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平に見れば、日本も新羅や百済などの国から学ぶ事もあったであろう
日本が全ての面で新羅や百済に勝っていたとは主張しない
しかし、総合的な国力で比較して日本の方が勝っていたとは主張する>>163
中華の技術や文化、漢文に翻訳された仏典等を伝えたのが百済や高句麗。
逆に日本の情報等を中華に伝える事も当然あっただろうね。
日本との交易があったんだから、当然一方通行じゃない。
それに新羅が唯一じゃない?
新羅が高麗に併合を望んで同化。
高麗も李朝に粛清され滅びたでしょ。
それ以外の王朝も侵略されて滅びた。
半島の遺物が少ないのは、粛清によって奪われ失われるから。
日本と大陸や半島では立地条件等の環境が違うから、半島に遺物が少ないのは仕方が無いんじゃ無いかな。三国史記・新羅本紀
249年 夏四月、倭人が舒弗邯の昔于老を殺した。
287年 夏四月に倭人が一礼部を襲う。1千人を捕虜にして立ち去った。
289年 夏五月に、倭兵が攻めてくるということを聞いて、戦船を修理し、鎧と武器を修理した。
292年 夏六月に倭兵が沙道城を攻め落とす。一吉大谷に命じ、領兵にこれを救わせた。
294年 夏 倭兵が長峯城を攻めて来た。
295年 春 王が臣下に向かって「倭人が、しばしばわが城邑を侵して来るので、百姓が安じて生活することができない。私は百済と共に謀って、一時海を渡って行って、その国(倭)を討ちたいが、皆の意見はいかがか?」ときいた。これに対して、舒弗邯、弘権が「われわれは海戦に不慣れでございます。冒険的な遠征をすれば、不測の危険があることを恐れます。いわんや百済は偽りが多く、常にわが国を呑み込もうと野心をもっておりますから、かれらと共に謀ることは困難だと思います」と答えた。王はこれを聞いて「それもそうだ」といった。>>161
よく考えてみろ。
民族の資質というものは長年経ってもあまり変わらないものだろ?
今の君達はどうだ。
文化も技術も何一つ生み出せず、「日本の超劣化コピー」と呼ばれる
低レベルな人間たちだ。>>1
CGや模型をいくら作って妄想しても歴史は変わらないし、
軍備も増強しない、ロケットは月にいかない。- 177名無し2022/09/27(Tue) 21:56: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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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日本の誇る世界最古の木造建築「法隆寺」が
余程、羨ましかったんだなwwwwwwwwwwwwwww
うんうん分かるよ、マジで法隆寺って現存する歴史そのもの
だからな、実物があるだけに誰もその歴史を否定出来ない
その建築法も、まさしくオーパーツそのものだしな
悔しかったんだねwwww、妬ましかったんだねwwww
ホント気の毒なくらい朝鮮人は頭が悪いよな
それが通るか通らないかくらい考えてから想像図でも何でも
作れよwwwwwwwwwwwwwwwwwwwwwwww忘れ去られた新羅の街の研究は、戦前に朝鮮研究をしていた日本人学者の研究成果が多きく貢献したといえる。韓国でも知られていることもあるが、石窟などと共通し、忘れられた朝鮮の優れた文化を再発掘する目的。
- 180名無し2022/09/29(Thu) 20:02:07(1/7)
>>180
韓国は、新羅の文化を殆ど受け継いでいない。
韓国に残っているのは、僅かな遺物だけ。昔はすごかった!
エジプトもインダスもマヤも!!!!
で?だから?
現在と現実を直視しろよ。
過去にすがるしかないか!
ボケ老人の戯言みたいな韓国人スレッドだな- 184名無し2022/09/29(Thu) 20:17:4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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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5名無し2022/09/29(Thu) 20:23: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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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名無し2022/09/29(Thu) 20:25: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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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名無し2022/09/29(Thu) 20:44: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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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名無し2022/09/29(Thu) 20:54:10(6/7)
>>189
ウォンもコスピも暴落してるのに何言ってんの?www- 192名無し2022/09/29(Thu) 21:02:0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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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
금관은 물론 금제귀고리와 허리띠, 목걸이까지 총출동한거죠. 그런데 당시 평양박물관장이 바로 경주에서 서봉총 발굴을 주도한 고이즈미라는 인물이었습니다. 조선일보 보도를 보면 기가 찹니다.
