武将である康兆は、横暴を極めた金致陽と献哀王后を排したのち、国王穆宗までをも廃位させ、新たに顕宗を擁立し権力を握りました。
そこで質問です。
・元々武官であった康兆は、文官として政治をおこなっていたのでしょうか?
彼の最終的な官職名は、吏部尚書参知政事で、これは文官の官職ですよね。
・彼の持つ政権を武臣政権と捉えることはできますか?
・最後に、彼は政界トップの位を子に継がせて世襲していくつもりだったのでしょうか?
のちに門閥貴族の慶源李氏は世襲で政権を継承していきますよね。「康兆」でググったら、このスレッドが出てきた
随分と需要のない話題だ(泣笑)>>1
고려시대의 무신정권의 예를 들면, 겸직을 하는 경우가 흔했습니다.
정중부, 이의민, 최충헌의 경우,上將軍,門下侍中을 겸직했습니다.(武官은 從3品까지, 文官은 正1品까지 존재)
따라서 정권을 잡은 인물은, 가장 높은 벼슬을 겸임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武官 출신이 文官의 벼슬을 하고 있어도, 文臣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만약 康兆가 살아남아서, 정권을 계속 유지했다면, 武臣정권에 더 가까울 것 같지만,
거란과의 전투에서 사망했기 때문에, 판단이 어렵네요.
康兆의 쿠데타의 명분은 千秋太后와 金致陽의 세력을 축출하고, 고려왕조를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고려사의 기록을 보면, 逆心을 가진 사람으로 생각되지 않습니다.
兆坐乾德殿御榻下, 軍士呼萬歲. 兆驚起跪曰, “嗣君未至, 是何聲耶?”
兆가 건덕전(乾德殿)의 어탑(御榻) 아래에 앉으니 군사들이 만세를 외쳤다. 조는 놀라 일어나 꿇어앉으며, “다음 임금이 오시지도 않았는데 이 무슨 소리인가?”라고 말했다.
『高麗史』 卷127 「列傳」 40 ‘叛逆’ 1
그러나, 康兆가 거란과의 전투에서 죽지않고 계속 정권을 가지고 있었다면, 자신의 아들에게 권력을 세습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6
そうですね。
共に捕らえられた李鉉雲という人物が契丹の誘いに乗って臣下になったのを見て、裏切り者と言って怒ったようですし、忠誠心が強い人物だったと思います。
高麗は武臣関連の話が多いですよね。
有名な庚寅の乱以外にも、김훈·최질の乱がありましたね。
末期も武臣が優位に立ちますよね。
朝鮮は武臣の反乱が起こらなかった記憶があるので、武臣への待遇はそこまで悪くはなかったのですね?
高麗で政変を起こした後の康兆について
7
ツイートLINEお気に入り
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