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国海軍、初の訓練艦配備…名称は壬辰倭乱で日本に大勝した戦闘に由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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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名無し2021/04/06(Tue) 12:24:50ID:gxNTE4NDY(1/1)NG報告

      韓国海軍教育司令部は5日、海軍初の訓練艦「閑山島(ハンサンド)」(ATH-81、4500トン級)を実戦配備したと明らかにした。艦名は忠武公李舜臣(イ・スンシン)将軍が壬辰倭乱の際に日本を大きく退けた閑山島大捷に由来する。

      「閑山島」は韓国海軍の艦艇で初めて沿岸実習・巡航訓練を目的に建造された海軍史上初の訓練艦だ。海軍将校・副士官候補生と訓練兵が戦闘指揮・機関実習をはじめとする実戦と同じ訓練をする。

      閑山島は乗組員ら400人以上の居住スペースと大型講義室など最新教育訓練施設を構築した。また、韓国の軍艦のうち最大規模の医務室と病床を備え、負傷者を救助・治療する役割も担う。

      カン・ドンフン海軍教育司令官は「閑山島を通じた実戦的な教育訓練を通じ『必勝海軍』伝統継承に貢献してほしい」と頼んだ。
      https://japanese.joins.com/JArticle/277355

    • 29バカなのでわかりません ◆fhm0WAmT5w2021/04/06(Tue) 19:55:46ID:Q5NTc4NTg(2/3)NG報告

      >>24
      >>何故か対中華民族、対モンゴルに関する艦名ってないよね

      ∩<#;`Д´>
      そんな事したら、モンゴルはともかく、宗主国様にどんな目にあわされるか判ったもんじゃ無いニダ‼︎
      戦犯チョッパリ国は、ウリナラがどれだけ挑発しても感情的に殴り返してくる事は無いから安心して煽る事ができるニダ‼︎
      それに、最近ちょっと対応が冷たくなっているような気がするニダが、それでもウリナラ大韓民国がマジでヤバくなった時、なんだかんだで最後に手を差し伸べてくれるのが、弟である戦犯チョッパリ国である事を、ウリナラはよく判っているニダよ。

    • 30バカなのでわかりません ◆fhm0WAmT5w2021/04/06(Tue) 20:03:16ID:Q5NTc4NTg(3/3)NG報告

      >>23
      >>韓国の艦艇に大韓民国に成ってからの由来名は無しw

      ∩<#;`Д´>
      いったい誰の名前をウリナラの艦艇につけろと言うニカ⁉︎
      北傀が攻めてきた時、脱出路の橋を爆破して多数の市民を盾として置き去りにして真っ先に逃げ出したあいつニカ⁉︎
      それとも、血書を書いてまで日帝軍に従軍し、同胞に多大な危害を加え、最後は側近に暗殺されたあいつニカ⁉︎
      骸骨部隊を率いてウリナラ同胞を弾圧し、最後は刑務所送りになったあいつニカ⁉︎
      それとも、チャンケに媚を売ってアメリカとの関係を悪化させた挙句、アジア通貨危機でIMFの介入を受けるような様にしたあいつニカ⁉︎
      アメリカとの関係を完全に悪化させた挙句、フクロウ岩から紐なしでバンジージャンプを楽しんだあいつニカ⁉︎

    • 31名無し2021/04/06(Tue) 20:57:46ID:c4NTM4NzQ(1/2)NG報告

      >>23
      あの曰く付きの214型潜水艦の一番艦が、南朝鮮海軍の初代海軍参謀総長である孫元一の名前がついてるがな。
      度重なる不具合でずっとドッグの肥やしのようだがw

      この孫元一なる人物も軍事的功績はほとんど無くて、朝鮮戦争時にアメリカで中古軍用軍艦を買い付けただけというw

    • 32[中韓倭 서열] 중국=皇,대한민국=王,왜국=侯2021/04/06(Tue) 21:16:34ID:A5NTY3MTI(1/9)NG報告

      >>2 >>3 >>4 >>5
      閑山島 해전의 승리로 인해, 평양까지 진격한 小西行長는 추가 보급 및 병력 지원이 없어서 더이상 진격하지 못했다. 閑山島 해전은 倭水軍의 水陸竝進을 완전히 박살낸 대첩이다. 閑山島 해전은 다른 해전들에 비해 군사학적으로 가치가 높은 전투로서, 해상에서의 포위 섬멸을 이 정도로 정교하게 보여준 전투는 세계 역사적으로도 드물다.

