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에 대해서도 얘기합시다 2

258

    • 1國漢文混用蟲2017/02/12(Sun) 21:44:44ID:g3MzI5NTQ(1/39)NG報告

      저번처럼 또 술 쳐먹고 시인 빙의한 놈들이 별 지랄을 다하다가 스레 닫히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

    • 209名無し2017/02/14(Tue) 01:36:25ID:I3MTI3NjQ(64/71)NG報告

      한국사람 화이팅! 나는 이제 그만말할래. 나는 잔다. 잘자라 다들.

    • 210名無し2017/02/14(Tue) 01:37:00ID:I3MTI3NjQ(65/71)NG報告

      >>208 내가 말한걸 잘좀 봐라.. 잘자라.

    • 211名無し2017/02/14(Tue) 01:37:46ID:IzMDY1MA=(1/1)NG報告

      >>208 사학도 지향하는 급식충이라고 했지? 너한테는 아무래도 무리인거 같다. 이런 이야기는. 자주의식이랑 화이론을 처 묶고 자빠졌다는

    • 212國漢文混用蟲2017/02/14(Tue) 01:44:23ID:UxNTI0NjM(30/39)NG報告

      >>210
      130번? 거기엔 반론했다.

      >>211
      아니 그건 내가 난독한 거 맞는데, 삼국사기가 화이론에 입각해서 서술되었다는 걸 증명해주는 서술이 있냐니까?
      신라=화 여제=이 <- 어디에????

    • 213國漢文混用蟲2017/02/14(Tue) 01:48:01ID:UxNTI0NjM(31/39)NG報告

      내가 발해를 한국사에서 언제 배제했냐? 아니 이 새끼는 지가 확대해석하거나 난독해놓고 왜 나한테 지랄이야? ;;; 씨발. 나도 잔다.

    • 214名無し2017/02/14(Tue) 01:49:19ID:EyNDE3Mg=(2/2)NG報告

      신라 고구려분들 너무 귀엽네요 솔직히 백제입장에서는 귀엽습니다 ^^ 잘자용~! 굿나잇! ^ㅂ^)/

    • 215國漢文混用蟲2017/02/14(Tue) 11:46:30ID:UxNTI0NjM(32/39)NG報告

      일단 성의 없이 단문으로 코멘트 달아서 빡쳤다면 미안하다. 근데 네 논조가 너무 산만해서 의미를 파악하는데 시간이 걸리는데, 안 그래도 느려터졌는데 밤중에 피곤해서 더 대응이 느렸다. 다시 정리해보자.

      1. 너는 지금 삼국사기와 삼한일통이 신라를 화로 보고 여제를 이로 보는 신라 중심의 화이관이 반영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네가 삼국사기를 제대로 읽었는지, 삼한일통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한 건지 의문이다. 네가 신라본기만 읽고 이딴 개소리를 지껄였는지도 모르지만, 각 본기는 모두 삼국을 각각 我國으로 지칭하고 그 나라의 입장을 중심으로 서술되었다. 애초에 삼국을 각각 본기로 편찬했다는 것 자체가 삼국을 고려의 정통, 전신으로 인정한다는 의미고, 삼국사기 편찬의 기본 취지도 이거다. 그리고 이미 삼국사기를 신라 중심적인 사서라고 비판하는 견해에 대해서는 부정론이 대세다. 후삼국의 전란까지 기록하고 있는 건 결국 진정한 삼한일통을 이뤄낸 건 고려 태조인 걸 내세우려는 거고. 삼한일통의식은 삼국이 동류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건데, 여기에 신라 중심의 화이관이 반영되어 있다는 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고구려, 백제계 귀족들이 차별 받았던 거하고는 완전히 다른 문제고.

