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年4月3日 済州島四・三事件 6万人
1949年12月24日 聞慶虐殺事件 88名
1950年6月28日 漢江橋爆漢江人道橋爆破事件撃 約500 - 800名
1950年の夏 ボーデリーグ虐殺 10万~20万
1950年10月9日 - 1950年10月31日高陽金井洞窟大虐殺 150名
1950年10月 - 1951年初期 南楊州虐殺 460名以上
1951年1月8日 - 1951年1月6日 江華虐殺 212名
1951年2月9日 - 2月11日 居昌事件大人334人・子供(15歳未満)385人
1951年2月11日 - 1951年2月9日 居昌虐殺 719名
こんな酷い大統領を選んだアメリカに謝罪と賠償を求めなくてもいいの?>>2
こっわ>>65
国の定義をしるべき。
国として認められる要件ね。
君が今から勝手に数十人集めて臨時政府を名乗ったら、国として認められるの?>>105
そこは「20億人ニダ」でしょw>>49
そろそろ支離滅裂で、火病発症(www>>1
朝鮮が日本に併合してもらっていた期間は、
1910年8月29日~1945年9月2日の
35年と5日だ朝鮮人をころすのは朝鮮人
韓国では、東学党の乱で、抗日民族30万人が日本軍に虐殺されたとされ、
子孫遺族を登録する真実究明運動がある。韓国人て虐殺大好きだよね
>>61
韓国人が使っている文字、ハングルを学校教育に導入して教えたのは、ほかならぬ日本の朝鮮総督府なのである。
李朝時代の朝鮮では、王宮に仕える一握りの官僚や知識人が漢文で読み書きをし、他の民衆はそれができないままに放置されていた。ハングルは15世紀に発明されていたが、文字を独占していた特権階層の人々の反対で使われていなかった。それを再発見し、日本の漢字仮名まじり文に倣って、「漢字ハングル混合文」を考案したのは福沢諭吉だった。
「日帝統治下の強圧的な朝鮮語教育をご覧ください」
1939年、朝鮮総督府発行、価格10銭。
1939年は日帝末期、戦争準備の真っ最中で、米穀収奪、金属農機具、資材供出が行なわれていた時代だと習ったが、最高級紙に、当時は珍しいカラー図版まで印刷して教科書を配布した。
当時、10銭であれば、普通列車の基本運賃レベルにしかならない低格安(=現在の電車料金)
翻訳元:http://www.ilbe.com/view/11219387261>>61
日本の朝鮮総督府は小学校段階からハングルを教える教科書を用意し、日本が建てた5200校の小学校で教えた。日本は朝鮮人から言葉を奪うどころか、朝鮮人が母国語の読み書きができるように文字を整備したのである。
併合当時、韓国の平均寿命は24歳だったが、日本統治の間に2倍以上に延び、人口の絶対数も倍増した。反当たりの米の収穫量が3倍になり、餓死が根絶された。はげ山に6億本の樹木が栽培され、100キロだった鉄道が6000キロに延びた。北朝鮮が自慢げに国章に描いている水豊ダムは、日本が昭和19年に完成させた、当時世界最大級の水力発電所だった。
これらのめざましい発展は、統治期間に政府を通じて日本国民が負担した、現在価値に換算して60兆円を超える膨大な資金投下によってもたらされた。本国から多額の資金を持ち出して近代化に努めたこのような植民地政策は世界に例がない。日本の朝鮮統治はアジアの近代化に貢献した誇るべき業績なのである。>>1 너희들이 할말은 아니야
>>65
テロリストがグループ名つけてることと同じだよw>>119
無いから出せない。
対策として、「文化的証拠」を作成中だと思われる。>>118
被害者面する加害者www
悪魔とは 韓国人のことだろ
https://www.himawarijapan.org/%E5%AB%8C%E3%81%8C%E3%82%89%E3%81%9B-%E3%81%84%E3%81%98%E3%82%81/間島慘變(庚申慘變)
1920년 10월 9일 ~ 1921년 5월
봉오동 전투에서 독립군과 교전한 일본군은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중국군을 강제로 동원하여 토벌 작전을 실시하려 했다. 그러나 孟富德의 중국군이 먼저 독립군과 비밀리에 교섭하여, 독립군 부대들은 1920년 8월부터 토벌을 피해 吉林省으로 떠났다. 중국군은 빈 주둔지를 불태운 후, 일본군한테는 이미 독립군이 도주하여 독립군 토벌에 실패했다고 변명했다.
