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 한국은 베트남인들의 조상과 인도인 그리고 남중국인들도 조상이 있어요! ^^ 일본인들은 단일민족이라지요? 여기와서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조상은 필리핀, 타이완인들의 조상과 같다는걸 봤습니다. 한국인은 하지만 남방계는 그 숫자가 적어요 아무래도 바다를 통하기 보다는 육지를 통해서 이동하기가 쉽거든요. 그래서 90%이상이 동북아시아의 인종입니다. ^^ 일본은 저희랑 다르게 동남아시아인이 많지요?
>>233
でも高句麗だけで唐に勝ってたじゃないですか。
新羅が、いらない工作をしたお陰で朝鮮半島を戦いの海に巻き込んだわけで。
未だに現代でも三国のわだかまりが残るのは、
そこに原因があるのではないですか?スレ主ですよ。久々覗いてみれば、韓国人たちが大多数議論に参加して嬉しい限り^^
三国史記は12cの書だし、ちょっと資料価値に劣るのを韓国人は認識したほうがいい。
当時のでない後世の書ほど、自分の都合で嘘を書かれるものだ。
確か今の韓国教科書には、「誇らしい世界大統領の登場。潘基文!」と書かれているらしいじゃないかw
(まだ修正されてないらしいしw)>>235三国史記は12cの書だし、ちょっと資料価値に劣るのを韓国人は認識したほうがいい。
当時のでない後世の書ほど、自分の都合で嘘を書かれるものだ。
사실 사실과 괴리되는 부분도 없지 않습니다만. 하지만 실재로 사실과 겹치는 부분이 굉장히 많습니다.
특히나 일본서기와 정확하게 교차검증되는 부분도 많고. (일본서기는 삼국사기이후 600년이 지나서 한반도에 소개됩니다. 즉, 김부식은 일본측 사료를 본적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구당서, 신당서를 비롯해서 중국의 자료와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한국의 고대기록을 근거로 작성된 문서들이고.
이 기록들을 근거로 발굴한 결과 적지 않은 유물들이 정말로 출토되었습니다.
삼국사기가 신뢰가 떨어질수는 있지만. 일본인들의 주장대로 완전히 신뢰할 수 없다. 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 입니다.[현경(顯慶) 5년(660년) 에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소정방(蘇定方)을 웅진도대총관(熊津道大總管)에 임명하여 수군(水軍)과 육군(陸軍) 10만을 거느려 [출군시켰다.] 이어서 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總管)에 임명하여 정방(定方)과 함께 백제(百濟)를 토평(討平)하게 하니, 그 나라의 왕 부여의자(扶餘義慈)를 사로 잡아다 궐하(闕下)에 바쳤다.이로부터 신라(新羅)가 점차로 고려(高麗)·백제(百濟)의 땅을 차지하게 되니, 그 땅은 더욱 넓어져 서쪽으로는 바다에까지 이르렀다. 용삭(龍朔) 원년(661년)에 춘추(春秋)가 졸(卒)하니, 조서를 내려 그의 아들 태부경(太府卿) 법민(法敏)으로 뒤를 잇게 하여,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상주국(上柱國) 낙랑군왕(樂浪郡王) 신라왕(新羅王)으로 삼았다. 3년(663)에 조서를 내려 그 나라를 계림주도독부(雞林州都督府)로 삼고, 법민(法敏)에게 계림주도독(雞林州都督)을 제수(除授)하였다. 법민(法敏)이 개요(開耀) 원년(681년)에 졸(卒)하니, 그의 아들 정명(政明)이 위(位)를 이어 받았다. -구당서 권199 동이열전 제 149(舊唐書 卷 199 東夷列傳 第 149)-]
[함형(咸亨) 5년(674) 에 [新羅에서] 고려(高麗)의 항거하는 무리들을 받아들여 백제(百濟) 땅을 점령하여 지키게 하였다. 고종(高宗)이 노하여 조서를 내려 [法敏의] 관작(官爵)을 삭탈하고, 그의 아우 우효위원외대장군(右驍衛員外大將軍) 임해군공(臨海郡公) 인문(仁問)을 신라왕(新羅王)으로 삼아 경사(京師)에서 본국으로 돌려 보냈다. 조서(詔書)를 내려 유인궤(劉仁軌)를 계림도대총관(鷄林道大總管)으로 삼고, 위위경(衛尉卿) 이필(李弼)과 우영군대장군(右領軍大將軍) 이근행(李謹行)을 부총관(副摠管)으로 삼아, 군사를 이끌고 가서 힘을 다하여 치라고 하였다. 상원(上元) 2년(675) 2월에 인궤(仁軌)가 칠중성(七重城)에서 그들을 쳐부수고, 말갈병(靺鞨兵)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서 남쪽 지역을 공략(攻略)하니, 목을 베고 또 사로잡은 포로가 매우 많았다. 조서(詔書)를 내려 이근행(李謹行)을 안동진무대사(安東鎭撫大使)로 삼아 매소성(買肖城)에 주둔시키니, 세 번 싸워서 노(虜)가 모두 패배하였다. 법민(法敏)이 사신(使臣)을 보내 입조(入朝)하여 사죄를 하는데, 공물(貢物)의 짐바리가 줄을 이었다. 인문(仁問) 또한 [新羅에서] 돌아와 왕위(王位)를 내놓으므로, 조서(詔書)를 내려 법민(法敏)의 관작(官爵)을 다시 회복시켜 주었다. 그러나 [新羅는] 백제(百濟)의 땅을 많이 차지하고, 드디어는 고려(高麗)의 남부까지 점령하였다. 상주(尙州)·양주(良州)·강주(康州)·웅주(熊州)·전주(全州)·무주(武州)·한주(漢州)·삭주(朔州)·명주(溟州)의 9주(州)를 설치하고, 주(州)에는 도독(都督)을 두어 10군(郡) 내지 20군(郡)을 통솔하게 하였다. 군(郡)에는 태수(太守)를, 현(縣)에는 소수(小守)를 두었다.