    • 216國漢文混用蟲2017/02/14(Tue) 11:46:47ID:UxNTI0NjM(33/39)NG報告

      2. 일단 너도 고려가 물질적으로 통일 신라의 그것에 기반하고 있다는 거는 부정하지 않는구나. 그지? 너는 자꾸 정통성을 따지는게 유교적 화이론 사관에 근거하고 있는 거니 뭐니 하고 있는데, 핀트가 어긋나도 한참 어긋난 거야. 여기서 정통성이란 건 상기했듯이 누가 "큰 뿌리"이냐의 문제야. 한민족의 민족 국가 형성의 시초라는 점에서 신라는 충분히 정통 국가로 인정받을만 한 거고. 너는 자꾸 신라가 고구려, 백제의 영향을 받았다는걸 강조하지만, 결국 신라가 큰 뿌리라는 건 변하지 않지.
      3. 발해를 동류로 보고 한국사로 포함시키려는 시도는 13세기 말에 일연, 이승휴 같은 소수의 문인들에 의해 처음 이뤄진 거고, 오늘날의 발해관은 조선 후기에 겨우 형성된 거지. 부여, 가야도 누락되어 있는 삼국사기에서 발해를 배제시켰다고 까는 건 지극히 현대적인 관점임. 고려에서 발해 유민들을 우대한 건 맞지만 동질 의식이라기 보다는 전쟁에 필요한 인력 확보를 위해서였고. 최자의 기록은 발해 유민들의 대규모 이입이 고려 태조의 삼한일통 업적 달성에 큰 원동력이 되었으니까 언급하는 거고, 동류의식은 아니지. 윤언이도 "신라, 발해도 연호를 칭했는데, 왜 우리는 못함?"이라고 말했지 딱히 발해를 한국사로 본 건 아님. 정몽주의 발해고성에서 附我全臣庶于今有子孫遺民那解此라고 한 것도 요나라가 멸망하고 그 유민들이 투항해서 고려의 백성이 되었다는 거지 이걸 동류의식으로 해석하는 건 너무 비약임. 한규철 교수가 말갈의 통설적인 개념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긴 했지만, 기록상으로 말갈의 구분이 뚜렷해서 별 설득력은 없음. 발해가 한국사에 포함시킬 수 없다는 얘기가 아니니까 혼자 풀발하지 마라.

      그리고 너 글 좀 제대로 읽고 키보드 두들길 수는 없냐? 본인이 허수아비 치기하고 있다는 자각이 전혀 없는듯.

    • 217國漢文混用蟲2017/02/14(Tue) 15:17:18ID:UxNTI0NjM(34/39)NG報告

      이조 판서 허조(許稠)가 계하기를,

      "제사 지내는 것은 공을 보답하는 것입니다. 우리 왕조(王朝)의 전장(典章)·문물(文物)은 신라의 제도를 증감(增減)하였으니, 다만 신라 시조에게 제사 지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삼국이 정립(鼎立) 대치(對峙)하여 서로 막상막하(莫上莫下)였으니, 이것을 버리고 저것만 취할 수는 없다."

      하였다.

      -세종실록 9년 3월 신축

      당대인들이 삼국을 어떻게 인식했는지 이 기록 하나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기록들을 보면 조선 초까지도 고구려, 백제 전승의 속요, 무용이 남아있었던 것 같지만, 안타깝게도 현전해서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다.

      고려 후기로 갈 수록 고구려색이 옅어지고 신라색이 강해지는 것은 언어학적으로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전기 중세 한국어의 어휘가 후기에 가면 소멸되는 것들이 많은데, 아마도 고구려계 단어가 아닐까 추측된다.

    • 218名無し2017/02/14(Tue) 15:33:23ID:I3MTI3NjQ(66/71)NG報告

      >>217 급식충이니까 내가 너는 상대를 못해주겠다. 니가 말한 개소리에 내가 물어본 질문들에 대한 답이 없다는 자각조차 못하고 있다 너는. 화이론에 대한 관념도 부족하고 신라 중심을 떠나서 화이론의 본질을 너는 전혀 이해를 못하고 있다. 그리고 병신새끼야.

      세종대왕도 신라와 백제 고구려의 우열을 말하지 않는다. 니가 말하는 정통같은 좃빠는 소리를 이조 판서 허조가 하니까.