그러다 의문의 '琿春 사건'이 발생하자,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은 중국 측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25,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불법으로 간도에 출동시켰다. 19사단을 주축으로 한 일본군은 3개의 토벌 지역을 편성해서 독립군에 대한 섬멸 작전을 펼쳤지만, 이미 독립군은 안전지대로 피난한 상태였기 때문에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독립군 토벌에 차질이 생긴 일본군은 만주에 거주하는 韓人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間島慘變을 일으켰다. 이런 학살 행위에다 살인, 체포, 강간, 방화로 인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준으로 약 3,016명이 학살당했고 韓人 지역들은 초토화됐다.
간도에서 학살이 발생하기 이전에 연해주에서도 '연해주 4월 참변'이 발생하여 많은 韓人들이 일본군에 의해 학살당했다.연해주 4월 참변 : 연해주에서 일본군이 韓人을 상대로 자행한 대량 학살
일본은 시베리아 연해주의 항일 세력이 너무나 거슬렸다. 자신들의 지배력을 위협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군이 무너지기 전까지, 일본군은 시베리아에서 韓人들을 적극 학살하지는 않았다. 복합적인 국제 문제 때문에 꺼려했다. 다만 백군을 통해 간접으로 통제를 시도할 뿐이었다. 하지만 백군으로는 부족하게 느껴졌고, 시간이 지날수록 연해주의 항일 세력이 거슬렸다.
1919년 7월부터 일본 육군 수뇌부는 조선과 러시아, 중국 국경 지역에 있는 항일 운동가들을 대거 검거하려고 하였다. 일본 해군의 사이토 마코토는 이것을 지지했다. 그러다가 1919년 8월 12일, 사이토 마코토는 3대 조선 총독으로 임명받았다. 사이토 마코토는 부산을 거쳐서 경성으로 갔다.
1919년 9월 2일 사이토 마코토는 경성역에 도착했다. 그 때 사이토 쪽으로 수류탄 하나가 날아와서 폭발했다. 사이토는 이 때 겨우 생존했다. 수류탄을 던진 사람은 노인 동맹 단원, 姜宇奎 선생이다. 그리고 그 노인 동맹단은 바로 블라디보스토크에 기반을 둔 단체였다.
사이토 마코토는 9월 28일에 篠田治策를 만났다. 篠田治策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귀환하여 평안남도 도지사로 승진한 상태였는데, 사이토가 篠田治策와 만난 다음 날, 사이토 총독은 原 敬 총리에게 러시아의 극동 지역과 만주를 철저히 통제할 것을 촉구했다. 이런 전보는 곧바로 도쿄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전해졌다. 파병된 헌병대는 조선에서 인원을 보충받았으며, 1919년 10월 말부터 그 수가 급격하게 증가했다. 일본은 연해주의 韓人들을 더욱 직접 통제할 계획을 준비했다.그러다 백군 진영이 무너졌다. 이런 상황에서 연해주의 항일 운동가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항일 운동을 하였다. 연해주 각지에서 韓人들은 partizan 부대를 더욱 적극적으로 후원해줬다. 만주의 韓人 독립 운동 단체들은 연해주로 무기 수집대를 보냈다. 만주 지역에서 온 수집대는 연해주 마을을 순회하며 무기를 수집했다.
3월 14˙15˙16일 3일 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勞兵會 대표자 선거를 하였다. 공산당 후보 중 金萬謙과 朴Моисей가 선출됐고, 시내에서 광고판으로 알려졌다. 미국 적십자사는 3월 13일 아침, 의 소학교 생도와 간호부, 빈민들에게 의복 등 7백점을 기증했다. 또한 친일파 韓人과 일본의 밀정들은 살해 및 피습되거나 행방불명됐다. 일본 상품 불매 운동도 전개됐다. 이 운동에 韓人, 러시아인, 중국인이 동참했다.
일본 제국은 연해주의 항일 세력에게 더욱 위협을 느꼈다. 다음 일본 측 문건에서 그 점을 알 수 있다.
