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麗までは偉大だったが朝鮮になって衰退した根拠を教えて下さ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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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名無し2021/04/04(Sun) 14:33:10ID:M4Nzg5MjQ(1/10)NG報告

      高麗時代に100年間も元に併合され、今度は元を滅ぼした明の属国となった。
      どの辺が優れていたのですか?
      特定の文化や技術が衰退することはあっても、国全体の文化レベルが落ちる事なんてあるのでしょうか?
      北朝鮮ですら国全体で言えば併合時代よりかは発展してますよね。
      「高麗時代までは先進国だったが李氏朝鮮時代に衰退した」と言うのは間違いではないでしょうか。

    • 196spr2021/04/05(Mon) 21:08:54ID:M0NTk2NTU(3/3)NG報告

      >>193
      昔の南朝鮮では障害者も出世出来たんだねw
      病身舞を人前で踊る人とか?

    • 197[中韓倭 서열] 중국=皇,대한민국=王,왜국=侯2021/04/05(Mon) 21:13:54ID:I3OTQwNjA(22/31)NG報告

      조선은 노비의 비율이 주변국들에 비해 과도하게 높았으며, 그 人身 예속적 성격 때문에, 노비는 노예와 다름없었으며, 따라서 조선은 노예제 국가였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일부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James Palais가 그렇게 주장하며, 이에 대해 李榮薰이 반박한 적이 있다.

      그러나 James Palais와 李榮薰가 주장하는 '노예제 사회'는, 主流 학계에서 규정한 '노예제 사회'의 개념과는 일치하지 않는 주관적인 개념적 정의에 불과하다. 실제 학계에서 사전적 의미로서 규정하는 '노예제 사회'란, ‘노예 제도가 경제 및 노동 조직의 기반인 사회’로 정의되는데, 조선은 노비가 경제 및 노동 조직의 기반인 사회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Palais의 주장대로, 노비 또는 노예가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30% 이상이면 노예제 사회로 규정한다는 법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李榮薰은 최근까지도 Palais의 이러한 주관적인 노예제 사회설 규정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李榮薰도 자신만의 노예제 사회를 주관적으로 정의하였고, ‘광의의 노예제 사회’라는 개념을 새롭게 만든 후에, 거기에 조선이 포함될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을 하였다.

      '노예 비율이 30% 이상인 사회는 노예제 사회'라는 Palais의 주장이 학계의 절대적인 기준은 전혀 아니라는 점에서, 결국 그만의 자의적인 노예제 사회의 기준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실제로 李榮薰은, "필자는 그런 단조로운 구조의 農業社會가 노예제 사회로 되기 위해서는, 노예 인구의 비중이 최소한 50% 이상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 198[中韓倭 서열] 중국=皇,대한민국=王,왜국=侯2021/04/05(Mon) 21:24:27ID:I3OTQwNjA(23/31)NG報告

      노예제 권위자인 Orlando Patterson의 연구에 대해서도, 그런 조건들을 하나도 만족시키지 않는 7~19세기의 한국도 노예제 사회로 분류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그렇지만 Patterson의 list에 어색하게 끼어 있는 7-19세기 한국은 이런 Finley의 조건들을 하나도 충족하고 있지 않다......그렇지만 11~19세기 한국 사회는 그러한 국제적 환경과 전혀 무관한 곳에 위치하였다."라고, Finley의 주장과 본인의 사견으로 반박하고 있다.
      이는 학계 내에서, 노예제 사회로 규정하는 정확한 비율이란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李榮薰은 예속民을 노예로 판정하는 기준으로서 법제적 기준, 경제적 기준, 문화적 기준을 제시했다. 물론 3 기준 전부에서 Palais의 학설에 대해 매우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대표적으로,

      "Palais가 누차 강조하였듯이, 이 법제적 기준은 노예의 판정 기준으로서, 다른 것보다 우선하는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이 기준에 따르면, 15~16세기 조선시대의 노비들은 노예였다. 노비들은 주인의 채찍 아래에서, 법적으로서 無권리의 상태에 놓였다. 그들은 財物로서 매매되고, 상속되었으며, 짐승처럼 맞아죽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법제와 현실 사이에는 괴리가 있기 마련이다. 한국은 중화 문명권의 일부로서, 중국의 奴婢法을 수용하여 노비들을 지배하였다. 이 같은 법적 기원의 外來性도, 법제와 현실 사이의 괴리를 증폭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예컨대 노비가 動産인 것은 사실이지만, 動産으로서 매매되는 경우는 일상적이지 않았다. 1690년의 大丘府 戶籍에 의하면, 총 5,992口의 노비들 중에서 과거 3년간 매매 대상이 된 노비는 14口에 불과하였다."

