パーセンテージという客観的数字で示してほしい。
> 이승만과 김구는 해방과 동시에 전국민의 환영을 받은것이 fact
李承晩のあまりに独裁的な政治が批判を受け、国民から追放された fact は知っているのですか?아침에 출근이야 자러간다 무직 니트들아 ㅋㅋㅋ
4문제 정답 맞춰서 제출해라>>65
아 가려고하는데 또
독립운동으로 수립되든 아니든 독립군은 중요하다는 것임
중요하니까 모두 정부 요인으로 자리를 차지하지
비율은 중요하지않아
국내에 있는 사람은 인질이나 다름없고
1930년대 40년대를 사회 분위기를 그 시대의 신문이나 매체로 보면 일제를 정말로 좋아한 사람은 없다
바보 일본우익만 그렇게 생각해
해방 후 직선제에서 세번이나 당선된 것도 알고있나?
쫓겨난 것은 부통령인 이기붕의 부정선거때문이지, 나는 이승만을 國父로 생각하고있어
독재자라면 북한의 김씨정권이나 아프리카 아랍 중동같은 부정축재가 있어야하는데 그런 것도 없다>>67
아이고 아이고~~~~~~~~~~~~~~~~~~>>69
이것도 한국인이 일본인으로 위장하고 했습NIDA!!!>>69
めくそはなくそをわらう>>68
> 비율은 중요하지않아
なぜ、客観的な数字を避けますか?
> 1930년대 40년대를 사회 분위기를 그 시대의 신문이나 매체로 보면 일제를 정말로 좋아한 사람은 없다
つまり、親日派というのは存在しないと言うの?
> 쫓겨난 것은 부통령인 이기붕의 부정선거때문이지, 나는 이승만을 國父로 생각하고있어
李承晩が不正選挙をしたことを知らない?
まともに調査することもせず、赤と疑っただけで多くの人間を殺したことを正当化し、李承晩を英雄化するあなたは、やはりイデオロギーに包まれている。
李承晩は、単なる側近の不正で追放されたのではない、四月革命など独善的な政治で国民の不評を買ったのだ。>>77
あの当時日本は欧米の侵略からアジアを守った特別な存在だろ?
どうして併合された朝鮮と対等に並べるんだよ?
国際常識も知らない歴史の客観性もないのはお前のほうなw
お前らなんて中国かロシアの奴隷にでもなればよかったのにw
ジジイとか強調して言ってくるお前が実はジジイじゃね?w
文章から死臭が臭ってくるんだけどw途中までは 日韓の歴史教育差 の話題で面白かったのに
何で後半 落書きやっただろ合戦 になってるんだ・・・ アホらしい 日本にも落書きするバカは居る
韓国人が、どういう歴史教育を受けてるか 垣間見えて面白く感じた>>71 よく理解出来てるじゃないかwww
在日韓国人って分かってるだけ君は天才だwww>>18
韓国では5が正解。
真実は「身勝手な元両班の暴動に多くの人々が呆れ、日本の統治を強く望んだ」だ。>>25
一問目以外翻訳が滅茶苦茶で意味がわからない。
せめて年号が書いてあれば問題を推測出来るんだが。>>82
同意。だが、俺は近代より、もっと昔の日韓の歴史観の違いを聞きたかった
歴史認識なら、近代に入れば日本と中国でも変わってくる
近代より前なら、日本と中国の歴史認識もほぼ同じ
中国の言う東北工程を、日本もほぼ正しいと認めている
日本の語る近世までの歴史も、中国はほぼ正しいと認めている
たとえば、日本の前身である倭国誕生は、百済建国より古く、さらに高句麗建国より古い
日本や中国だと、それは正しい歴史なのだが、韓国は認めないだろう
世界で北朝鮮と韓国だけが、それぞれ違うことを主張している
近代以降の歴史認識が、近隣国で違うのは常だ
それはヨーロッパ諸国でも同じだろう
だから、日韓両国の歴史に対する姿勢や考え方を説くなら、近代より前の歴史について語り合うのが有効でしょう
周辺諸国の中で、なぜ、韓民族だけが違う歴史を唱えるのか?
