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6월 2일
만주에 있던 항일 유격대원 60여명이 국내에 진입하여, 오후 4시 30분에 鍾城郡 豊谷面 東浦 경찰주재소 남쪽 6,000m 지점으로 내려왔다. 유격대원들은 일본군경과 총격전을 벌여서 경찰 1명에게 부상을 입혔고, 일본은 鍾城에서부터 경찰 14명과 헌병 3명을 보냈다.
6월 3일. 新民단원 약 30여명이 두만강 북안의 三屯子 마을에 머물렀다. 유격대원들은 두만강을 건너 穩城과 鍾城으로 나아갈 예정이다.
다음 날 오전 5시. 두만강 상류에서 일본군경은 주변을 수색하다 三屯子 마을에서 약 17~18명이 두만강을 건너오는 걸 발견하고 바로 사격을 개시했다. 유격대는 도하를 중지하고 인근에 은폐하여 대응사격을 하였다. 총격전은 금방 끝났다. 유격대는 三屯子 마을에서 큰 민가였던 김명오 노인의 집에 들어가 쉬기로 했다.
남양수비대(남양수비대 10명, 헌병 경찰 7명. 도합 17명)는 추격대를 조직했다. 新美 중위는 추격대를 인솔해서 오전 11시경에 두만강을 건너갔다.
남양수비대는 어느 농민으로부터 유격대의 거처를 알아낼 수 있었다. 남양수비대는 三屯子 서쪽 산기슭을 따라 전진하면서 김명오 노인의 집으로 포위하려 했다.
유격대는 추격대가 온 것을 눈치채고 얼른 집에서 빠져나와 서남쪽 馬牌村 방향으로 후퇴했다.
남양수비대는 포위하면서 사격을 개시했다. 김명오 노인의 아내와 장남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아들인 김종식의 아내와 손자도 중상을 입고 결국 사망했다.
당시 三屯子에서 일본군의 행태은 무척 황당했다. 그들은 사격을 병행한 정찰(暗探사격)을 실시했다.
오늘날 민간인들 사이에 숨어든 테러리스트를 제압하기 위해 출동한 군경이 저런 행동을 하였다면? 전세계적으로 지탄을 받았을 것이다. 민간인들의 안전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작전이었다. 결국 폭도로 오인받아 사살당한 민간인이 발생하지 않았는가?
鳳梧洞 전투의 전초전에서 드러난 일본군의 야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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