      라며, Palais가 제시한 법제적 기준 자체를 현실과 괴리가 있다고 정면으로 반박한 부분,

    • 199[中韓倭 서열] 중국=皇,대한민국=王,왜국=侯2021/04/05(Mon) 21:31:22ID:I3OTQwNjA(24/31)NG報告

      또는 Palais가 본인의 주장에 대하여 '한반도의 지리적 여건 상 노비 다수가 小農이라고 해서 노예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곤란하다'라고 반박한 점에 대해서,
      "小農 경영이 지니는 노예제와의 근본적인 모순관계를 간과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본성이 이기적인 인간 입장에서, 타인을 위해 강요된 억압적 노동과, 자신과 가족을 위한 자발적 노동은, 그 生産性이나 創意性이 크게 다를 수밖에 없다.......그런 관점에서 예속 신분의 小農이 자립적 경제 단위로 성장하여, 결국 예속 신분 자체를 부정하게 되는 小農경영 자체의 動學에 銳意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라고 Palais의 주장이 갖는 근본적인 모순점을 지적한 부분 등에서, 李榮薰이 Palais의 주장에 근본적으로 동의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는, 대한민국 내에서는 북한의 金錫亨의 학설이 통설적 지위를 누렸던 반면에, 미국의 한국學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Palais의 학설이 지지를 받았으며, 상술한 노예제 연구자인 Patterson 역시 "7~18세기의 한국사에 대해, 세계사에서 가장 발달된 대규모 노예제 사회로 평가"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 200[中韓倭 서열] 중국=皇,대한민국=王,왜국=侯2021/04/05(Mon) 21:34:31ID:I3OTQwNjA(25/31)NG報告

      미국의 한국 학계 내에서 지지를 얻고, 노예제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는 아예 Palais보다 훨씬 장기간을 노예제 사회로 분류했으니, Palais 혼자만의 사견으로 볼 수는 없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이 Palais의 주장의 주요 근거인 "노예의 비율이 30% 이상이면, 노예제 사회이다"라는 比率論的 근거에 대해서도, 다같이 동의한 것이라고는 보기는 무리다.

      왜냐하면, Palais가 주장한 "高麗와 조선은 노예제 사회였다"라는 주장과, 그 比率論的 근거에 대한 동의는 당연히 별개이며, 이는 Patterson과 Palais의 주장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확인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Palais는 12~18세기 중반까지의 한반도 사회를 노예제 사회로 분류했지만, Patterson은 7~18세기의 한반도 사회를 노예제 사회로 분류하는 등, 상호간의 동일한 比率論的 근거는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30% 또는 50% 이상이면, 그건 노예제 사회다'라는 식의 주장은, 어디까지나 李榮薰과 Palais의 주관적인 기준 및 주장일 뿐, 학계에서 공인받은 정설은 전혀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노예의 비율이 30% 또는 50% 이상이면, 노예제 사회'라고 규정하는 학계의 공인된 정설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며, 이러한 주관적인 소수의 대전제 자체에, 학계가 확고한 정설로 동의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나마 가장 광범위하게 지지받는 노예제 사회 이론은, 그 사회가 노예들의 노동력에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정도도가, 학계에서 그 동안 폭넓게 지지받은 '노예제 사회-非노예제 사회'를 구별하는 가장 보편적인 기준이다.

    • 201名無し2021/04/05(Mon) 21:37:52ID:QwMDk2NTA(2/2)NG報告

      長いし意味わかんねーから、とりあえず猫でも貼っとくか。

    • 202名無し2021/04/05(Mon) 21:40:22ID:Q1MDEwNDU(1/1)NG報告

      他の国と整合性の無い歴史の主張をするのなら
      「地球が誕生する前から朝鮮半島と朝鮮人は存在した」
      これくらいの主張をすれば良いと思います

    • 203[中韓倭 서열] 중국=皇,대한민국=王,왜국=侯2021/04/05(Mon) 21:43:29ID:I3OTQwNjA(26/31)NG報告

      "그럼 Palais와 李榮薰의 比率論的 주장은 학계의 공인된 기준인가, 공인되지 못한 기준에 머물고 있는가?"라고 질문한다면, 역시 공인된 기준은 어디까지나 아니라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는 부분이다.