      왜군은 때마침 역방향의 해류에 밀리는 와중에, 사방에서 날아오는 포탄과 火箭에 의해, 主力船인 關船는 물론이고, 주요 家臣들이 탑승한 安宅船,마저 연달아 격침되면서, 제대로 반격도 하지 못하고, 40隻이 넘는 戰船을 잃었다. 심지어 지휘관인 脇坂安治마저 지휘船을 관통한 화살에 맞아 부상을 당했다. 이후 그는 자신의 戰船을 버리고, 속도가 빠른 關船에 탑승하여 金海 방면으로 도망친다.

      脇坂安治의 잔존 병력(200~400명)은 閑山島에 戰船를 버려둔 채 인근의 무인도로 도망쳤으며, 大船 1隻, 中船 7隻, 小船 6隻 등은 멀리서 해전을 관망하다가, 왜군의 주요 함대가 모두 격침되자, 방향을 전환하여 金海로 후퇴했다.

    • 33名無し2021/04/06(Tue) 21:19:52ID:k3MDM3MTI(2/12)NG報告

      >>32
      ????

      停戦すら知らずに、奇襲をかけて返り討ちにあった間抜けの雑魚だろ。

    • 34名無し2021/04/06(Tue) 21:22:04ID:M1MjIxNDQ(2/5)NG報告

      >>32
      朝鮮人らしい歴史認識で笑える。
      遠方から船で来た兵に本土を数日で侵略されても負けてないnida

    • 35[中韓倭 서열] 중국=皇,대한민국=王,왜국=侯2021/04/06(Tue) 21:23:42ID:A5NTY3MTI(2/9)NG報告

      말도 안되는 참패를 겪은 왜군은, 이틀 후 安骨浦 해전에서, 뒤따라 출격한 九鬼嘉隆의 함대까지 각개 격파를 당하게 되면서, 거의 100여隻에 달하는 大함대가 고작 3일만에 수장당하는 치명타를 입는다. 급기야 더이상 해상 전투에서 큰 이득을 거두기 어려운 것을 알아차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해전을 지양하고 해안선 방어에 전념하라는 의미에서 '해전 금지령'을 선포하면서, 사실상 남해의 제해권을 조선군이 되찾는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이로 인하여, 조선의 서해를 통한 水陸竝進이라는 왜군의 목표가 좌절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순신 장군의 함대가 4차로 출동했을 때에는, 왜군의 본진이었던 부산까지 습격당한다. 이렇게 왜군이 해상에서의 요격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것은, 明軍의 남하와 더불어 왜국의 임진왜란의 큰 패인이 된다. 애초의 계획이었던 육군과 수군이 함께 진격한다는 전략이 깨진 것이다.

      또한 閑山島에서 조선군이 크게 승리했다는 소식이 퍼지면서, 義兵 활동이 더욱 활발해졌다. 각지에서 義兵이 일어났고, 해안가에서 거주하던 백성들은 해상 義兵이 되어 이순신 장군과 함께 싸우거나, 지형과 해류를 알려줘서 조선군의 작전에 큰 도움이 되었다.

    • 36名無し2021/04/06(Tue) 21:27:21ID:k3MDM3MTI(3/12)NG報告

      >>35
      李舜臣は何故、停戦後に帰国する日本軍への奇襲を行ったのか?

      1,停戦の意味すら理解できない低能のアホ将軍だった

      2,明から停戦の報を知らされずに、日本軍に攻撃
        つまり、明からは自軍の戦力と見做されていなかった「味噌っかす」の雑魚将軍だった

      どっちだね?

    • 37[中韓倭 서열] 중국=皇,대한민국=王,왜국=侯2021/04/06(Tue) 21:32:23ID:A5NTY3MTI(3/9)NG報告

      >>33 >>34
      해상 義兵들은 나중에 명량해전 당시에도 이순신 장군과 협력했는데, 이순신 장군이 육지로 올라가라고 명령하는 데도 이에 따르지 않고, 판옥선 뒤에 선박을 대어서, 마치 아군의 戰船들이 많은 것처럼 보이게 했다.

      또한 柳成龍은 <懲毖錄>에서 이 전투를 이렇게 설명했다.

      小西行長가 평양에 當到했을 때, 우리 陣營에 이런 글을 보내왔다.
      "우리의 水軍 10만명이 곧 서해로 도착할 것입니다. 임금께서는 이제 어디로 가실 것입니까?"
      (즉, '지원군이 도착하면 義州까지 점령할 텐데, 이제 조선국왕이 갈 곳이 어디 있겠는가.'라고 조롱한 것.)

      원래 敵은 水軍과 육군이 합세하여 서쪽을 공략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巨濟 싸움(閑山島 대첩)에서 패배하면, 한쪽 팔이 꺾였기 때문에, 비록 小西行長가 평양성을 점령하였을 지라도, 軍勢가 외로워서 더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된 것이다. 결국 전라도와 충청도, 황해도와 평안도의 연안까지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기 때문에, 軍糧을 조달하고 명령을 전달하여 中興을 이룩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遼東과 天津 등지에 왜적의 손길이 닿지 않아서, 명나라 군사들이 육로를 통해 와서 구원하여 왜적을 물리칠 수 있었으니, 이것이 모두 이 싸움의 功이다.