「시베리아에서의 정치적 변화의 결과로서, 볼셰비키的 요소의 강화는 반일적인 조선인들을 고무하였다. 그들 중 상당수가 지금 전보다 훨씬 더 쉽게 무기를 가지고, 러시아로부터 간도 지역으로 들어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조선으로의 무력 침공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던 지난 10월 경보다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 제국은 연해주에서 항일 진영을 파괴할 준비를 했다. 그러다가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이 일어난다.1920년 3월, 일본 제국 사령부는 연해주의 혁명 수비대에 대해 전면 공세할 준비를 했고, 이것을 군인들에게 비밀리에 명령했다. 항일 조선인들을 제거할 계획도 이 때 포함됐다. 篠田 治策의 후임자이며, 조선 총독부 관리인인 山崎 眞雄,가 이 계획을 세우는데 앞장섰다. 그러고는 3월 31일에 시베리아 일본군을 철병하겠다고 선언했다.
미군은 이미 철병을 선언한 상태였다. 1920년 1월 20일,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미군을 철수시킬 것이라고 선언했고, 당해 4월 1일 러시아 주둔 미군 사령관 William Graves 사령과 병사 2,300여명은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났다. 일본 제국 군사령관은 4월 2일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정부에 韓人들에게 무기를 공급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또한 연해주 정부에는 "일본군의 주둔에 필요한 제반의 사항 즉, 숙영·급양·운수·통신 등에 관하여 지장을 주지 말 것"을 요구했다.
연해주 정부는 일본군의 요구를 수용하기로 했다. 4월 5일에 조약문에 도장을 찍기로 했다. 붉은 군대는 각 부대에 경계 태세를 해제하라고 지시했다. 4월 4일은 지휘관들 다수가 주말 휴가에 들어갔다. 그리고 당일 4월 4일 야간에 일본군은 붉은 군대를 습격하여, 군인들을 무장 해제시키고 체포했다. 일본군의 습격은 4월 8일까지 계속 됐다.韓昌傑은 당시를 이렇게 증언한다.
「1920년 4월 2일, 나는 12시간 내에 韓人 부대를 무장 해제시키라는 聯隊 정치 전권 위원 레베데프 동무의 비밀 명령을 받았다. 나는 그에게로 가서 무슨 일인지 질문했다. 그는 "이것은 외교적 고려 때문"이라고 말했다. 나는 "우리는 아직 아무에게도 발사하지 않은 장총을 가지고 살아 있고, 만일 그들이 나와 일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내가 떠나겠다"라고 제안했다. 레베데프 동무는 나에게, "이것은 단지 완전한 사업을 위한 僞裝일 뿐이며, 大隊는 일본인이 보는 곳에서 무장 해제를 하고, 다른 날에 무장 해제된 partizan을 무장시키기 위해 500정의 장총이 水淸으로 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때서야 나는 동의하고, 레베데프 동무에게서 ‘韓昌傑의 명령으로서, 水淸으로 장총 500정을 선적한다’라는 명령 서류를 가져왔으며, 몇몇 동무와 상의하여 일본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무장 해제를 해야만 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大隊로 갔다. 이와 동시에 은밀히 무장 병력을 타이가로 보냈다. 남은 이들은 무장 해제했다.4월 4일 저녁 10시, 무장 해제한 partizan들을 水淸으로 데려다 줄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열차는 도착하지 않았다. 러시아 partizan의 정찰병이 도착하여, "일본군이 다가오고 있으니 즉시 숨는 것이 좋겠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로마노프까로 향했으나, 그곳에 도착하기도 전에 사격과 포격이 우리를 향해 시작되었다. 얼마 간의 시간이 지난 후, 예전의 partizan들이 도망쳐 와서, "일본군이 수비대를 포위하여 많은 이들을 죽이고 생포했다"라고 알려왔다. 그때 우리는, 韓人 partizan 부대의 무장 해제는 러시아군의 戰力을 약화시키기 위한 일본 통수부의 책략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水淸郡 니꼴라예프까 마을에서, 우리는 쉬꼬또보에서 타이가로 떠났던 우리의 무장 부대를 만났다. 여기서 재정비가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사람은 많았으나, 장총은 적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장 전투적인 동무들을 선발하여, 그들로 부대를 편성했다. 그리고 나머지 인원인 조만간 다시 소집하겠다는 약속을 받은 후, 해산하여 집으로 갔다. 조직된 부대는 다시 니꼴라예프까 마을에 주둔했으며 전투는 하지 않았다」
일본군의 습격으로 기존의 항일 세력은 파괴되고 무너졌다. 일본군은 연해주를 장악하여 투옥된 백군 세력을 석방하고, 무장 해제된 군인들과 민간인들을 체포했다. 군인들 중 러시아인은 백군 진영으로 인계했다. 4월 9일, 라조, 루츠키, 시비르체프, 안드레예프 등이 일본군에 체포됐다. 5월 말에, 일본군은 라조 일행을 백군 부대로 보냈다. 백군은 이들을 무라비요프 - 아무르스카역으로 데리고 가서, 이들을 산채로 기관차의 火室에 던져 태워죽였다. 韓人들은 일본군에 의해 학살되었다.まず 自分で グッドボタン 押すのやめようかwww
일본군은 연해주의 韓人村에 무차별적으로 총을 쏘며 들어왔다. 붉은 군대 측 군인들은 일본군에 의해 무장 해제되었다. 韓人村에 난입한 일본군은 마을을 수색하고 파괴하며, 韓人들을 구타하고, 학살하고, 건물에 방화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新韓村에서는 약 300명이 살해됐다. 거리는 피로 물들었다.