      아직까지 그들의 주장은 학계에서 공인된 기준으로는 통용되지 않으며, "노예의 노동이 경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가"라는 경제적 측면에서의 판단이, 좀더 오래 전부터 광범위하게 노예제 사회의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주로 활용된 것이 엄연한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예속民의 성격/비율과 무관하게, 오직 "노예의 노동이 경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가"에 대한 여부가 노예제 사회의 여부를 판단하는 학계의 공인된 기준이라고 보기는 곤란하다는 평가는, 逆으로 그들의 평가 기준도 학계의 공인된 기준은 아니라는 뜻이 된다. 실제로 그들을 제외하고는, 어느 한 사회가 노예제 사회였는지를 판단할 때, 노예 인구의 비율로만 분류하는 학자들은, 사실상 학계 내에서는 거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比率論的 주장의 가장 큰 문제점은, 比率論的 주장을 하는 학자들 사이에도 일치된 기준선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Palais와 李榮薰의 기준선은 무려 20%의 차이가 있으며, 당연히 이 경우에 Palais의 기준에 따라 노예제 사회라고 판단할 경우, 李榮薰의 기준에서는 노예제 사회가 아니라는 상반된 결론이 도출된다.

      결국 比率論的 기준의 가장 큰 문제점은 노예제 사회의 여부를 판단할 때, "그럼 그 비율은 몇 %이상을 기준선으로 정해지며, 그러한 기준선을 설정한 근거는 무엇이며, 기준선의 설정 근거에 대한 타당성은 무엇인가?"라는 기본적인 의문에 대하여, Palais와 李榮薰 사이에 확정된 기준선, 합의된 기준 근거조차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Palais의 比率論的 기준은 여전히 Palais만의 주관적인 기준이고, 李榮薰의 比率論的 기준은 여전히 李榮薰만의 주관적인 기준이라는 점에서, 양측 모두 학계의 공인된 기준으로 평가받기는 매우 곤란하다.

    • 204名無し2021/04/05(Mon) 21:44:04ID:kyMTY1NjA(2/3)NG報告

      新安塩田奴隷労働事件
      https://www.recordchina.co.jp/b140803-s0-c30-d0065.html

      人権とは、何ぞや?

    • 205[中韓倭 서열] 중국=皇,대한민국=王,왜국=侯2021/04/05(Mon) 21:50:37ID:I3OTQwNjA(27/31)NG報告

      또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러한" 30% 또는 50%"라는 比率論的 근거를 가지고, 노예제 사회의 여부를 주장할 경우, 이런 기준을 100% 적용한다고 해도, 조선시대 전체가 노예제 사회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점이다.

      실제로 李榮薰도 조선시대 전체를 노예제 사회라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조선의 노비의 비울이 15세기 초반에는 10% 미만이었는데 그 이후에 증가하였고, 18세기 중반부터는 10% 미만으로 다시 감소했으며, 조선시대에 노비의 비율이 30~40%였던 기간은, 15세기 중반~17세기에 한정되며, 18세기 조선시대 후기에는 노비제도가 사실상 해체되었다는 견해도 분명히 밝혔기 때문이다.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002500100009
      https://news.joins.com/article/22555260

      참고로 Palais 또한 한국學 중앙 연구원이 발행한, 《정신 문화 연구》에 실린 이 학술지의 인터뷰에서, 분명히 “전체 인구에서 노비의 비중이 30퍼센트를 훨씬 초과한 18세기 중반까지는, 한국이 노예제 사회였던 것으로 봅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을 볼 때, Palais도 18세기 중반 이후(조선시대 후기)는 노예제 사회가 아니라는 것에 동의하였음을 알 수 있다.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2059959&cid=62041&categoryId=62041

      애초에 노비들의 성격을 노예로만 규정해서, 그 비율을 근거로서 노예제 사회였는지의 여부를 논하는 것 자체에 의미가 없기도 하다. 왜냐하면, 노비들의 신분적 성격을 노예로 규정할 지 농노로 규정할 지에 대해서는, 학계 내에서 확정된 정설이나 입장은 아직까지도 전혀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는 당연히 노비의 비율을 근거로서 노예제 사회였는지의 여부를 주장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는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 206[中韓倭 서열] 중국=皇,대한민국=王,왜국=侯2021/04/05(Mon) 22:01:25ID:I3OTQwNjA(28/31)NG報告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조선의 여성들은 전부 男女七歲不同席, 七去之惡, 出嫁外人 등 성리학에 따른 예법•제약에 시달렸다는 것인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유교를 따르던 조선이라서, 당연히 민간에서도 성리학으로 인한 법적인 성차별은 존재했었지만, 여성에 대한 제약들은 대부분 양반 등 고위층에서 주로 성행하던 것이었다.