    • 38名無し2021/04/06(Tue) 21:35:10ID:k3MDM3MTI(4/12)NG報告

      >>37
      李舜臣は何故「停戦後」に帰国する日本軍への奇襲を行ったのか?

      1,停戦の意味すら理解できない、低能の無能将軍だった

      2,明から停戦の報を知らされずに、日本軍に攻撃
        つまり、明からは自軍の戦力とすら見做されていなかった「味噌っかす」の糞雑魚将軍だった

      どっちだね?

    • 39名無し2021/04/06(Tue) 21:36:33ID:M1MjIxNDQ(3/5)NG報告

      刀は日本刀、鎧は中国風の間抜けな背後から奇襲して討ち死にした李舜臣の降伏姿w

      歴史的にも全く価値のないポンコツ像

    • 40名無し2021/04/06(Tue) 21:43:37ID:c4NTM4NzQ(2/2)NG報告

      >>38
      日本軍にやられっぱなしで何も良いところがなかったから、せめて敵将の首をひとつでも取らないと、戦後の朝鮮宮中の権力闘争で全ての敗戦の責任を押し付けられて粛清されかねないからな。
      露梁海戦に先立つ軍議で撤退する日本軍の背後を襲うことを強硬に主張したのは、そういうことだろうよ。

    • 41[中韓倭 서열] 중국=皇,대한민국=王,왜국=侯2021/04/06(Tue) 21:48:42ID:A5NTY3MTI(4/9)NG報告

      脇坂의 領地의 규모 및 동원이 가능한 戰力(1500명)을 감안하면, 그가 대규모의 함대를 운용하는 것은 과장이라는 논란도 존재한다.
      다이묘들은 領地의 규모 1萬石 當 250~ 500명의 병력 동원이 가능했는데, 脇坂는 領地가 3萬石 규모인 다이묘로서, 왜국의 역사 자료에 따르면, 조선으로 출병한 그의 병력은 약1500명이었다.
      그 이전에 참전했던 小田原 포위전 등에서도 얼추 비슷한 병력을 동원했기 때문에, 脇坂가 갑자기 더욱 대규모의 水軍을 이끌고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鍋島 가문의 문서에 따르면, 脇坂의 부대는 선봉대가 조선에 상륙한 이후로 宇喜多秀家의 陣營에 소속한다는 기록이 있고, 해전 당시에 격파한 敵船에서 노역하는 조선인 포로들을 구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인 포로들과 脇坂 본인과 宇喜多秀家의 水軍 세력, 그리고 인원수에 포함되지 않은 瀬戸内海 동부의 해적 세력들, 龍仁 등 조선의 내륙에서 포로로 잡힌 조선인 인부들이 포함된 숫자일 가능성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에 倭水軍의 戰船을 운용하는 선원 또는 그 외의 인부들은, 전부 왜국에서 별도로 징발해서 조선으로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니까 閑山島 대첩에서 사망한 왜군 중에는, 전투원 뿐만 아니라 왜인 선원 또는 인부들도 포함되었다고 봐야 적절하다.

      다만 당시 왜국 사회에서는 계급에 대한 차별이 매우 강해서, 非전투원들을 병력 수에 포함하지 않았을 뿐이다. 사실 이런 식으로 非전투원을 멸시하는 성향은, 왜국에서 매우 장기간 이어졌는데,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왜국에는 "보급병이 군인이면, 잠자리도 새다."라는 얘기도 있었을 정도였다.

      다양한 주인을 섬기는 것이 미덕이었던 전국시대에 살았기 때문에, 무사들이 자신의 이력서라고 할 수 있는 戰攻 기록을 과장하는 것은 이미 문화나 다름없었다. 모범적인 무사라고 알려진 加藤清正조차 攻을 과장하거나, 허위 보고를 하다가 적발되기도 했다.