      그딴 우열은 없어 븅신아. 이렇게 말하는걸 보고도 아직도 좃빠는 소리를 하고 자빠졌냐? 세종이 그래서 신라짱짱 정통이야 이딴 소리를해?? 심지어 고구려는 내가 알기로는 정신나간 성리학자 새끼들은 제사까지 안지내려고 했던걸로 기억하고 있다.

      내가 자꾸 성리학적 유교사관을 말해도 이 등신섀끼는 14세기 이후로 안향 이후로 최해도 발해를 동방에서 뺐다고 내가 말했는데 이해를 못하네. 조선이 유학자의 나라고 국시가 성리학인데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이해도 못하고 있잖아. 니 답이 늦다는것 자체가 너는 내 질문의 요지도 이해를 못하고 정리를 한다는것 자체가 니 대가리가 모자란다는거야. 아직 급식충이면 공부를 더 해라. 내가 말한 질문들에 답이 하나도 없다. 허수아비의 오류 같은 씹소리를 하는데. 급식충새끼가 형식논리학을 공부했을리 없으니까 내가 빡치지만 니 논리수준을 검증까지는 하지 않으마 어차피 기대도 하지도 않고.

      너는 숫자도 읽을줄 모르는 유아한테 수학을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냐? 사서만 어설프게 읽으면서 사학자 코스프레 하지말고. 당장 공자부터 시작해서 주자까지 읽어봐라 알겠냐?

    • 219名無し2017/02/14(Tue) 15:47:46ID:I3MTI3NjQ(67/71)NG報告

      >>216 3번도 오로지 니 주관밖에 없는거고... 니가 마지막으로 올린 고구려어가 사라진것으로 '추정'이라는 뇌피셜을 올린거고. 내가 더 말해서 뭐하겠냐?

    • 220國漢文混用蟲2017/02/14(Tue) 15:51:41ID:UxNTI0NjM(35/39)NG報告

      >>218
      적어도 당시의 문물들이 대부분 신라의 그것을 계승한 것이라는 인식은 있었다는 거지.
      그러니까 최해고 나발이고 원래부터 발해에 대한 동질의식이란게 희미했다니까?

    • 221國漢文混用蟲2017/02/14(Tue) 15:55:03ID:UxNTI0NjM(36/39)NG報告

      >>219
      이기문-한국어형성사(1987)를 보고 말한 것이지만?

    • 222名無し2017/02/14(Tue) 15:55:35ID:I3MTI3NjQ(68/71)NG報告

      >>221 결론이 추측으로 끝나는걸 보고도 그게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는 놈이 나한테 허수아비 운운한거냐?

    • 223名無し2017/02/14(Tue) 15:56:14ID:I3MTI3NjQ(69/71)NG報告

      >>220 그만하고. 신라 짱짱이라고 해라. 내가 하나 하나 가르쳐주기도 귀찮고 너는 이해하지도 못하는것 같다.

    • 224名無し2017/02/14(Tue) 15:57:14ID:I3MTI3NjQ(70/71)NG報告

      내가 마치 신라의 의의를 부정하는 모양새가 되는데 나는 신라도 존중하고 존경한다니까? 그런 문제가 아닌데 대화 진도가 더 이상 안나간다. 수고해라. 그리고 공자랑 제자백가에서 유가들 한번보고. 다 보고나면 묵자를 봐도 좋다.

    • 225國漢文混用蟲2017/02/14(Tue) 16:19:04ID:UxNTI0NjM(37/39)NG報告

      고구려, 백제는 정통이 아니다 = 고구려, 백제는 한국사가 아니다
      몇몇의 개인 저작이 당대의 주류 인식을 반영했다 볼 수 없다 = 삼국사기는 당대의 주류 인식을 반영했다
      고려 시대에 발해에 대한 동류 의식은 희박했다 = 발해는 한국사에서 배제시켜야 된다

      아주 지 꼴리는 대로 해석하는 구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삼국사기는 신라편향적이다"라는 국사 교과서의 거지 같은 논리를 주구창창 외쳐대는 것부터 미친 놈이란 건 알아차렸다만.

      에휴. 나도 포기한다.