      시대적 한계가 있기는 하겠지만, 조선시대 여성의 인권은 생각보다 낮지는 않았다. 평민 여성의 경우에는 성리학의 영향이 적었던 탓에, 연애•외출•이혼•노출(!)•성행위 등 다양한 부분에서 자유로웠다. 반대로 양반 여성의 경우에는 그것들에 대한 강력한 제재가 있었지만, 역설적으로 여성에 대한 존중과 예의가 있었다. 일단 그들도 배웠다고 자부하는 지식인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七去之惡, 出嫁外人이라는 禮學的 제도들은 임진왜란 이후의 것이며, 겉모습과는 달리 가혹한 것들도 아니었다.

      그마저도 老論 출신의 양반 가문들은 따르지 않았고, 일반 백성들은 이러한 제약에 해당되지 않았다. 다만 법적인 부분이 아닌 사회적, 생활 사적인 측면에서 여성의 가시적인 인권이 하락한 것은 사실이다.

    • 207[中韓倭 서열] 중국=皇,대한민국=王,왜국=侯2021/04/05(Mon) 22:07:18ID:I3OTQwNjA(29/31)NG報告

      의외로 조선은 단일민족 사회가 전혀 아니었다. 조선 사회에도 女眞人,倭人 漢人 비롯하여 많지는 않았지만 소수민족이 존재했다. 특히 명나라가 망하면서 청나라의 지배를 피해 많은 중국인들이 자주국 조선으로 넘어온 경우도 많았다. 李之蘭, 金忠善, 呂汝文, 千萬里, Jan Janse de Weltevree 등이 대표적인 외국계 조선인들.

      조선은 이러한 이민자들을 向化人이라고 불렀으며, 통상적으로 일반 양민과 다르지 않게 대우했다. 특히 명나라 말기에 조선으로 들어온 명나라의 유민들을 皇朝人이라고 부르며 우대하는 편이었으며, 降倭로서 귀화한 倭人들도 그 전투력을 인정받아서 중용되었다. 물론 북방 민족계 이민자 출신이었던 白丁 때문에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동시기 유대인이나 Gypsy 등에 대한 유럽의 차별과 비교하면, 없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며, 차별 자체에는 白丁 본인들의 문제도 없지는 않았다.

    • 208名無し2021/04/05(Mon) 22:23:16ID:A5MTkzNjA(1/1)NG報告

      高麗のころは 日本と同じで貨幣経済ができかかった が 李朝が 金勘定
      など卑しい として 物々交換にもどしてしまった 結果 まともな税制もなく 両班は遊び惚け 表に
      出て 白丁のものをとる 白丁は必要最低限の 物しか作らない これでは経済が発展しない この歴史を
      バ韓は教えていない
       
       

    • 209[中韓倭 서열] 중국=皇,대한민국=王,왜국=侯2021/04/05(Mon) 22:25:51ID:I3OTQwNjA(30/31)NG報告

      조선의 군사력 운용에는 분명히 문제점이 많았지만, 타당한 수준 이상으로 조선군이 폄하되는 경향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는데, 우선 조선군은 역사적인 戰果가 처참하다. 前代 왕조들은 중화제국들 또는 북방 유목 민족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戰績이 있는 반면, 조선은 외적을 상대로 자력으로 승리한 적이 거의 없다. 또한, 조선은 기본적으로 문약한 나라였다는 이미지가 강한 것 같다. 조선은 국가적으로 武를 천시하고 비생산적인 글공부에만 전념했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다.

      다만 조선의 수많은 굴욕은, 조선의 내부적 문제만이 아니라, 외교적-정치적 상황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했다. 조선은 과거와 달리, 안정된 강대국(인정하기 싫지만, 왜국 포함)들에 둘러싸인 형세였다. 그렇기 때문에 前代 왕조인 고구려 또는 高麗에 비하면 외교적 운신의 폭이 매우 좁았고, 정복 전쟁을 벌이기도 여의치 않았다.

      또한, 세간의 인식과 달리 조선은 국방 문제를 등한시하지 않았다. 예컨대, 임진왜란 당시에 조선 정부가 방관했다는 것이 흔한 인식이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실제로 조선 정부는 정규군 전반을 지휘하며, 필사적으로 왜국에 맞서 싸웠다. 그리고 군대의 규모는 축소되었지만, 중앙 상비군의 질적인 향상이 이루어졌고, 飛擊震天雷/火車/鳥銃을 위시한 화약무기도 대거 도입되었다. 이는 확실히 前代 왕조에 비해 조선이 이룬 군사적 발전이었다.