    • 42名無し2021/04/06(Tue) 21:51:35ID:I5MTM1NTA(1/1)NG報告

      惨めすぎる朝鮮の歴史。
      お前ら、察してやれよ。

      朝鮮人にとってはあれが歴史的大勝利だったんだよ。

    • 43名無し2021/04/06(Tue) 21:55:08ID:k3MDM3MTI(5/12)NG報告

      >>40
      うーん。今ですら無いのに、責任を取るという概念が当時の朝鮮にあったかどうか・・・w
      保身からなのか、はたまた功名心から帰国する船を攻撃したのか。

      よりにもよって、釣り野伏や、島津の退き口で有名な鬼島津を攻撃する愚挙w
      殿は強兵の役目で大役だと言う事を、知らなかったんだろうなぁw

    • 44名無し2021/04/06(Tue) 21:56:45ID:gzOTIxNDI(1/1)NG報告

      英雄も嘘www
      さすが韓国www

    • 45名無し2021/04/06(Tue) 21:57:44ID:k3MDM3MTI(6/12)NG報告

      >>41
      それで、問いには答えられんのかね?

      李舜臣は、停戦を知らされていたのかね?
      それとも、停戦の意味を知らなかったのかね?
      戦果が無い焦りから、卑劣と知りつつも、帰国する日本の船を強襲したのかね?

    • 46[中韓倭 서열] 중국=皇,대한민국=王,왜국=侯2021/04/06(Tue) 22:01:21ID:A5NTY3MTI(5/9)NG報告

      확실한 것은, 九鬼嘉隆와 加藤嘉明 등이 함께 출전한 安骨浦 해전보다도, 脇坂는 많은 함대를 이끌고 閑山島 近海에 나타났다는 것을 보면, 상당한 戰力 및 규모를 갖춘 함대가 출전했다는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이며, 이는 조선 水軍이 그 이전의 해전에서 마주쳤던 倭 水軍들 중에서 가장 대규모였다.

      脇坂는 이 전투에서 실로 참담한 패전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전비 정직하게 기록으로 남겨서 후세에 전했다. 허세는 기본이고, 武功은 마구 확대하고, 패배는 애써 축소했던 당시의 무사로서는, 상당히 이례적인 인물이었고, 그 덕분에 閑山島 대첩 前後의 왜국측 사정을 비교적 상세하게 알 수 있다.

      패전 직후 조선군의 추격 船團에 쫓기던 脇坂는 급히 다른 戰船에 탑승하여 무인도에 급히 상륙했는데, 조선 수군이 곧바로 몰려와서 그 선박을 불태워버렸고, 脇坂와 부하들은 졸지에 육지에서 5 km나 떨어진 무인도에 갇히고 말았다.
      그러자 그 戰船의 선장이었던 眞鍋左馬允는 동료들에게 미안한 감정에 할복 자살했고, 脇坂는 무려 10여일 동안 미역만 뜯어먹으며, 섬에 숨어서 조선군이 철수하기를 기다렸다. 조선군이 철수하자, 脇坂와 부하들은 자신들이 탑승하고 온 선박의 잔해를 뜯어내고, 뗏목을 만들어서, 필사의 탈출을 감행했다.
      (물살이 어지럽고 빠른 閑山島 근방의 해역을, 급조된 뗏목으로 무려 5 km를 헤치며 갔다는 것.)

    • 47名無し2021/04/06(Tue) 22:04:07ID:k3MDM3MTI(7/12)NG報告

      >>46
      コピー&ペーストを繰り返すだけで、問いには答えられないのかね?

      いくら取り繕っても、無能な雑魚将軍の評価は覆らんよ。

    • 48[中韓倭 서열] 중국=皇,대한민국=王,왜국=侯2021/04/06(Tue) 22:05:20ID:A5NTY3MTI(6/9)NG報告

      脇坂 가문의 現 當主이자, 脇坂安治의 14代孫인 脇坂 Genji의 증언에 따르면, 脇坂安治는 이 날의 패배를 기억하기 위해, 귀국 이후에도 집안 사람들이 閑山島 해전이 일어났었던 날마다, 반드시 다른 것을 먹지 않고 미역만 먹도록 했다고 하며, 그 전통이 자신의 代까지 남아있어서, 자신은 閑山島 대첩이 있었던 날을 '집안 사람들이 미역만 먹는 날'로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 49(´・ω・`)2021/04/06(Tue) 22:05:53ID:kwNDQ3OTQ(1/3)NG報告

      >>32

      李舜臣は、日本軍の海上輸送路を遮断し、日本水軍を次々と撃破して海上では無敵の存在だった【らしい】がw



      無敵の李舜臣がいたのに、簡単に朝鮮半島に上陸されたり
      朝鮮人陶工や朝鮮人が多数連れ去られたのは、何故だろう?w


      答えはどっち?