고이즈미는 금제유물들을 전시하기 4~5일 전에 평양 시내 일본인이 운영하는 요정에 동경(도쿄)에서 온 자기 친구를 초대한 연회를 베푸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마 술이 거나하게 취했을 것입니다.
“내가 발굴한 금관을 평양에 가져왔는데 이것을 여자에게 씌우고 사진을 찍어 나중에 발행되는 책에 넣으려고 한다”면서 그 자리에 합석한 기생 4~5명에게 “너희 중에 모델을 뽑으려 한다”고 말했다는 겁니다.
그 자리에서 낙점된 여성이 바로 평양에서 이름난 미인이라는 차릉파라는 기생이었습니다.
기생 차릉파는 다음날 박물관으로 달려갔습니다. 차릉파는 고이즈미를 비롯한 10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30분 넘게 금제 허리띠와 금목걸이, 금귀고리를 두릅니다. 마지막에는 금관까지 머리에 올려놓은 뒤 박물관 카메라로 사진을 찍게 됩니다. 셔터를 누른 자가 바로 고이즈미였습니다.
고이즈미=일본원숭이 =병신>>195
写真のどこを見て美人と言えるんだ?www>>194
それじゃあ、韓国の歴史を発掘したのは「小泉」という日本人ってこと?
だったら、韓国人は日本人に感謝すべきだろ?>>195
精神科には通ってるだろうけど、ついでに一度眼科に行かれることをおすすめするw韓国は5000年の歴史と言うが、なんの証拠も根拠もないと言う。
道にうんこするような朝鮮人が昔先進国だった?!新羅時代はすばらしい!
でも子孫は日帝に、国を売りました!
って言いたいのかな。>>202
YouTubehttps://youtu.be/BMhMOjjhg5o
지금은 강대국 ^^
그리고 고대 일본은 백제의 속국이다.
일본에서 나타나는 龍鳳紋環頭大刀(용봉문환두대도)는 백제 무령왕 출토 龍鳳紋環頭大刀를 모태로 하여 6세기 중, 후반에 걸쳐 성행하고 있는데, 초기 單龍環頭大刀의 분포가 北九州, 세토 내해, 畿內를 중심으로 하고 있어 야마토 정권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 백제로부터 전파된 경로를 알 수 있다. 이러한 전파는 七支刀가 408년 일본에 하사된 정황으로 미루어볼 때 백제로부터 賜與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
- 홍성화, 古代 韓日의 龍鳳紋環頭大刀 고찰, 동양예술, 2012, vol., no.20, pp. 5-39 (35 pages)>>203
キムチ汁は旨いか???- 208名無し2024/11/06(Wed) 07:43:5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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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
戸数で178,936戸の新羅の首都とやらの人口は何人になるの?
ちなみに、9世紀当時の世界の都市人口推定値
ターシャス・チャンドラーの推定値
疑問に感じるところもあるが…
1位 バグダード 700,000人
2位 長安 600,000人
3位 洛陽 300,000人
4位 コンスタンティノポリス 250,000人
6位 ゴルドバ 160,000人
7位 バスラ 100,000人
7位 フスラ
7位 レイ
10位 アレクサンドリア 95,000人
https://irows.ucr.edu/research/citemp/citemtoc.htm- 211名無し2024/11/06(Wed) 09:39: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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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
《삼국사기》 <헌강왕 본기> 에 따르면,
어느날 왕은 월상루에 올라가 민가를 바라보면서 시중 민공에게 묻기를, "내가 듣건대 지금 민간에서는 짚이 아닌 기와로 지붕을 덮고, 나무가 아닌 (연기가 나지 않는) 숯으로 밥을 짓는다 하니 과연 그러한가?"
민공은 "저도 일찍이 그렇다는 말을 들었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왕께서 즉위하신 이후로 음양이 조화를 이루고, 바람과 비가 순조로워서 해마다 풍년이 들고, 백성들은 먹을 것이 넉넉하며, 변경이 안정되고, 시정이 즐거워하니, 이는 임금의 어진 덕으로 이루어 진 것입니다."