      물론 조선의 군사 체계에 심각한 결함이 많았다는 것도 사실이다. 분명히 조선은 前代 왕조들보다 기술도 발전하고 인구와 생산력도 증가하였다. 그렇다면 군사력도 前代 왕조들을 능가해야 정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은 국력을 군사력으로 치환하는 시스템이 너무 후진적이었다. 오히려 前代 왕조들에 비해서도 퇴보한 수준이었다. 즉, 하드웨어는 제법 괜찮았지만, 정작 그것을 운용하는 소프트웨어가 극히 부실했던 나라였다.

    • 210[中韓倭 서열] 중국=皇,대한민국=王,왜국=侯2021/04/05(Mon) 22:34:13ID:I3OTQwNjA(31/31)NG報告

      조선 건국 초기, 아니 넓게 봐도 조선시대 초기에서 중기로 넘어갈 무렵의 睿宗 집권기까지는 조선의 군사력이 우수한 편이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정부가 군사력 강화에 적극적인 의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太祖 李成桂 휘하의 고급 武將들과 수만명의 정예병들이 남아있어서 조선을 받쳐주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기록에는 太祖의 통치 기간에만 조선의 잠재적인 병력이 20만명 이상이었던 것으로 나온다.

      內實도 우수하여, 방패와 칼로 무장한 보병인 彭排手와 重騎兵 戰力까지 견실하게 편제되어 있었고, 정예 弓兵들만 봐도 수만명이었다고 한다. 조선에서는 李芳遠을 필두로 한 신하들이 大軍을 일으켜서 랴오둥을 공격하는 것을 진지하게 추진하려고 했다. 명나라에서 조선의 이러한 행동을 경계했다는 기록도 있고, 여진족과 왜구를 대상으로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이렇듯 조선은 초기의 군사력이 우수했지만, 정작 그 잠재력을 증명할 실적을 보여주지는 못한 것이 아쉽다.
      조선시대 초기부터 국제 정세가 안정되어 있어서, 외적의 침공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군사력이 건실했던 시기에 외적의 대규모 침공이 있었다면, 의외로 조선도 고려-契丹 전쟁처럼 통쾌한 승전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초기~중기에는 조선과 명나라 모두 안정기였고, 북방의 이민족들도 잠잠해서 전란이 없었다. 그래서 정작 전성기의 조선군이 보인 戰果는 여진족 및 왜구들에 대한 소규모 토벌 정도였다. 그래도 실적이 없지는 않아서, 세종대왕 치세에는 한국사의 마지막 北伐이었던 四郡六鎭까지의 확장을 이룩했다. 이는 고려시대에도 실패했던 東北九城으로의 확장에 마침내 성공하고, 현대 한민족의 국경선을 확립한 중요한 성과이다.

      또한 文宗 치세에는 火車가 정식으로 軍制에 편입되었으며, 世祖는 본인부터 상당한 군사적 재능이 있었기 때문에 申淑舟, 具致寬 등을 통해 북방을 안정시키는 등 노력을 傾注했다. 李施愛의 반란을 진압하고, 李滿住를 잡아 죽여서 建洲女眞을 아예 초토화시킨 것도 世祖의 통치 기간에 있었던 일이다.

    • 211名無し2021/04/05(Mon) 22:39:48ID:kyMTY1NjA(3/3)NG報告

      >>210
      長々と駄文を書きたいのなら、自分のブログにでも書いてろ。

    • 212名無し2021/04/05(Mon) 22:55:46ID:YxNDg5MzA(6/7)NG報告

      >>178 国とう言葉の使い方や概念や実際に意味する所は時代や使う立場によって変わるからねえ。

      中国自身(時代によりその主体となる国も民族も変わってしまうが)が朝鮮を自国の一部という認識を持っていたとしても、日本から見れば国であり、秀吉の認識においては日本の属国だった。だからこそ、明の都への道を案内せよ、と命令をしたわけで、お願いしたわけじゃない。それに従わなかったから、謀反と見なして兵を差し向けたわけで。

      あくまでもそれは秀吉から見た場合で、貿易を実際に行っている対馬の宗氏から見れば、朝鮮は中国の属国で、中国には逆らえない、ということは知っていた。と同時に日本の属国である、という秀吉の認識を追従させるための形式的な手続きに追われた。

      実質的には、朝鮮は中国の支配王朝の一部、対外的(対日本において)には朝鮮は元・明・清の属国、日本から見れば、ある時は中華王朝の属国、ある時は日本の属国、ある時は中華王朝と日本両方の属国。朝鮮との貿易に中華王朝からの許可が必要という認識は無かったから、日本側としては、中華王朝の一部としての認識は無かったんじゃないか。短い期間にわたる例外はあったかもしれないが。