      ①李舜臣は無能だった

      ②李舜臣の功績は捏造だった

    • 50(´・ω・`)2021/04/06(Tue) 22:09:00ID:kwNDQ3OTQ(2/3)NG報告

      >>46

      脇坂安治の水軍の動員数は1500人だぞw

      別に大群じゃないがww

    • 51名無し2021/04/06(Tue) 22:10:22ID:k3MDM3MTI(8/12)NG報告

      >>48
      李舜臣が有能で戦上手であったのならば、殿(しんがり)が強兵である事を知らずに攻撃し、返り討ちに合うという、底なしの間抜けな行動はしない。

      戦を知っていれば、撤退時の追撃を防ぐための「後詰め」が猛者である事を知っていて当然。
      返り討ちにされている時点で、戦知らずで無能の証明。

    • 52名無し2021/04/06(Tue) 22:18:02ID:k3MDM3MTI(9/12)NG報告

      >>48
      「家の人がワカメだけ食べる日」

      そんなものは無い。

    • 53[中韓倭 서열] 중국=皇,대한민국=王,왜국=侯2021/04/06(Tue) 22:18:38ID:A5NTY3MTI(7/9)NG報告

      >>38
      괜히 귀국하는 상대를 기습했다는 비난은, 이순신 장군과 당시 조선의 사정을 전혀 생각하지 못한 발언이다.
      일단 명나라로 가는 길을 안 열어줬다는 터무니없는 이유로, 평화롭게 지내고 있던 이웃 나라를 침공한 것이 왜국이다.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명분이 중요한데, 이것은 명분조차 안 된다. 무엇보다도 대의명분을 중요하게 여기는 유교권 문화일수록 더욱 그렇다.) 이순신과 조선 수군의 입장에서는 戰力의 한계 때문에, 복수를 위해 왜국으로 쳐들어갈 수도 없으니, 이들을 섬멸하는 것만이 7년 전란에 대해 왜국을 징벌할 유일한 방법이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終戰'과 '퇴각'은 엄연히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노량해전 당시, 그리고 왜군이 조선 영토를 완전히 떠난 후에도 수년 동안 명나라/조선/왜국 정부의 입장에서 임진왜란은 아직 끝난 전쟁이 아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결국 왜국이 전쟁을 포기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당장 조선 측이 인지했을 리는 없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西軍이 이겼다면, 前代의 유지를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전쟁을 재개할 수도 있었고, 반대로 내전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임자를 능가하는 군사적 업적을 과시하기 위해, 다시 전쟁을 일으켰을 가능성도 있었다.

      물론 후대에 역사를 살펴보면, 세키가하라 전투의 승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되었고, 그는 조선과 전쟁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 분명하지만, 당시 조선의 누가 그런 미래를 알 수 있었겠는가?
      조선과 왜국 사이의 전쟁이 정식으로 끝난 것은, 도쿠가와 막부에서 정식으로 終戰을 위한 國書를 보내고 협상한 이후, 1609년에 己酉約條를 체결한 이후다. 그 사이 10여년 동안 조선과 왜국의 관계는 휴전도 아니고, 대치 상태에 가까웠다.

    • 54名無し2021/04/06(Tue) 22:25:48ID:M1MjIxNDQ(4/5)NG報告

      >>53
      いつもの朝鮮人の言い訳
      既に明に侵略されていた無能民族の結果だろ?w

    • 55[中韓倭 서열] 중국=皇,대한민국=王,왜국=侯2021/04/06(Tue) 22:27:18ID:A5NTY3MTI(8/9)NG報告

      철군 약속은 명나라의 將帥들이 뇌물 또는 개인적 이유로 불법 합의해준 것일 뿐, 조선이나 명나라 정부의 공식 입장은 '四路竝進策'이라는, 초대형 포위 섬멸 작전을 진행하는 중이었고, 노량해전도 이러한 작전의 일부분이었다.

      실제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조선을 침략할 생각이 일절 없었던 사람인 것은 사실이지만, 왜군이 철수하던 시점의 조선인들이 대체 그걸 어떻게 알았겠는가? 결국 조선의 입장에서는, 왜국의 철군이 종전 이후의 철군이 아니라 전략적인 후퇴에 가까웠고, 이렇게 후퇴한 대규모의 병력이 다시 공격해올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黒田 勝弘의 발언처럼, 후퇴하는 적을 곱게 보내주는 것은, 전쟁을 장기화하고 미래의 위험을 만들 수도 있었던 위험천만한 일이었고, 현대전을 포함한 모든 전쟁에서, 항복하지 않고 퇴각 또는 후퇴하는 적을 공격하는 것에는 문제될 것이 없다. 현대에서도 노량 해전처럼 후퇴하는 적을 얼마나 섬멸하는지, 반대로 후퇴하는 입장에서는 최소한의 피해로 잘 후퇴하는지의 여부가, 전쟁의 전체를 좌우할 정도로 중요한 요소다.