개요(開耀) 원년(681) 에 [法敏이] 죽고, 아들 정명(政明)이 왕위(王位)를 세습하였다. 사자(使者)를 보내어 조근(朝覲)하고, 『당예(唐禮)』및 기타의 문사(文辭)를 요구하므로, 무후(武后)는 『길흉예(吉凶禮)』와 함께 [이름난] 문장(文章) 50편을 내려 주었다. -신당서 권220 동이열전 제145(新唐書 卷220 東夷列傳 第145)-]
舊唐書 卷 199 東夷列傳 第 149 新唐書 卷220 東夷列傳 第145 모두 거짓말이라는 증명하세요. 알겠습니까? 참 보고 있으면 어이가 없습니다. 그렇게 부럽습니까? 한국이 고구려 백제 신라라는 선조를 가진것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242 舊唐書 卷 199 東夷列傳 第 149 新唐書 卷220 東夷列傳 第145 모두 거짓말이라는 증명하세요. 알겠습니까? 참 보고 있으면 어이가 없습니다. 그렇게 부럽습니까? 한국이 고구려 백제 신라라는 선조를 가진것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증명해라 쪽바리야. 내가 분명히 구절까지 다 말해줬다? 한자할줄 알지? 논리적인 반론 기대한다.
니가 정확하게 반론한다면 그야말로 역사를 다시 써야 할거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舊唐書 卷 199 東夷列傳 第 149 新唐書 卷220 東夷列傳 第145 이 구절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여간 쪽바리들 왜 이렇게 귀엽냐 머리는 텅텅 빈 것들이. 빽 빽 거리는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휴 참..
[얼마지나지 않아 고려의 남은 무리들이 배반했다. 계림도행군총관으로 삼았다. 상주로 유배되었다. 사면되었다. -신당서 권111 설인귀전(新唐書 券111 薛仁貴傳)-]
[고구려 유민들이 일어나자 설인귀로 하여금 계림도총관으로삼아 경락토록 하였다. 상원(上元)연간에 상주로 유배되었다. 사면을 받고 귀환하였다. -구당서 권83 설인귀전(舊唐書 券83 薛仁貴傳)-]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고구려인들이 신라에 가담하는 기록이다. 이것도 반박해라 알겠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紀元前770年の春秋戦国時代の戦国七雄から遊牧民同盟の戦争など周辺との取引は複雑だな。
共通の敵がいれば仲間。敵の敵は味方。仲間は使い捨て消耗品で裏切りの連続。支配領域から排除。敵でも商売は別、武器や重要な資源は売らないが自由に取引成立。
遊牧系もトルコ系や他の集団と争い統合したり引入れたり追放したり、中原に注意しながら秦や漢と覇権争い交わっていく。朝鮮半島も影響が大きく大変だが、当事者達は飽きることもなく楽しかったのかもね。>>240
>>238
거짓말이 아닙니다. 買肖城의 전투는 그야말로 최후의 결전입니다. 이전투에는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물론 고구려 +백제 + 신라가 하나가 되어서 싸운 사실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으로는 감동적이고 남자라면 가슴을 뛰게 만드는 장면 입니다. 그도 그럴것이 무려 700년간이나 서로에게 칼을 휘두르던 숙명의 라이벌들이 하나가 되어서 최후의 당시 세계최강인 당나라와 싸운 전투 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결정적인 전투 입니다.