    • 213名無し2021/04/05(Mon) 23:13:20ID:YxNDg5MzA(7/7)NG報告

      >>80
       作れると言ったって、他国の力を借りないと今でもできないでしょう。資金的にできない、ということは国力が無いということですよ。
       それを作った時代の技術が残っているかと言えば、そんなものはどこにも継承されてないわけです。朝鮮半島でも、過去の古い建造物を復旧しようとしても、出来ないじゃないですか。技術的に出来ない。現在の建材を使って、重機も使ってなら出来たとしても、過去にあったものと同じものを作る技術は無いわけです。食べ物は足りるようになっても、過去にあった技術が無くなっていれば、それは衰退した、と言えるんじゃないでしょうか。実際に、今ある技術だって、日本からそのまま移植したものばかりでしょう。

       高麗時代の富という認識がそもそも根拠がない。民衆が富を蓄積できていた時代なら、政権が変わってもその富は生かされます。ですが、高麗末期には国中が荒廃していて、継承できる富なんてどこにあったんですか。
       高麗末期から比べれば、李氏朝鮮の治世が始まってからしばらくしてからの方が、搾取が効率的に行えていたわけだから、局所的にではあるけれども、まとまった富の蓄積は可能だったはず。奴隷民がどんなに苦しい生活を強いられていたとしてもね。

    • 214名無し2021/04/05(Mon) 23:34:08ID:c0OTEzNTA(16/16)NG報告

      >>189
      まさにw

      当時の価値観無視して現代基準で評価して日本を責めている人達が、自分達の過去の非人道性や非道徳性を当時の価値観で評価しろとか言っているのが滑稽。

      同じ視点で評価しろと言う話。

      本当に朝鮮半島系の人達はご都合主義も甚だしい。

    • 215名無し2021/04/05(Mon) 23:49:32ID:Y1Njc2NjA(1/1)NG報告

      読むに値しない駄文を書き連ねる一般的な朝鮮人がいると聞いて

    • 216중국과 한국은 한가족이라고 생각한다2021/04/06(Tue) 03:01:03ID:k2MjI1MjQ(1/1)NG報告

      유사 이래 지금까지, 한반도가 일본을 능가했던 적은단 한번도 없었던 것 같다.
      경제, 군사(국방)뿐만 아니라,문화, 예술 등 모든 방면에서 그렇다.

    • 217名無し2021/04/06(Tue) 03:28:34ID:YwNjAyNzQ(2/2)NG報告

      偉大ではなかったから。

    • 218日本首狩族酋長(似非右派・似非保守専門)2021/04/06(Tue) 06:18:19ID:U4NTIyNDI(26/26)NG報告

      日本では、10世紀頃には村落共同体が武装して「地侍」を形成、
      それをまとめる国人による「武士団」も生まれていく。

      侍や武士は「西欧の騎士」と比較されることが多いが、成立の背景としては「西欧の市民軍・国民衛兵隊」に近い。

      日本だけが400年ほど先行して「文明を発展」させてるのであって、
      朝鮮を日本と比較すること自体が間違い(*´エ`*)

    • 219名無し2021/04/06(Tue) 12:18:10ID:IzMDY1Ng=(1/1)NG報告

      先進国というのはありえないでしょう。当時の先進国は武力が伴っていないと安定しない時代。さらに一度得られて便利と分かったインフラは簡単には手放さないから衰退は考えられない。つまり民族が入れ替わるくらいの大規模な戦や疫病や天変地異でもない限りは大きな衰退はない。人間の勢力が拡大したのは後世に技術、情報を残すことができるので文明などが進化してきたのだから、朝鮮の古代は先進国とする歴史は全くの幻想か異なる民族の話という結論しかない。

    • 220名無し2021/04/06(Tue) 23:15:53ID:cwMzM0NzY(1/1)NG報告

      외세로 무력통일해서일까요?
      그냥싹다밀어버렸으니

    • 221名無し2021/04/07(Wed) 06:31:25ID:U4MTQzMzQ(1/4)NG報告

      >>1
      최소한 에도시대 이전 일본 요리의 수준이 수렵인 수준인 건 알고있어
      고기 요리법 전무
      해산물도 내륙에서 얻기 힘든
      육식을 금지한 처지에
      채소요리도 맛도 종류도 한국에 비해 조잡
      유일한 양념은 된장과 간장이 합쳐진 원시적인 콩 소스 하나가 전부

