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 백제의 태자였던 부여융(扶餘隆)이 이끄는 170여 척의 수군이, 수륙협공으로 백제 부흥정부의 수도 주류성으로 진격했다. 이때 육지에서는 백제의 기병이 진을 치고 신라군과 맞섰고, 바다에서는 왜에서 온 함선들이 강변의 모래밭에 정박해 있었다. 왜병 선단은 전군을 셋으로 나누어 공격했지만 전술 및 간조의 시간차로 인해 당군에 비해 수적으로 우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네 번 모두 대패했다.(이때 백제·왜의 연합군은 당의 수군에 밀려 물러나 있다가 "우리가 먼저 치면 저들은 알아서 물러날 것"이라는 몹시 엉터리같은 작전을 택했다고 한다.) 백강에 집결해 있던 1천 척의 함선 가운데 4백 척이 불탔으며, 신·구《당서》와 《자치통감》, 그리고 이들 사료를 참조한 《삼국사기》는 이때의 싸움을 두고 "연기와 불꽃은 하늘을 붉게 물들였고, 바닷물마저 핏빛이 되었다"고 당시의 처절했던 전쟁을 묘사하고 있다.
이때 참가한 당의 수군의 주력은 한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수적으로 우세였던 왜의 수군이 당 신라에 이렇다 할 만한 손실을 입히지도 못한 채 궤멸되고 만 것은 선박 건조 기술이나 수군의 전략, 군사 훈련 차원에서 당시 왜가 동아시아에서 얼마나 후진적이었는지는 보여주는 사건으로 꼽힌다. 왜병의 장수였던 에치노 다쿠쓰는 하늘을 보며 맹서한 뒤 이를 갈며 수십 명을 죽이며 분전했지만 끝내 전사했고, 규슈의 호족이었던 치쿠시노기미 사쓰야마(筑紫君薩夜麻)도 당병에 붙들려 8년 동안이나 포로로 당에 억류되어 있다가 귀국을 허락받았다. 백제의 풍장왕은 몇 사람의 측근만 거느린 채 배 한 척에 의지해 고구려로 달아나고, 백강에서 대패한 왜병은 각지에 흩어져 있던 왜병과 백제 유민들 중 망명을 원하는 이들을 배에 싣고 당의 수군에 쫓기며 간신히 귀국했다. 육지에서도 나·당 연합군이 백제의 기병을 물리치고 주류성을 함락시킴으로써, 백제 부흥 세력은 궤멸된다.>>161비유적인 의미이고 그렇다고 해서 열등감에 빠져야 하는 이유는 없다.
앞으로 잘하면 되는것이다.유인궤가 백강 입구에서 부여풍·왜인과 4번 싸워 이기고 그 배 400척을 불태웠다
《구당서》 권 제199 열전 제149 동이
8월 무술일: 적의 장수가 주유[10]에 이르러 그 왕성을 에워쌌다. 당의 장수가 전선 170척을 거느리고 백촌강에 늘어섰다.
8월 무신일: 일본의 수군 중 처음 도착한 배들이 당의 수군과 만나 싸웠는데, 일본이 불리하여 물러났다. 당은 굳게 진을 치고 지켰다.
8월 기유일: 일본의 장수들이 백제왕(百濟王)과 더불어 날씨를 살피지 않고 서로 "우리들이 선두를 다투어 싸운다면 그들이 스스로 물러날 것이다."라 하였다. 다시 일본의 어지러운 대오(隊伍)와 중군(中軍)의 군졸들을 이끌고 나아가 굳게 진 치고 있는 당의 군대를 쳤다. 당(의 선박들)이 바로 좌우에서 배를 협공하여 에워싸고 싸우니 잠깐 사이에 (일본의) 관군이 계속 패하여, 물에 빠져 죽는 사람이 많고 배의 앞뒤를 돌릴 수 없었다. 에치노 타쿠츠(朴市 田來津)가 하늘을 우러러 보며 맹세하고 분하여 이를 갈며 성을 내고 수십 인을 죽이고 전사했다. 이 때 백제왕 풍장이 여러 사람과 배를 타고 고려로 도망했다.
9월 신해 초하루 정사: 백제의 주유성이 비로소 당에 항복했다. 이 때 나라 사람들(백제인들)이 서로 "주유가 항복하였으니, 일이 어찌할 수가 없게 되었다. 백제의 이름이 오늘에 끊어지게 되었다. 조상의 무덤이 있는 곳에 어떻게 다시 갈 수 있겠는가. 다만 대례성(弖禮城)에 가서 일본군의 장수들과 만나 서로 현 상황에서 필요한 것을 도모할 수밖에 없다."라고 침복기성(枕服岐城)에 있던 처자들에게 나라를 떠나려는 마음을 알렸다.
《일본서기》 권 제27 덴지 덴노(天智 天皇)>>164대표적으로 3.1운동이 있다.
우리민족은 독립하는것을 염원하였다.>>166가지고 오면 좋다.