    • 226名無し2017/02/14(Tue) 16:20:19ID:I3MTI3NjQ(71/71)NG報告

      >>225 역시 급식충 답다 ㅋㅋㅋ 첫 말부터가 니가 말하는 논리학적으로 반박이 가능하다만 말귀를 알아먹지도 못할테니 굳이 할말은 없다. 공부열심히 하고 수고해라.

    • 227名無し2017/02/14(Tue) 16:24:49ID:c4Mzg2MA=(5/5)NG報告

      >>225 궁금한게 김부식이 정변일으키고 반대파 싹다 밀어버리고 적은게 왜 당대 주류인식이 되는거냐?? 윤언이 같은 사람들 전부 잡아죽이고 지 입맛에 맞는 사람만 고른거잖어? 김부식 뒤지고 이규보도 까지않았냐? 발해운운하면서??

    • 228國漢文混用蟲2017/02/14(Tue) 16:28:45ID:UxNTI0NjM(38/39)NG報告

      >>227
      몰라. 씨발. 저 새끼가 그렇게 말한다고.

    • 229名無し2017/02/14(Tue) 16:29:22ID:Q1NjQ1NDY(2/2)NG報告

      >>228 니가 한말이 잖아 통구이새끼야 지가 뭐라고 말한지도 모르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너 진짜 장애인이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230名無し2017/02/14(Tue) 16:30:17ID:M1ODE4MA=(1/1)NG報告

      내가 보기에는 스레주가 이런 큰 떡밥을 논할 그릇은 아닌거 같은데.. 아직 급식충이라고 하고. 아무래도 고등학교 중학생들한테는 큰 떡밥은 무리지. 걍 가벼운 주제로 얘기하는게 좋을듯.

    • 231國漢文混用蟲2017/02/14(Tue) 16:30:36ID:UxNTI0NjM(39/39)NG報告

      >>229
      내 글 다시 읽어봐라. 내가 언제 삼국사기가 당대의 세류 인식을 반영한다고 했냐??? 난독해놓고 헛소리하지 마라.

    • 232名無し2017/02/14(Tue) 16:31:45ID:IzODAyNTg(1/1)NG報告

      >>229 걍 무시해라. 노잼됐다.

    • 233名無し2017/02/14(Tue) 16:50:29ID:c2MzQ5NDI(9/15)NG報告

      >>188
      >新羅としてではなく一豪族が勝手に朝貢したから関係ない?(そんなことが許されるのか?)
      >など疑問は残るところです。

      何だ、このいい加減な反論は?
      広開土王碑文の改竄主張と同じような主張だな

      1970年代に韓国人学者が何の根拠もなく「広開土王碑文の拓本は日帝が改竄した」と主張した
      当時広開土王碑文は中国にあり実物を確認出来なかった事と、
      碑文の表面がボロボロになっていたため石膏で固められてしまっていた事で
      その主張を否定できなかった
      その後、日本人が拓本をとった年代よりも前に、中国人がとっていた拓本が発見されたことで
      「広開土王碑文の拓本は改竄されていない」ことが確認された
      韓国人学者による根拠のないつまらない見栄っ張りの自国歴史歪曲主張で
      広開土王碑文の研究が40年ものあいだ停滞してしまったのだ

    • 234名無し2017/02/14(Tue) 17:20:05ID:M2MzkzNDI(3/4)NG報告

      >>233
      国家昆虫中国語ミックスさんは中国の史書と朝鮮の史書に書かれていないことはノーカンです。
      日本は金泰廉に王子だと騙されて大量の金を受け取ってしまったのです。
      席次争いも王子でも何でもない人間が唐に招待され日本と争ったのです!!
      彼の席次争いの考察は面白かったです。

      広開土王碑文については国家昆虫中国語ミックスさんは認めると思います。書いてあることが命ですから。
      ただどのレベルの属国だったかは書いていないのでノーカンだと思います。

    • 235名無し2017/02/14(Tue) 18:56:12ID:c2MzQ5NDI(10/15)NG報告

      >>234
      織間は何を言ってるんだ?