한 러시아 측 문건에는 그 현장을 이렇게 증언한다.
「한인촌은 블라디보스토크의 외곽에 있었는데, 엄청난 강도와 폭력을 체험했다. 야만적인 일본군은 한인들을 마을에서 쫓아가면서, 소총으로 때렸다. 포로들은 신음하고, 비명을 지르고, 죽기 직전의 상태였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끔직한 곳이 되었다. 포로들은 피투성이가 된 채, 찢어진 한복을 정리하지 못 하고, 간신히 일본군을 따라갔다. 모든 지하실, 감옥들은 포로들로 가득 채워졌다. 그날 살인범들이 몇 명의 한인을 죽였는지 짐작하기조차 힘들다.」
A.S.Parfenov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군은 한인들을 결박하여 녹슨 철도에 매단 후, 블라디보스토크 근처에 있는 우리쓰만 바다에 던져 죽여버렸다.
일본군은 파괴와 학살을 벌인 후, 연해주를 장악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주둔지에서 모든 한인 민족주의 조직과 사회주의 조직을 해산시켰다. 그리고 미리 준비한 계획에 따라, 친일 단체들을 조직하여 직접 통제했다. 사이토 마코토 조선 총독은 참모長 우에하라 장군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는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내용이 담겼다. 그리고 일본군은 2년 반 동안 연해주 남부에 주둔하다가, 1922년 10월 25일이 되어서야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났다.
연해주에서의 학살이 끝난 이후 간도에서도 참변이 발생하여 많은 한인들이 일본군에 의해 학살되었다.>>129
>>130
提巖里 학살사건
1919년 4월 15일, 경기도 水原郡 鄕南面 提巖里 교회에서, 일본 육군 헌병 有田俊夫 중위의 주도로 발생한 양민학살 사건. 수십년 이후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Oradour-sur-Glane 학살·Putten 급습사건·알제리 학살에 비견되는 참상을 빚어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 시위운동이 일어나는 중에 提巖里 인근의 개신교와 天道敎, 儒學者 지도자들이 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여, 3월 30일(혹은 4월 5일)에 提巖里 인근 주민 천여 명이 提巖里 發安 장터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일으켰다.
시위대가 일본경찰 주재소로 다가오자, 일본군 헌병들이 출동하여 경고 사격 후 휘두른 칼에 의해, 儒學者 이정근과 그의 제자 2명이 사망했고, 시위를 주도했다는 혐의로 天道敎人과 기독교인 몇 명이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고 석방되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흥분한 주민들이 인근의 일본인 주택과 학교에 불을 질러, 정미업자 사사키를 비롯한 수십 명의 일본인들이 대피했다. 사사키는 이에 앙심을 품고 스스로 자원하여, 일본군 헌병의 길잡이 노릇을 하게 된다.이에 일본은 철저한 초강경 진압 작전을 시작했다. 4월 2일 發安 장터 시위에 참여한 마을 주민들을 색출 및 검거하기 위해, 일본군 헌병과 일본제국 경찰 등으로 구성된 부대가 마을들을 습격하여 불태우고, 주민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다. 일본 군경의 폭압에 따라, 提巖里 인근 주민들은 더욱 격앙되었고, 인근 花樹里와 水村里의 天道敎와 기독교 지도자인 白樂烈과 金敎哲, 그리고 주민들이 주축이 되어 4월 3일, 2차로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가와바타 도요타 순사가 귀가 잘리고, 치아가 뽑히고, 척추가 꺾일 정도로 곤봉에 두들겨 맞아 사망하였다. 일본인 남성 9명이 마을에 남기로 결정하고, 40여명의 여성과 노인, 아이들이 三渓里 마을로 대피하였다.