    • 56名無し2021/04/06(Tue) 22:27:27ID:k3MDM3MTI(10/12)NG報告

      >>53
      日本と明との戦いだから、雑魚の朝鮮ごときが知る必要は無い。
      宗主国である明の決定に従わない、無能の雑魚朝鮮の馬鹿将軍というだけ。

      倭国を懲罰する唯一の方法だった。←宗主国である明に決定権があり、朝鮮には決定権は無い。雑魚の属国風情が、勝手な判断を下すな。


      それと、徳川が天下を取った後に、送ってきた朝鮮土人の鶏泥棒は有名。

    • 57名無し2021/04/06(Tue) 22:29:39ID:k3MDM3MTI(11/12)NG報告

      >>55
      朝鮮の立場では、倭国の撤退が従来以降の撤退ではなく、戦略的な後退に近かった、このように後退した大規模な兵力が再び攻撃してくる分からない状況だった。


      Q、それにも拘らず、朝鮮は何故、日本に攻め込む事が出来なかったか?
      A, 朝鮮は、日本に攻め込んでも返り討ちにされる程度の雑魚だったから

    • 58名無し2021/04/06(Tue) 22:31:35ID:gxODkxODA(2/2)NG報告

      >>53
      制海権を保持したという割には、日本軍の橋頭堡が置かれた釜山の奪回は最後まで果たせなかったよね? 本当に制海権があったのかな?

    • 59[中韓倭 서열] 중국=皇,대한민국=王,왜국=侯2021/04/06(Tue) 22:32:10ID:A5NTY3MTI(9/9)NG報告

      >>54
      전술들 중에서 추격 전술과 퇴각 전술이 괜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宋襄公의 사례처럼, 적을 곱게 보내주는 것이 바보같은 짓이다.
      결국 이순신 장군과 조선 수군은 후퇴하는 왜군에게 최대한 타격을 가하여, 향후의 전쟁 수행 의지를 꺾어야 했고, 그래서 露梁에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왜군이 겪는 피해의 정도와 무관하게, 단순히 왜군의 침략을 막아내는 것이 목표였던 이전의 전투들과 다르게, 노량해전은 왜군을 최대한 섬멸하는 것이 목표였을 것이고, 夜間戰이었기 때문에 평소보다 근접전을 벌였기 때문에, 조선군 측에서도 사망자가 많이 발생했다.
      (물론 板屋船 자체는 왜군이 올라가기에 너무 거대한 戰船이었을 뿐 아니라, 조선군의 근접전 능력도 임진왜란 초기와 비교하면 많이 향상된 상황이었으니, 그만큼 倭兵들도 근접전에서 많이 사망하였다.)

    • 60名無し2021/04/06(Tue) 22:37:16ID:k3MDM3MTI(12/12)NG報告

      >>59
      ちなみに、停戦後に襲撃を仕掛けるという行為は武士にとって、極めて恥ずべき事であり、卑劣外道の類。

      ただでさえ卑劣な恥ずべき行為なのに、返り討ちにされて死ぬとかw
      一族郎党、末代までの恥として、その場で全員、介錯無しの切腹する程の、みっともない恥辱だよw

    • 61名無し2021/04/06(Tue) 22:40:32ID:Q3ODkxMzc(1/1)NG報告

      朝鮮半島の歴史で一番優秀だった人間は朴槿恵の父親だろ?
      李舜臣なんて「創られた英雄」
      豊臣秀吉が死んで明国と停戦協定を結び退却する日本軍を後ろから襲っただけ
      それが何故か「歴史的な勝利」と歪曲されている
      朝鮮の歴史は知れば知るほど情けない

      ↓こんな映画まで創って恥ずかしくないのかよ?w

    • 62(´・ω・`)2021/04/06(Tue) 22:42:31ID:kwNDQ3OTQ(3/3)NG報告

      >>59

      太閤記によると、10万石の石高に対して、大船(安宅船)二隻を準備させてるんだけど

      脇坂安治は、3万石の小さな大名なんだよw


      朝鮮では、日本の被害を多く捏造してるんじゃないかい?ww

    • 63名無し2021/04/06(Tue) 22:42:45ID:M1MjIxNDQ(5/5)NG報告

      >>59
      朝鮮人は明に侵略され服従し日本にも侵略された無能な民族なのは世界の認識だ

      独自の築城の歴史も殆どない結果が現存する倭城w

    • 64名無し2021/04/06(Tue) 23:03:05ID:E2Mjk3NTI(1/1)NG報告

      >>43
      今も昔も朝鮮人には「自ら責任を取る」という潔さなど微塵も無く、「他者に責任を取らせる」という陰湿さは多分に存在しているわけでね。
      讒言で査問を受けたり、敗戦の責任を取らされて拷問の上一兵卒まで格下げされた経験を持つ李舜臣は、「このままでは陥れられて殺されかねない」という危機感を抱いたのは当然だと思うよ。