    • 236TEN2017/02/14(Tue) 21:24:08ID:cxNzYwMTg(3/5)NG報告

      >>233
      金泰廉が実際の王子ではないという説は日本側でも提唱者がいないわけではない説です(孫引きでしか見たことがありませんが、和田軍一氏等)

      最も一般に日本の学会では金泰廉を実際の王子と見なす流れにあるように思います。
      朝貢使という体裁を取ったことについては
      ①渤海と日本による新羅挟撃を防止するため。
      ②交易上の都合
      の二点から、不本意ながらこの形を受け入れた物と説明するものをよく見ます。

      私個人としては金泰廉の朝貢については、新羅の公的立場と相容れないため新羅側の記録から削除されたもの、と思います(『日本書記』において日本が失敗した外交の記録が記載されていなかったり、遣隋使や遣唐使の朝貢使としての役割を記録に残していない事等と同様でしょう)

      ですが、前近代の外交使節というのは現地判断で適当にその場を取り繕ったり、偽物がたくさん混じっていたりと、現代の感覚よりもずっとアバウトな存在でもあるので偽物の可能性を排除できるわけでもありません。
      時代が下りますが、日朝関係においては大量の「偽日本国使」が実際に行き来していましたし、「対馬は朝鮮への帰属を望んでいる」という偽使節の話を真に受けて、朝鮮側が印綬を作って授けに行ってしまったなどと言う例もあります。

      その意味で、金泰廉偽物説は定説とは言えないにしても、そこまで荒唐無稽なものではないです。
      広開土王碑文問題と同列に扱うのはやや飛躍かと。

    • 237名無し2017/02/14(Tue) 21:58:59ID:c2MzQ5NDI(11/15)NG報告

      >>236
      新羅王子金泰廉ら700余名の新羅使が日本へ朝貢した翌年の753年に
      正七位下の位階にあった山口忌寸人麻呂が遣新羅大使として新羅に派遣された
      しかし、新羅の景徳王は遣新羅使に謁しなかった

      景徳王が遣新羅使に謁しなかった原因は、
      天皇が新羅王子金泰廉に、
      「今後は新羅国王みずから来朝し直接ことばで奏上するように」と述べたことに怒ったのか、
      753年正月、長安の大明宮で開催された唐の朝賀で日本との席次争いに敗れたことに怒ったのか、
      どちらかだろう

      遣新羅大使の山口忌寸人麻呂は、新羅国王に面会できなかったが、
      新羅の役人と「前年の新羅王子金泰廉らの朝貢」の話をしただろうと思う
      金泰廉が偽物の王子であったなら、その情報は日本に伝えられたはずだ

    • 238makobee 2017/02/14(Tue) 22:10:38ID:k3MjM3MDY(1/2)NG報告

       部分的に、楽しく読んでますが、日本人の私は、翻訳がおかしくなるので、追いかけられません。 文献上の記載事実と、希望的想定の分離が、僕も分離ができてない。 基本的に、何らかの資料からの引用部分と、著者の希望的想定の部分は、その引用資料を査読しないと、判断が難しい。 
       議論に参加できるだけの、基礎的な教養が、たりないのは、もどかしいな。
       以上、オーディエンスの感想でした。
       

    • 239名無し2017/02/14(Tue) 22:16:43ID:c2MzQ5NDI(12/15)NG報告

      >>238
      697年~791年までの日本の歴史を797年に完成させた、正式な日本の国史「続日本紀」の記述

      743年、新羅使の金序貞(きん・じょてい)らが来朝した
          ※金序貞は新羅第8位の官位の薩きんであった
      日本の太政官は、
      新羅の水手「水夫(かこ)」以上の者を召して、
      新羅使の調(みつぎ)が従来の例に比べて、大いに礼を失していることを告げ、
      速やかに退去させた