4월 5일, 일본 육군은 水村里에 들이닥쳐 만세 시위 주동자를 색출한다면서, 주민들을 마구 학살하고, 마을 가옥 42戶 중에 38戶를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水村里에서 교회堂이 불타고, 사람들이 죽거나 체포되었다는 소문을 들은 개신교 선교사들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水村里를 찾았다. 이들 중에는 영국계 캐나다인 선교사, Frank William Schofield도 있었다.
그러던 중, 4월 5일 發安 장날이 되자 만세 시위운동이 다시 일어났다. 그러자 일본 육군은 육군 헌병 有田俊夫 중위가 지휘하는 부대를 4월 13일에 提巖里로 보내 만세 시위운동 주모자들을 색출하도록 지시했다. 이 과정에서 有田 중위는 15세 이상의 提巖里 주민들을 모두 교회堂으로 모이게 했는데, "만세 시위 진압 과정에서 너무 심한 매질을 한 것에 대해 사죄하러 왔다."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이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デモを鎮圧するのに村を燃やすとか、日本軍はそんな頭悪くないからww
이미 有田는 사사키 등을 통해 提巖里 개신교인들의 명단을 확보한 상황이었고, 有田가 교회堂을 나서는 것을 신호로, 일본군은 교회堂에 사격을 시작하는 동시에 짚더미와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렀다. 불을 지르는 과정에서 민가 28채가 소실되었다. 바람이 강해서 교회堂 아래의 민가로 불이 번졌고, 교회堂 위쪽으로는 일본군이 직접 불을 질렀다. 한 여인이 안고 있던 아기라도 살리려고 창문 너머로 던지자, 밖에 있던 일본 군인이 떨어지는 아기를 향해 총검을 내질러, 아기조차 잔혹하게 살해하였다고 한다.
22명이 교회堂 안에서 사망했으며, 3명이 교회堂에서 탈출하던 중 2명은 사망하고, 1명은 산으로 피신하여 겨우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다음날 일부 군인들은 古州里로 가서 華城 지역의 天道敎 지도자였던 金洪烈 일가족 6명도 살해했다. 결과적으로 무고한 양민 28명이 학살되었다.>>135
映画のシーンか?出来事の一部を抜き取り、誇張 捏造 歪曲するのが韓国人の反日ファンタジーのストーリー構成だからね。
「提巖里虐殺事件」で調べたら全く違う事が書かれてたw>>138
韓国人は1980年の光州事件みたいなのと比較して違和感感じないのか不思議w韓国では、海外で一般に公開されている当時の朝鮮に関する写真や統計・資料が国内閲覧禁止になっている(インターネット閲覧制限も諸外国に比べ強力に規制されている)。
又、愚民化政策により、漢字を使った約80年前の新聞や当時の文献ですら解読不能にされているため、見ても意味が理解出来ない。
↑この状態に疑問を抱かない現代韓国人。映画やテレビドラマが真実の歴史だと、韓国人は本気で信じこまされている。当時の自国や海外の資料を調べ、自分自身で判断すれば答えは理解出来ると思うが…>>1 현재 한국의 상황 도와주세요 일본여러분!
1. 문재인 대통령. 심각해져가는 상황에 보다 못해 각 가정당 천마스크 2개 배포 천명!!예산 5200억원 집행!
2. 발열증상 환자. 서울대병원에 검사 받으러 갔다가 퇴짜.
3. 대한의사협회. 죽을 만큼 아플 정도의 환자만 검사 가능.
경증 환자는 검사 거부.
4. 국민 MC이경규 코로나 19로 사망
5. KBS뉴스 앵커 최동석 코로나 19확정
6. 문재인 대통령"코로나도 인생의 소중한 경험"
7. 문재인 대통령"방역 실패해도 내가 책임질 일 아니다"
8. 질병관리본부. 최근 급증한 폐렴 사망자에 검사 없이 즉각 화장...은폐 의혹
9. 평창올림픽 취소로 인해 최소 7조원 적자
10. 한겨례, 오마이뉴스..문재인 방역정책 적극 비판
11. 청와대 비서실장"천 마스크를 빨아서 20번 빨아서 다시 쓸 경우, 일회용 마스크 20억 장분의 소비를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
12. 문재인 대통령. 트위터로 집에서 애견과 함께 여유로운 시간 보내는 모습 올려...비난 쇄도...