왕은 이에 즐거워하며 "이는 여러 신하들의 도움 때문이지, 짐에게 무슨 덕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다.“백성들이 다투어 사치와 호화를 즐긴다. 오로지 외국산 물건의 진기함을 숭상하고 국산은 수준이 낮다고 혐오한다(民競奢華 只尙異物之珍寄 却嫌土産之鄙野). 예의가 무시됐고, 풍속이 쇠퇴하여 없어지는 데까지 이르렀다.”
843년, 왕(신라 흥덕왕)이 단단히 화가 났다. 해외 명품만을 좇고 국산을 무시하는 등 사치향락이 빠진 세태를 한탄한 것이다. 그러면서 서슬퍼런 법령을 내린다.
“옛 법에 따라 다시 교시를 내린다. 만약 죄를 저지르면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을 것이다.”(<삼국사기> ‘잡지’)신라인들은 지금으로 치면 자가용에 속하는 <거기(車騎)>의 치장에도 열을 올렸다.
“진골은 수레의 재목(車材)은 자단(紫檀)과 침향(침香)을 쓰지 못한다. 대모(玳瑁)를 붙일 수 없다. 6두품 여자는 물론 5·4두품, 아니 백성여자들까지 자단과 침향을 말안장틀로 사용하지 못한다. 금·은으로 장식하지도 못한다.”
당시의 수레는 두가지 종류가 있었다. 덮개가 없는 무개차와, 양쪽 벽면을 나무판으로 막고, 앞 뒤에 휘장을, 지붕을 천으로 덮는 밀페형의 유개차였다. 흥덕왕이 규제한 수레는 아마도 후자인 유개차였던 것 같다. 당시 진골들은 경쟁적으로 외국산 자재로 수레를 꾸민 것이다. 진골들 뿐이 아니었다. 6·5·4두품은 물론 가장 하층민인 백성여자들도 ‘말안장틀’을 명품으로 장식했다.
자단은 유향목재이다. 인도와 스리랑카 원산의 상록활엽교목이다. 재목이 향기롭고 견고하며 속은 암홍자색을 띠어 아름다워 건축 및 가구등에 쓰인다. 침향의 주산지는 베트남(점성국·占城國)과 수마트라였다. 나무를 베어 몇 년 후 껍질을 썩여 없앤다. 그러면 견고하고 검은 심재가 남아 물에 가라앉는데 이를 목재로 쓴다. 이것이 침향이다.
흥덕왕의 규제내용을 종합해보면 신라인들의 ‘가없는 마차사랑’을 짐작할 수 있다. 귀족들은 물론 일반백성, 아니 백성여자들까지…. 흡사 고급승용차를 선호하고, 차의 치장에 열을 올리는 요즘 사람들의 심리와 같은 것이 아닐까.
평민 여자들까지 다투어 말안장만큼은 금은옥을 장식하고, 고급외제목재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자 보다못한 왕이 나서서 ‘외제명품에만 혈안이 돼있다’고 호통을 치면서 규제법을 만든 것이다.- 215名無し2024/11/06(Wed) 13:12:3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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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때도 유행한 인도네시아산 원목가구
지금으로 치면 주택인 <옥사(屋舍)>와 생활용품인 <기용(器用)>도 사치향락의 상징이었다.
“진골의 집은 길이·너비가 24자를 넘지 못한다. 당와(唐瓦)를 덮지 않고 금·은 등으로 장식하지 않는다. 진골은 물론 6두품까지 침대를 대모·침향으로 장식하지 않는다.”
침대까지 외제 ‘대모와 침향’으로 장식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침향은 지금으로 치면 동남아산 티크재 원목 정도로 볼 수 있다. 최고급 원목가구에 대한 신라인들의 사랑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는 풍조가 아닌가.
또 진골과 6두품은 물론 일반백성들까지 ‘집을 금은으로 장식하지 마라’고 규정했다. 12세기 아랍지리학자 알 이드리시가 “신라에서는 개(犬)의 목걸이도 황금이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만큼 황금이 흔했다는 얘기다.>>215
조선은 침략자를 무서워해서 도로도 만들지 않고 유통이 원할하지 않았고 상공업을 무시했다.なぜ新羅時代が良かったなどと思ってる?
時代とともに文化は栄えて行く。
新羅時代は、その後の時代の朝鮮時代よりひどかったと考えるのが普通だ。>>219
そんな分けがないだろ。
朝鮮人の国だったんだから。
신라시대 수도 3D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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