    • 240名無し2017/02/14(Tue) 22:18:54ID:c2MzQ5NDI(13/15)NG報告

      >>238
      697年~791年までの日本の歴史を797年に完成させた、正式な日本の国史「続日本紀」の記述

      752年、新羅王子で韓阿きん(官位17等の第5位)の金泰廉(きん・たいれん)、
      貢調使で大使の金喧(きん・けん)、王子を送る使いの金弼言(きん・ひつげん)ら7百余人が
      7艘の船で来朝した
      新羅王子の金泰廉(きん・たいれん)らが天皇にお目にかかり調(みつぎ)を献上した
      金泰廉 新羅国王から言上します
          新羅は遠い昔の王から代々絶え間なく天皇に奉仕してきました
          国王が自ら来朝すべきですが、1日でも主がいないと国が緩むので、
          王子泰廉を名代として種々の御調を貢進させます
      天皇  新羅王の忠誠を朕は喜んでいる
          今後も末永くいたわり慈しみを加えよう
          新羅は神功皇后がかの国を平定して以来我が国を守る垣根の役を果たしてくれた
          ところが前国王の孝成王は礼儀を失ってきた
          そこで罪を攻めようとしていたが、
          景徳王は以前の過ちを悔いて王子泰廉を遣わして御調を貢進した
          朕はこれを大変喜ばしく思う
          今後は国王みずから来朝し直接ことばで奏上するように
          もし代わりの者が入朝するなら必ず上奏文を持参するように

    • 241名無し2017/02/14(Tue) 22:20:40ID:c2MzQ5NDI(14/15)NG報告

      >>238
      697年~791年までの日本の歴史を797年に完成させた、正式な日本の国史「続日本紀」の記述

      753年(天平勝宝5年)には長安の大明宮で開催された唐の朝賀で遣唐使大伴古麻呂が新羅の使者と席次を争い意を通すという事件が起こる
      この際、唐は新羅が日本の従属国である事実を受け新羅を下位に置いた

    • 242名無し2017/02/14(Tue) 22:22:44ID:c2MzQ5NDI(15/15)NG報告

      >>238
      697年~791年までの日本の歴史を797年に完成させた、正式な日本の国史「続日本紀」の記述
      753年、正七位下の位階にあった山口忌寸人麻呂が遣新羅大使として新羅に派遣された

      三国史記の記述
      753年、新羅の景徳王は遣新羅使に謁しなかった

    • 243TEN2017/02/14(Tue) 22:32:32ID:cxNzYwMTg(4/5)NG報告

      >>236
      私も自分の見解としては236さんに大体異論はないです。

      ただ、金泰廉偽物説が広開土王碑文改竄説と同列というのはちょっと行き過ぎかなあと思った次第です。

    • 244TEN2017/02/14(Tue) 22:33:19ID:cxNzYwMTg(5/5)NG報告

      >>237
      >>236じゃなくて237です。

    • 245makobee 2017/02/14(Tue) 22:38:57ID:k3MjM3MDY(2/2)NG報告

      >>239
      >>240
      >>241
      >>242
      >>243
      解説ありがとう!
      内容確認します。

    • 246名無し2017/02/15(Wed) 12:12:56ID:c3MjYzOTU(4/4)NG報告

      >>237
      私もあなたと似たような考えではあるが、いくら筋道があって論理的でも金泰廉は日本書紀以外王子という記述はないのでどうしようもないのです。
      まず当時の日本と新羅での王子の定義が違うかもしれないし権力の大きさもわからないからなんともいえない。
      金泰廉はその後に新羅の王になってないからこの時代の外交的な約束はなかったことになっても仕方ないでしょう。
      韓国は今でも外交的な約束はなかったことにしているけどね(笑)

      個人的な推測では金泰廉の一族は唐と日本の外交を任されていたし、金泰廉自身も次期王だと思っていたと思う。
      大恭・大廉の兄弟の反乱で失脚したため歴史から消されてしまったのでしょうけれど、新羅征討計画とこの反乱に繋がりがあったら歴史的に面白いと感じます。

    • 247名無し2024/01/07(Sun) 21:05:48ID:M2NDI5MDg(1/1)NG報告

      신라의 아름다운 금관에 달려있는 勾玉 이것은 왜 신라의 금관에 달려있을까?

      신라왕족의 인종은 스키타이라고 판명되었지만.

      그렇게 멀리서 온 인종이 왜 일본의 勾玉를 자신들의 장식품으로 사용하였을까?

      나는 이 불순물 勾玉에 대해서 궁금하다.