    • 222がおらー◆TYBVULIPSU2021/04/07(Wed) 06:35:58ID:M3OTQ5Mzk(6/9)NG報告

      >>221
      その頃の朝鮮の料理を教えてください。

    • 223名無し2021/04/07(Wed) 06:45:05ID:U4MTQzMzQ(2/4)NG報告

      >>222
      주변 나라에 인기가 있었던 음식 중에 찾아보자면
      약과라고 그 시대에 제법 유명했다는 것 같다
      일단 음식이 아니라 간식이지만
      참기름과 꿀로 반죽한 페스트리인데
      송나라와 원나라에서 고려병이라는 이름으로 인기였다는 모양

    • 224がおらー◆TYBVULIPSU2021/04/07(Wed) 06:50:51ID:M3OTQ5Mzk(7/9)NG報告

      >>223
      お菓子ですか?
      朝鮮に砂糖はあったのですか?
      蜂蜜など高価だったでしょうから一部の高級貴族だけの食べ物だったんでしょうね。

    • 225名無し2021/04/07(Wed) 07:03:52ID:U4MTQzMzQ(3/4)NG報告

      >>224
      꿀은 귀족이
      돈이 부족하면 조청을 사용했다고 한다
      일본은 에도시대에와서
      드디어 설탕 수급할수있게 됐지만
      오키나와를 침략
      설탕을 훔쳐가기 이전에는
      구하기 힘들었다고 알고있다^^

    • 226がおらー◆TYBVULIPSU2021/04/07(Wed) 07:10:44ID:M3OTQ5Mzk(8/9)NG報告

      >>225
      そうだね。
      これで日本の江戸時代には味噌、醤油に加えて砂糖の調味料もあったことが分かったね。
      あと、酒、味醂、塩、唐辛子等の様々な薬味もあったよね。

    • 227名無し2021/04/07(Wed) 07:27:44ID:U4MTQzMzQ(4/4)NG報告

      >>226
      에도시대 이후로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전에 비해서야
      여전히 조미료는 된장아니면 간
      장이 거의 전부라고 볼수있지
      근대화 시대에 적극적으로 외국 요리와 조리법을
      받아드린 게 행운이었지
      아니였으면 영국처럼 됐을것
      영국인이 자국의 요리를 소개할때 뭐라고
      하는 줄 알아?
      강한 양념을 하지 않고
      자연 본연의"소재"의 맛을 살리는 것이
      전형적인 영국요리의 특징이라 말한다더라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같이 않아?

    • 228がおらー◆TYBVULIPSU2021/04/07(Wed) 07:32:10ID:M3OTQ5Mzk(9/9)NG報告

      >>227
      何を仰りたいのかよく分からないのですが、
      江戸時代以前の和食は充分に豊かな料理でしたよ。
      ご存じないのですか?

    • 229かわうそ2021/04/07(Wed) 07:47:09ID:Y5NzExNTA(1/1)NG報告

      高麗までは偉大だったが

      中国から流れてきた葡萄原人が高麗人を滅ぼし

      朝鮮にしたから文明的にそこでリセットされたんじゃね?

    • 230名無し2021/04/07(Wed) 09:00:06ID:A2Njk5MzM(2/2)NG報告

      百年前の朝鮮人はまるで原始人みたいだよな。
      それまで栄えていた国がどうやったらあの姿になるのか想像できませんw

    • 231名無し2021/04/07(Wed) 09:33:51ID:MzODYyMDE(1/1)NG報告

      5000年間、中国の属国と90%の奴婢が解放されたら勘違いするヤツも出てくるよなww

    • 232名無し2021/04/07(Wed) 09:53:25ID:Q0OTUxMjM(1/1)NG報告

      そもそも本来、優れていたら朝鮮半島に住もうという思考にならない。地理的にも立地よくない。
      追いやられた、居場所を失った、という条件なら半島にいる理由がある。
      優れていたかは別として、日本列島は住む場所としては最悪。地震、火山、津波もある。それでも生きるための努力は惜しまなかった。災害という自然とも戦ってきた。嫌なら半島に逃げたかもしれないが、半島よりはマシだったのだろう。大陸に渡った記録はあるかもしれないけど。
      このことは、現代からも証明されないか?

    • 233名無し2021/04/07(Wed) 10:13:13ID:MzMTM0MTE(1/1)NG報告

      >>227
      唐辛子は秀吉軍残滓だって知ってる?