    • 65名無し2021/04/06(Tue) 23:04:24ID:c1OTgwODY(1/3)NG報告

      >>59
      日本で戦死した武将はこいつだけ。

      来島通総・・・村上水軍の一族だがいち早く織田に寝返った為、豊臣政権では独立大名となった。
      慶長の役の鳴梁海戦で朝鮮水軍と戦い戦死。

      後は中川秀政が鷹狩りして遊んでる時に朝鮮ゲリラに討たれたくらい。

      朝鮮はどうだっけ?(笑)

    • 66名無し2021/04/06(Tue) 23:12:45ID:c1OTgwODY(2/3)NG報告

      韓国人の大好きな歴史のお勉強の時間だよー(笑)

      慶長の役 編集
      1597年、李舜臣の後任の水軍統制使・元均が水軍単独での攻撃命令を嫌がりながらも遂行したが、漆川梁海戦(巨済島の海戦)で大敗。元均をはじめとした数名の将軍は戦死し、朝鮮水軍はほとんど壊滅してしまった。李舜臣は、水軍統制使に返り咲いて壊滅した水軍の再建を進めた。李舜臣が再任された時、朝鮮水軍には僅か12隻の戦船(板屋船)しか残っていなかった。日本軍によって全羅道や忠清道が掃討されつつある中、壊滅直後の残存艦隊を収容しながら後退した李舜臣の艦隊は、朝鮮半島西南端の潮流の激しい鳴梁海峡へ日本水軍を誘導し、突入してきた日本水軍の先頭部隊を攻撃し、大名来島通総を戦死させた(鳴梁海戦)。しかし、後続の日本水軍は質・量ともに強大なため、海戦の夜には鳴梁海峡を放棄し後退した[11]。続いて日本勢は全羅道西岸拠点を次々と制圧し、停泊地を失った李舜臣はさらに後退し、全羅道の北端まで退却した[11]。日本水軍は全羅道西岸の制圧を実施し、姜沆や鄭希得などの多くの捕虜を得た[注釈 3]。

      全羅道・忠清道の掃討作戦を成功裏に終結させた日本軍は、当初からの作戦計画[12]に沿って慶尚道から全羅道にかけての朝鮮南岸域へ後退して倭城群を構築した。日本軍が後退すると李舜臣の水軍は明・朝鮮陸軍と共に朝鮮南岸へ再進出し、朝鮮南岸西部にある古今島を拠点として朝鮮水軍の再建に努めた。

      1598年7月、日本

    • 67名無し2021/04/06(Tue) 23:14:04ID:c1OTgwODY(3/3)NG報告

      >>66
      軍最西端の拠点であり小西行長率いる13,700人[13]の兵が守る順天城を攻撃するため、陳璘が率いる明水軍が古今島に合流すると、李舜臣は明水軍の指揮下に入った。同年9月、明・朝鮮の水陸軍55,000人[14]による水陸共同の順天攻撃作戦が開始され、戦いは10月初めまで続いたが、水陸両面で明・朝鮮軍は多大な損害を出すなど苦戦が続き、厭戦気分が蔓延して攻撃は頓挫。明・朝鮮軍は撤退を開始し、李舜臣も海上封鎖を解いて古今島に撤退し、兵数で圧倒的に勝っていた明・朝鮮軍は敗北した(順天城の戦い)[注釈 4]。

      豊臣秀吉の死後、日本軍に退却命令が出されると小西行長は明との間に講和を成立させた後、海路を撤退しようとしたが、それを知った明・朝鮮水軍は古今島から松島沖に進出、海上封鎖を実施し小西らの退路を阻んだ。講和後のこの明・朝鮮水軍の行動(ただし明とのみの講和で朝鮮との講和は成立していない)に、小西軍は順天城での足止めを余儀なくされた。この小西軍の窮状を知った島津義弘ら日本側の諸将は急遽水軍を編成して救援に送ることとなり、これに対し李舜臣および明・朝鮮水軍は順天の封鎖を解いて東進し島津水軍を露梁海峡で迎え撃つこととなった。

      この露梁海戦では、夜半からの戦闘が長時間続き、日本軍、明・朝鮮水軍の双方が大きな被害を被ったとされる。明・朝鮮側の資料では自軍の勝利を強調しているが、明軍では副将鄧子龍が戦死、朝鮮軍では主将の李舜臣が島津兵の鉄砲の弾丸を受けて戦死した(後述)。朝鮮軍ではさらに、李英男(加里浦僉使)、方徳龍(楽安郡守)、高得蒋(興陽県監)、李彦良、といった将官が戦死した[16]。一時突出した明軍の主将陳璘も日本軍の包囲から危うく逃れている。 朝鮮側は将軍の戦死や損害過多で統制を欠き、作戦行動の継続が不可能となり、小西軍の救援に駆けつけた島津軍は、殿軍を務めて無事にこれを撤退させ当初の予定通り救援任務を完遂した。