    • 248名無し2024/01/08(Mon) 04:08:20ID:E1MzMwNA=(1/1)NG報告

      >>1
      朝鮮サイコロって言うのか
      初めて知った

      なーんだ
      朝鮮にも朝鮮特有の文化あるじゃん
      何故これをもっと広めない?
      ドラマや歌のように日本をパクったものでなくこういう朝鮮サイコロのような独自性の高いものを広報しろよ



      支那サイコロの劣化品が朝鮮サイコロという真実はさておき

      読めるの?韓国人にこのサイコロの目

    • 249ウータイ暫定政府職員ヨメ2024/01/08(Mon) 06:52:30ID:IwMjM2NzY(1/1)NG報告

      朝鮮人バトル、始まってたんだな…

      伝説の槍→ Ψο_(`◇´)_ο⇡ ←伝説の鉾
      もっかい、やって。見逃した。

    • 250名無し2024/01/08(Mon) 11:21:23ID:A3MDE3NjQ(1/3)NG報告

      金海、4世紀。韓国と異なり遺伝的に多様だった時代。三国時代、加耶。
      現代の韓国人、日本人、縄文人に近い埋葬遺体、墓の遺体の血統が社会的地位には対応していない。

    • 251名無し2024/01/08(Mon) 11:53:16ID:A3MDE3NjQ(2/3)NG報告

      アイダホ州1万5785年前の有茎尖頭器(槍の先端につける石器)北海道から出土した形式と類似。
      https://www.science.org/doi/10.1126/sciadv.ade1248
      有舌尖頭器Tanged pointは、草創期・早期・前期・中期・後期・晩期に6区分される縄文時代の初頭である草創期中ごろにみられる石器、
      済州島高山里遺跡に土器と共にある。

      石器使用痕分析の東アジア標準判定法の確立と文化進化理論への応用
      韓国の共同研究機関の保管資料を再分析し追求した。忠清北道のスヤンゲ遺跡第4文化層出土の後期旧石器時代の石器群について、韓国先史文化研究院(清州市)でスンべチルゲ(有茎尖頭器)の一括観察を継続し、昨年度に英文公表した成果に加えて中倍率法による分析を深めた。石器機能研究を文化進化論に位置付けるための「技術組織」概念との総合は、同石器群がホモサピエンスの東アジア到来直後の年代であることから、着柄行動の分析を通じ追求した。山形県角二山遺跡の継続調査では、年代測定資料を確保し、組合せ道具の細石刃文化の東北地方への拡散について、知見を得た。

    • 252名無し2024/01/08(Mon) 12:48:04ID:M2NTcxMDg(1/1)NG報告

      >>247
      スキタイ説は何ら証拠が無いだろ。

    • 253名無し2024/01/08(Mon) 13:09:51ID:YwOTM3OTI(1/1)NG報告

      小学校の歴史で習った渡来人というのは、新羅人のことだろうね
      ただしその新羅人が、現代韓国人の直接の先祖だとは限らない
      スキタイ人で白人系なら、骨格とかDNAが見つかれば分かりそうなもんだが、どうだろうか

    • 254名無し2024/01/08(Mon) 14:41:54ID:A3MDE3NjQ(3/3)NG報告

      スキタイは伝承通り、人(敵)の皮を利用する特徴。
      https://pubmed.ncbi.nlm.nih.gov/38091270/ 2023ウクライナ発掘

      シベリア南部溶解炉、紀元前2世紀から開始、7世紀消滅。スキタイではなく匈奴~突厥まで。
      https://papers.ssrn.com/sol3/papers.cfm?abstract_id=417472

      ウイグル地域の女性の鞍はスキタイ遺物よりも古い。
      https://refubium.fu-berlin.de/handle/fub188/40431

    • 255名無し2024/01/08(Mon) 16:39:22(1/2)

      このレスは削除されています

    • 256名無し2024/01/08(Mon) 16:40:11(2/2)

      このレスは削除されています

    • 257名無し2024/01/08(Mon) 16:50:50(1/1)

      このレスは削除されています

    • 258名無し2024/01/08(Mon) 17:25:16(1/1)

      このレスは削除されて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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