게다가, 청와대 비서실장. 문재인 트위터 영상에 좋아요 35만개 붙었다 자랑질.
13. 강호동이 의심 증상이 나서 병원을 갔으나 여러 번 퇴짜 맞아...
14. 부산 경찰들 회식서 술파티 벌이다 집단 감염.
15. N번방 회원들 사교 파티 벌이다 집단 감염.
16. 일본 야후 댓글"문재인 아주 잘하고 있어!계속 그렇게 장기 집권해서 한국을 더욱 박살내줘!"
17. 긴급사태 선언 늦었다는 여론에 문재인 대통령"늦지 않았다. 적절한 때에 선포했다"
18. 서울 확진자 중 70%가 감염경로 미궁.
19. 문재인 대통령."하루 2만건 검사 하겠다".
현실은 단 한번도 2만건은 커녕 절반에도 미친 적 없어...
20. 문재인 대통령. 검증도, 임상실험도 안된'아비간'을 해외에 수출하기로...
21. 서울 시장"방호복 대신 쓰레기봉지 쓰고 치료하는 상황">>135
全く意味もなく、理由もない殺害行為。
こんなのを真に受けるって…
ピュアなのか馬鹿なのか…
どう考えても小説、映画、ドラマの中の話。
資料云々より、描写が不自然だって思わないのかね?
そもそも、当時の兵士が携行していた「陸軍刑法」知らないの?
http://pddlib.v.wol.ne.jp/rules/etc/rikugun.txt
良民を虐殺ね~
部隊を動かしてね~
無駄の多い作戦立ててね~
少しは頭を使おうね。ドラマを鵜呑みにしないでさ。
あ!無理か!「半万年の歴史」なんて恥ずかしげもなく言ってるんだし!・韓国に事実と真実は存在しない。何故なら、韓国にとってそれらは必要ない。それどころか、逆に不必要である。
・誇れる歴史が無く、逆に恥ずかしい歴史だらけなので、民族の誇りの為に捏造するしかない。
・建国に際して、国是を反日に定める。何故なら、もし、日本が善なら何故独立する必要があるのか、という矛盾が生まれる。よって矛盾だらけである。
・日本人にとって真実は月のようなものであり、時には見えなかったり、必ずしも全体が現れるとは限らないが、日本人にとってそれが大切なものであり、常に求めるものである。しかし、韓国人にとって事実や真実は太陽の様であり、直視出来ない存在である。やっぱ韓国人て都合の悪い物からは目を逸らす奴ばっかりだね。
自らの言見て恥ずかしくならないのが不思議。本当に韓国人て無駄な勉強してるんだな。
そもそも農産物の生産や、経済発展、人口動向を見れば、どの様な生活を日本人として、先祖が送ってきたのか分かるだろう。
韓国が独立した後であっても同様だ。
アメリカと日本の援助で発展した事は、現在の産業で分かるだろうに。
むしろそれから外れた考え方の方が、理屈に合わないのにな。>>143
だから太陽をモチーフにした絵を見ると発光しちゃうのかw>>1
そりゃあ、李承晩だろ。
韓国人たちは、李承晩時代の虐殺を、日帝時代に行われたことにして、
李承晩時代の慰安婦問題を、日帝時代の慰安婦に置き換えてるんだから。>>135
君の書き込みによると、やっぱり李承晩の方が沢山韓国人を虐殺しているのだな。朝鮮人の寿命を伸ばして人口を増やした日帝の罪は重い
- 150
名無し2020/04/15(Wed) 15:14:34(1/1)
このレスは削除されています
>>47 反省しているから今の日本があるんだよ
そう。
そして、そういう態度になっている日本に付け込んだのが朝鮮人達。
本当に卑劣。>>153
ごめん、面倒で翻訳する気にならない。韓国語、わからない。
俺は、いま原油先物のトレード中。おれの仕事。原油先物ってわかんないよね?要するに株ね。そろそろ利益確定して寝ます。ごめんね。
日帝36年VS李承晩政権 どちらが多く朝鮮人を虐殺したの?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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