      最期について 編集
      韓国では、李舜臣は露梁海戦において「大敗した日本軍を追撃中に」「

    • 68名無し2021/04/06(Tue) 23:19:13ID:kxNjY3Mg=(1/1)NG報告

      日本政府はステルス戦闘機F35Bを新田原航空自衛隊基地に配備することにした。
      https://n.news.naver.com/article/001/0012305444

      F35Bは新田原航空自衛隊基地から約10分あまりで韓国の釜山港まで飛行することが出来る。

    • 69名無し2021/04/07(Wed) 01:35:53ID:Y0NzE5MTU(1/1)NG報告

      >>19
      閑山島大捷(大勝)、青山里大捷、等々、私がここで知る限り朝鮮は陸海で日本に大勝利ばかりしていた
      日本の侵略軍を完膚無きまで撃退し祖国を防衛した輝かしい戦いの名前を後世に伝えるのは当然である

    • 70名無し2021/04/07(Wed) 01:39:31ID:cyNTkxNTE(1/1)NG報告

      >>59
      そうか、朝鮮人は和解して撤退する者たちの背中から襲い掛かり殺戮するのを正義とするのか?

      さすが、墓を掘り起こしてまでも敵を卑しめる民族。
      下賤すぎて、理解の度を越えた卑しさだ。

      人間として恥ずかしくないのか?

    • 71名無し2021/04/07(Wed) 03:33:22ID:k1NDMwNQ=(1/1)NG報告

      しかし李舜臣将軍、生前は日本の武士団に、海戦でボコボコにされ戦死
      それから500年近く経った後、また日本人に、今度はネット上で、ここまでフルボッコにされるとは思ってもいなかっただろうに

      合掌

    • 72중국과 한국은 한가족이라고 생각한다2021/04/07(Wed) 03:56:31ID:YyNzQ1ODE(1/1)NG報告

      慰安婦の名前を付ければいいのにね

    • 73名無し2021/04/07(Wed) 05:46:19ID:U4MTQzMzQ(1/1)NG報告

      >>8
      응? 정전따위 한적없지만?
      또 날조인가?
      어쨋든 그때 이순신 장군이 그때 공격한 이유가
      저들이 다시는 조선을 넘보지 못하게 해야 한다
      저들은 놔두면 반드시 다시 침략한다
      그리고 정확히 500년후에 이 예언은 적중했지

    • 74名無し2021/04/07(Wed) 07:28:48ID:Q4MzcwODk(1/1)NG報告

      >>40
      壬辰倭乱(文禄・慶長の役)の朝鮮側最大の功労者は豊臣秀吉だ。己の死をもって負け戦続き
      だった戦での豊臣秀吉軍の進軍を止め、日本への撤退をさせたんだから。
      それにしても韓国朝鮮人への歴史教育の捏造は、こんな時代の内容まで全て捏造しているんだ
      な。徹底しているwwwwww。

    • 75名無し2021/04/07(Wed) 09:30:16ID:MzODYyMDE(3/3)NG報告

      李舜臣をヘッドショットした島津鉄砲隊の銅像を対馬に!

    • 76名無し2021/04/09(Fri) 19:29:47ID:Q5NzA3NTE(1/1)NG報告

      >>50
      日本を大きく退けた「閑山島大捷」??
      三万石の脇坂安治が動員できるのは1000人が良い方ではないのか?また戦闘後の点呼でこの隊は残存兵力が900名と判明している。

    • 77名無し2021/04/09(Fri) 20:32:50ID:cxNjc2ODk(1/1)NG報告

      そもそも、有名な海戦は、全て戦略目的を達している。

      さて、この李舜臣だが、
      先手の脇坂軍には勝ったが、本隊からは尻尾を巻いて逃げ出し、根拠地も日本軍に取られた。

      その後、秀吉軍は悠々と渡海を続け、李舜臣が失地を回復する事はなかった。

      まあ、朝鮮以外なら凡将だけど、明が出張るまで、陸でも海でも負け続けた李氏朝鮮だからな。

      でもって、艦名の島って結局、秀吉軍に取られてるんじゃ?

    • 78名無し2021/04/09(Fri) 21:12:40ID:UwOTcwNzY(1/1)NG報告

      なあ、鹿島より小さい船に鹿島の倍の訓練兵詰め込んで大丈夫か?
      まあ、形状を見た感じではステレス化したセウォル号に大砲付けた感があるけど
      トップヘビー過ぎない?セウォル号から何も学んでないだ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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