이 이전의 전초전으로 기벌포의 해전에서 신라의 해군이 압승을 거둡니다. (이 순간에는 아마 적지 않은 倭계 백제인수군과 백제의 제독들도 참전했습니다.) 이 것으로 당나라의 보급이 그야말로 불가능해 집니다. 마지막 결전이 남은 것이 買肖城의 전투입니다.
이 전투는 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이 약하지만 자존심이 강하다고 얕보지만 실은 한국인들의 인생자체가 이것 입니다. 중국이라고 불리는 정확하게 말하면 중화의 질서라고 불리는 가치관과 이렇게 피를 흘리면서 지키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이곳 이었습니다.
사대에 대해서 말하자면 당시에 평등한 국가관이 존재하지 않던 시절입니다. 유럽도 1684년의 전쟁 이전에는 존재 하지 않던 관념입니다. 신성로마제국 이외에는 황제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공, 공국이 존재했던 것 입니다.
비슷하게. 한국도 신라가 마치 당나라의 신하가 된 것으로 착각하는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당나라가 오히려 동방경영에 신라에게 상당히 의존합니다. 그 증거로 대동강 이북의 영토를 아무런 조건도 없이 신라에게 반환합니다.
결국 인류는 피의 대가로서 스스로를 증명하지 않으면 앞으로 갈 수 없는 것 입니다.
백제스레드 이지만. 이 전투에 참전한 백제인들이 적지 않기 때문에 저도 코멘트 적습니다.朝鮮半島なんて中国大陸から見たら僻地
基本的に興味がない>>129 당나라 황제의 아들과 당나라에 포로가된 백제의 공주와 결혼도 하고 백제왕가는 당나라에서도 우대 받는다. 백제출신 장군들이 당나라에서도 활약하게 된다.
우리가 아는 백제는 660년, 멸망의 길로 들어서 사라졌다. 유민들은 당나라로 끌려가 노예로 비참한 삶을 살았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우연히 발견된 묘지석에 적혀있던 831자의 기록과 함께 되살아난 부여태비는 우리의 상식을 뒤엎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백제의 마지막 공주였던 부여태비는 당나라를 세운 황제의 옆에 함께 묻혀 있었던 것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방송 최초로 부여태비의 생애를 추적해본다.
그녀의 묘지석은 부여씨가 괵지역의 왕비라고 설명하고 있다. 괵지역의 왕은 당고조의 증손 이옹. 그녀는 이옹과 결혼함으로써 당 황실의 일원이 되었다. 부여태비는 후에 그녀의 아들이 왕에 올라 왕비에서 태비로 격상된 것이다. 특히 당나라로 온 백제 유민들은 당나라에서 공을 세우며 활약했고, 백제 유민을 상징하는 부여태비의 지위도 함께 격상됐다.>>257 唐に行った百済人の話は興味深いですね。
>>257 中国のどの文献を読めばいいのでしょう?
>>1
そうなんですか?>>1
民族が違うのでは?むしろ百済って首都の位置から忠清道(建国初期は京畿道)の勢力であって全羅道は関係が薄いのでは?
>>71
それは梁職貢図というんだが、そこには新羅は倭の属国と書いてあるんだなw
あと元のものは故宮博物館にあるが、それにはどこにも高句麗の使者なんぞ描かれていないぞw
韓国でのみ見かける想像図なんだが、何故なのか説明してほしいw>>263
百済と韓国は、歴史的にも民族的にも、全く関係がない
百済は敗戦国だが、おまエラは戦犯の子孫なのか?そもそも、職貢図はいかなる姿をしているかわからないから想像で書いたと言ってるものなんだが、そういうものが日本が隠したいととか勝手に吹き上がってる韓国のネットについては、いつも楽しく拝見させてもらっているw
歴史を直視するって難しいなwちなみに、当時の日本の貴族や使者がそんな格好してるわけがないのは埴輪を見ればあきらかって言ってるのは中国の学者ねw
韓国でも、其實一也或属韓或属倭國王不能自通使聘って記述が、任那日本府と一致しちゃったんであら大変って話になっていたと思ったのだがw
ところで現代の韓国には、「黒歯」とか「鬼室」とか百済の苗字を持っている子孫はいるのか?
ソウル大の新入生、39%は文章表現力不足
https://web.archive.org/web/20170408223538/http://www.chosunonline.com/site/data/html_dir/2017/04/08/2017040800589.html
>「また基礎教育院は全体の25%にあたる63人については「ソウル大学で文章表現の講義を受講するのが難しいほどレベルが低い」と評価した」のケースの事例は、日韓翻訳掲示板において「根本的に会話そのものが成り立たない」状態であったケースです。
>この手のタイプは、ひたすら相手を侮辱したり罵倒したり(韓国的価値観における優越性の証明)を繰り返すばかりで「意思疎通が不可能」であったケースで、そもそもそも相手が何を言おうとしているのかを理解する以前にその意思(習慣)そのものが無いためこのような態度を取っていたのでしょう。
>そして韓国最高学府であるソウル大でこの状態ということは、韓国社会全体では恐らくもっと数字が跳ね上がるであろうという事です。糞食い起源と試し腹起源の違い…
そんなもんじゃね?買肖城의 전투는 20만의 만주의 예비병력의 2전선이 붕괴되는 대 전투 입니다.