    • 234名無し2021/04/07(Wed) 10:45:32ID:A1Mjc3ODk(1/1)NG報告

      人口やら作物の生産性や産業や技術に劣る高麗が朝鮮より偉大とかまあ考えられないな
      朝鮮半島では李氏朝鮮の時代には禿山だらけになり作物の生産性が激しく低下したのかな?
      人口がむしろ減ったのか?
      そういう根拠を提示しなければどうみても李氏朝鮮と同等か程度が低いが妥当

    • 235名無し2021/04/07(Wed) 10:54:12ID:YxMjYwODc(1/1)NG報告

      で、結局まともに回答できる韓国人はいないの?

    • 236名無し2021/04/07(Wed) 10:59:25ID:k0OTcyOTA(1/1)NG報告

      答え

      王族がコリアンになったのは朝鮮が最初だから。
      高麗までは中国人王朝

    • 237名無し2021/04/07(Wed) 15:02:34ID:YxNDA0NjE(6/6)NG報告

      >>228
      大衆文化が生まれて、日本の庶民の料理が記録に残ってる日本に比べて、

      韓国人は、何故か王宮の料理を挙げて、庶民がそれを食べてたかのように語る。

    • 238名無し2021/04/07(Wed) 19:10:58ID:QwMDM2NDI(1/1)NG報告
    • 239名無し2021/04/07(Wed) 21:21:42ID:AwNjI1Njg(1/2)NG報告

      >>1
      アヘン戦争を発端として清が衰退。
      当然、朝鮮も衰退する事になったのでは無いでしょうか?

    • 240名無し2021/04/07(Wed) 21:27:32ID:AwNjI1Njg(2/2)NG報告

      >>239
      属国云々の話題もあるみたいなので少しだけ...

      清はシューフェルト条約において、属国としての李氏朝鮮を属国条項で明記しようとしました。
      しかし米国にはそれを拒否されてしまいました。

      ですが、米国に拒否された「属国条項」の代替え案として、清の馬建忠の計略(李鴻章との見解もありますが)で李氏朝鮮は清の属国である事等を明記した「照會」を、李氏朝鮮国王から米国大統領に送付させることに成功しています。

      結果的に、李氏朝鮮末期には微妙な清の属国としての李氏朝鮮、皆さんが良く知る「例の旗」だと思います(笑)

    • 241名無し2021/04/07(Wed) 21:44:14ID:A4NzM3Njc(1/1)NG報告

      >>239

      朝鮮が雑魚なのは近代の話ではない。
      秀吉の時代には既にポンコツ

    • 242日本首狩族酋長(似非右派・似非保守専門)2021/04/07(Wed) 23:48:05ID:kzNjAxOTg(1/2)NG報告

      >>240
      横からだが、僕のコメントも関係していると思うので一言。

      その件は僕も知っている(*´エ`*)
      ただ、米国は受け取っただけで、承認するとも言っていないし、返書もしていない。
      (そもそも当時、アメリカはアジアでは日本を重視していたので、朝鮮への介入を回避していた)

      なので、国際的には朝鮮は(当時の国際上の観念としての)「国」として扱われてはいるが、支那からすれば「支那の一部」。
      中華帝国における「国」とは、中華皇帝の臣下に託された土地であって、近代概念の「国」ではない。

    • 243cubic+M2021/04/08(Thu) 00:36:44ID:I5Mjk5MDQ(4/4)NG報告

      세상은 넓고 바보들은 많다.

      그 당시 망해가는 조선 왕조 = 전제 왕조 국가는 어느 쪽에 붙는 것이 더 좋았을까?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

      그 당시 세계 정세가 급변기였기때문에 굉장히 판단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아편전쟁
      Russia의 남하
      미국의 뒤늦은 Asia 진출...

    • 244日本首狩族酋長(似非右派・似非保守専門)2021/04/08(Thu) 02:33:57ID:M5MzM3MTI(2/2)NG報告

      >>243
      朝鮮が自立とか、不可能だと思うわ(*´エ`*)

      19世紀末から現在の2021年に至るまで、「自主自立」の「近代国家」の概念を理解していたのは、
      金玉均と朴泳孝くらいしかいない。

      たった二人では、朝鮮は変えられない。
      変えようがない。

      今の韓国人も、近代国家を理解していない。
      そもそも、大韓民国は「立て付け」が近代国家に見えてるだけで、古代国家だし。

      1400年変わらないんだ。
      あと1000年経っても変わらんよ(*´エ`*)

    • 245名無し2021/04/09(Fri) 01:01:18ID:Q3MDgxNDE(2/2)NG報告

      いろいろなスレッドに首狩族酋長を見ますが、NG非表示が多い。解除が面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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