その議論をするのであれば、近代の歴史について語っても無意味、平行線になるだけだ
近代に関して、ほぼ同じ歴史を共有する国などは珍しく、少なくとも東アジアには存在しないのだから>>61
このような蛮行をしたのは利権を剥奪された元特権階級の両班であり、解放された多くの朝鮮人は日本の統治を喜びました。韓国人が必死に勉強している「歴史」と言う物がアレですよwww
>>1
5:反日教育科
↑
肝心な科目が抜けてるぞw>>90
韓国人らしく、男性器と女性器の絵が描かれているw>>78
韓国の国民性クラス>>64
“独立運動”と言う名で、匪賊行為やって、朝鮮人は現地の治安を荒らしていたんだよ。
1930年(当時、張学良の軍閥政治)で満州に60万人の朝鮮人が漢人の小作人として存在していた。
1928~1930年だけでシナ人と朝鮮人で紛争が100件。
1931年2月、国民党『鮮人駆逐令』を出して満州領域から朝鮮人を追放。
1931年7月、吉林省政府とシナ人農民が朝鮮人を排斥する万宝山事件が起こる。
つまり、韓国人が学んでる満州南部一帯の“独立”は、“行き場を失った朝鮮人による満州への侵略”に過ぎない。
“独立”と言う単語を使う事で、上記の経緯も知らない韓国人が、勝手に妄想しているに過ぎない。
ちなみに、張学良支配時代は、軍事強化で軍票を乱発し、圧政を敷いていた。匪賊も放置され人身売買や収奪が当たり前の世界。
満州国建国により、日本人の徹底した法治政治により貨幣が統一され、日本軍による匪賊討伐で、満州領内の治安が向上した。
そして、そんな事実も知らない韓国人は、満州南部で“輝かしい朝鮮人の独立運動があった”と勝手に妄想する。
おまけに“独立”に賛同していたのは、朝鮮人のごく一部で、日本社会に安寧し、日本兵として志願してた朝鮮人の方が遥かに多い。YouTubehttps://youtu.be/Tg6XheR6PC0
아버지에게 큰절 올리는 수험생 아들....>入試との距離が遠い年を取った日本の祖父が多い
そんなコト書いてるけど、日本のジジイは かつて取得した
国家試験や資格試験の 数年置きの更新試験があるので
現役で居る限りは 一生 勉強しなきゃいけないんだよ>入試との距離が遠い年を取った日本の祖父が多い
そんなコト書いてるけど、日本のジジイは かつて取得した
国家試験や資格試験の 数年置きの更新試験があるので
現役で居る限りは 一生 勉強しなきゃいけないんだよこれがわが独立軍の姿nida!
非常に誇らしいnida!
独立軍(日本語読み:どくりつぐん、朝鮮語読み:トンニックン)は、1919年の三・一独立運動後、非暴力運動の失敗から、日本による統治から朝鮮の独立をめざした武装闘争が再編され、国境を接する満州東部の間島(かんとう)地域に集結して活動した武装集団で、抗日を名乗った朝鮮族系の馬賊・匪賊ら諸派の総称である。
(中略)
主なものには北間島(豆満江流域)の軍政府(後、西路軍政署と改称)、大韓国民会軍、北路軍政署、大韓独立軍、大韓義勇軍、光復軍総署などがあった。これら抗日武装組織は、しばしば越境して朝鮮北部の穏城、茂山、恵山などの町々を襲撃した。ただしこれら地域における活動は、民間人や非武装施設への略奪・襲撃であり、大日本帝国軍および朝鮮総督府と直接に武力衝突を行えるほどではなかった。
(中略)
中国人による反満州国運動と結びついて再び抗日闘争が盛り上がった。日本側の記録によると、この頃、匪賊は約36万人ほど蜂起していたとされるが、どれも数百名程度の小規模グループで、しばらくすると生活に困窮して、共産主義者と民族主義者の争いなど内部抗争に走ったり、闘争を止めて農作業に戻ろうとする者が続出した。>>50
満州・朝鮮北部で朝鮮人がゲリラ戦をやっていた事は知っているよ。
ソ連から軍事教練や武器の供給を受けていた。
主に民間の日本人集落を襲って、食料や金品を奪っていた。
特に有名なのは「普天堡の戦」(보천보전투)
日本人3人、朝鮮人2人が居た駐在所を襲撃して、警官の子供を殺した。
民間ではなく、警察施設を襲ったのは珍しい。
ちなみに、この戦いの指揮官は金日成だった。
수능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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