이 전투에서 전투한것이 고구려+백제+신라 연합군 vs 당나라 입니다.
즉, 700년이 넘게 서로 싸워왔지만. 최후의 중화라는 최강의 적 앞에서 결국은 삼한은 하나가 되어 싸운 것 입니다.
일본위키에서도 買肖城의 전투 항목이 있었지만 삭제되었습니다. 유감입니다.>>272舊唐書 卷 199 東夷列傳 第 149 新唐書 卷220 東夷列傳 第145 모두 당시 세계 최강의 당나를 격파한 것을 당나라가 인정하고 있는 기록 입니다.
이 신라가 여러분이 알고 있는 金國과 청나라의 시조의 선조 입니다.
모두 시작은 미비했고. 그리고 당나라는 누구보다 신라를 벌레보다 못한 존재로 봤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방심은 그들의 20만의 병력이 전멸하는 결과를 불러왔습니다.
舊唐書 卷 199 東夷列傳 第 149 新唐書 卷220 東夷列傳 第145 에서 당나라가 신라에게 패배한 기록이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투의 경과가 궁금하다면, 한국측의 기록을 올려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어차피 일본은 한국의 기록은 무시할 것 입니다. 일본이 중국의 후손이기 때문 입니다.
후손이 선조의 패배를 보고 싶지 않은 것은 당연합니다.>舊唐書 卷 199 東夷列傳 第 149 新唐書 卷220 東夷列傳 第145 모두 당시 세계 최강의 당나를 격파한 것을 당나라가 인정하고 있는 기록 입니다.
上元二年二月 仁軌破其众於七重城 以靺鞨兵浮海略南境 斬獲甚众 詔李謹行爲安東鎮撫大使 屯買肖城 三戰 虜皆北 法敏遣使入朝謝罪 貢篚相望
(675年2月、 劉仁軌、新羅の民を七重城で破る。靺鞨へ海路から新羅の南境を攻略させ、大勢の敵兵を斬り捕らえた。李謹行を安東鎮撫大使として新羅の買肖城へ逗留させ、これを経略するよう詔が下った。前後三戦して、新羅はいずれも敗北。新羅は遣使入朝して伏罪し、方物を献ずる。)
はあ、これが唐を破った記録ですか。
唐が吐蕃に攻められて余裕がなくなっただけでしょ。
上將發兵討新羅,侍中張文瓘臥疾在家,自輿入見,諫曰「今吐蕃爲寇,方發兵西討;新羅雖云不順,未嘗犯邊,若又東征,臣恐公私不勝其弊。」上乃止。(資治通鑑 第二百二唐紀十八 高宗天皇大聖大弘孝皇帝中之下)
(帝が新羅討伐軍を起こそうとした。この時、侍中の張文灌が病気になって自宅に伏せったので、帝が輿に乗って見舞いに行くと、文灌は諫めた。
「今、吐蕃が攻撃してきたため、一方では兵を発して西を討っています。新羅は従順ではないとはいえ、まだ国境を侵したわけではありません。もし東征も行いますと、公私共にその負担に耐えられないのではないかと懼れます。」
そこで帝は、東征を中止した。 )
例えば、吐蕃に大敗した記録ならはっきり書いてあるから、別に新羅に負けたのを隠したとか言う屁理屈は通らんわな。
「(儀鳳三年秋七月戊子)薛仁貴、郭待封至大非川,為吐蕃大將論欽陵所襲,大敗,仁貴等並坐除名。」
「(上元三年九月)丙寅,洮河道行軍大總管中書令李敬玄、左衛大將軍劉審禮等與吐蕃戰于青海之上,王師敗績,審禮被俘。」舊唐書 本紀第五 高宗 下
「伎伐浦大捷」とか薛仁貴率いる唐軍に大勝したとかいうけど、薛仁貴伝に「仁貴遂退軍屯於大非川。吐蕃又益眾四十餘萬來拒戰,官軍大敗」と大非川での大敗ははっきり書いてるのに伎伐浦での戦いなんぞ書いてない。무식한 소리네. 백제의 중심은 충청도다. 위례성시절 제외하면 수도가 충청에 있었는데.
韓国人はモンゴル人と同じ遺伝子なんだろ
まったく血の繋がってない百済人をご先祖のように語って図々しい>>1これは知りたいです
だよな
百済と全羅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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