>>171이런 자료도 있어.
김부식 (1145). 〈본기 권8 성덕왕〉. 《삼국사기》. 三十年 …日本國兵船三百艘 越海襲我東邊 王命將出兵 大破之 (30년(731) …일본국 병선 300척이 바다를 건너 우리의 동쪽 변경을 습격하였으므로 왕이 장수를 시켜 군사를 내어 이를 크게 깨뜨렸다>>173인정
>>1
次回の令和の役でも、単細胞生物クソチョンはチャンコロの盾になる覚悟だろう。>>7
じゃ日本の竹島を占領してるチョンコは殺していんだな?>>46
コウリャン(モロコシ、タカキビ、ソルガム)の表記間違いではないか
語を入れ替えると、大体つじつまが合う色々読むと、韓国人は本気で自力で独立したとか、日本と戦ったとか信じてるんだね。腹が立つというよりかわいそう。
まずは本当のことを知るといいよ。世界でも今どうみられてるとか。真実しらないとよくならないよ?おとしめるつもりはない。ただ事実を知るだけ、やりなさい。>>181
ご主人様ではない。
意を同委するパートナーで、優位関係がある存在です。
そこんとこ間違うと、中国に問答無用、永遠に頭下がらない朝鮮人と同等になっちゃう。>>136それは勘違い。常に属国。中国様に許しを得て王になる独立国なんか無いよ。独立して約70年なんだよ。1948年に独立。
>>179歴史を知らない、教えられていないのが丸わかりになる発言だよね。下朝鮮に不都合な歴史を教えない邑だ。ずっと中国やモンゴルの属国であった邑。
日本が中国に勝てるとは思えんし
朝鮮が日本の味方しようものなら後で中国に報復されちまうだろ。- 186
名無し2019/09/27(Fri) 06:11:38(1/1)
このレスは削除されています
>>1 ?ベストアンサー??
⇒ 宗主国へのゴマすり、
ご褒美を貰おうと画策☝>>26
ハングルで書かれた歴史はファンタジーだな。>>42
日本統治開始時は朝鮮の生産力は150万トン
朝鮮時代に米の生産性が半分以下に低下した無能が朝鮮>>151
抵抗なんて一切してねえっての
自己評価が高すぎなんだよ、オマエらw>>1
半万年の間、常に情け深い御心で慈しんで下さったご主人様。たとえ鎧袖一触に蹴散らされると
分かっていても徹底抗戦するのみ!それが忠犬としての義務であり誇りでもあるニダ!という
つもりで歯向かったのだが、結果は知っての通り。
鎧の袖が触れ合う前どころか、倭人来る!の噂を聞いただけで王自らが先陣を切って逃亡。
却って、ご主人様にムダな戦費を負担させ滅亡の原因となってしまいましたとさ。
そして350年後…北に侵攻された李承晩は歴史に倣って、全く同じ行動を繰り返したのであった。
歴史は二度繰り返す。最初は悲劇として、二度目は喜劇として カール・マルクス仕方ないよ。朝鮮の歴史を朝鮮人が編纂し始めたのは1980年代になってから。
それも都合のいい空想をつなぎ合わせて作ったんだから。
それを学校で学んで、カイカイに来て訳の分からない歴史を説く。
ソースは?と聞くと、これまた朝鮮人が妄想で作ったwikiとなる。
朝鮮人は入学試験の為にしか勉強しないから、ちゃんとした学術書は学ばない。
歴史の基礎がないから旭日旗一つで失禁する。>>1
朝鮮人は中国人の奴隷、下僕となることが遺伝子レベルで定められているからね>>1
日本兵が釜山につくまで、戦争になると思ってなかったんだよね
本当に世界史に類を見ない国家だよね朝鮮が明の同盟国だから
李舜臣将軍がいるから秀吉など相手にならないと思った
骨の髄まで中国の属国だからだね。
朝鮮人「逃げた王子を捕えましたニダ!」
日本軍「お、おう。」YouTubehttps://www.youtube.com/watch?v=MYUHQnyvXcE
忘れ去られたサムライたち 慶長遺欧使節
イタリアローマのクイリナーレ宮殿 1500年前に建てられ 長い間国王の住居として使用されていた格式のある建築物。その大広間のフレスコ画にサムライたちが描かれている。いったい何故…朝鮮は明と同盟国だったからです。
>>1
韓国だと日本が攻めてきたので戦うフィクションはあるのに支那が攻めてきて闘うフィクションはないみたいね秀吉の頭にはスペインの動向があった。天下太平の足場を明に築く意図があったらしい。
朝鮮は論外の論外だ。朝鮮の王はすぐに逃げた。王に威厳はなく、もぬけの殻になった王宮はたちまち朝鮮民衆に荒らされた。
>>1同盟関係だから、同盟とはそんなのものです。
どうして朝鮮は豊臣秀吉が中国を征服しに大陸に侵出したのを妨害したの?
204
ツイートLINEお気に入り
117
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