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분열은 대한민국의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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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名無し2017/06/29(Thu) 01:53:18ID:Y5MTgzNTY(1/1)NG報告

      YouTubehttps://youtu.be/mD4GbGmvNRc
      앞으로 세계가 어떻게 변화될지는 모르지만
      우리 민족이 변화를 가지고 힘이 쌔지는 시기가 왔으면좋겠습니다. 바로 그 시기가 중국이 분열할 때, 우리에게 그 기회가 올것이라 믿습니다. 만주지역은 예로부터 한인들의 거주지역이였고, 중국의 분열은 곧 중국 내의 각 민족들의 독립이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흡수될 것으로 예상합니다. 그렇게 중국은 분열되고, 한국은 거대해져서 한때 패권을 가지고 있었던 막강한 고구려가 부활하지 않을까요?
      비록 지금은 강대국에 억눌리고 분열되있는 민족일지라도, 다시 회생할수 있는 민족의 불씨, 민족의 정체성만 잘 지키고 있는다면, 우리가 주도하는 세상이 언젠간 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470^^ * ◇의 exrbfoxtip2017/06/30(Fri) 00:42:01ID:YxMTgzODA(45/65)NG報告

      >>469나무 갑옷.

    • 471^^ * ◇의 exrbfoxtip2017/06/30(Fri) 00:54:03ID:YxMTgzODA(46/65)NG報告

      그당시 너희 기술로 바다 건너 있는 선진국을 그것도 2개나 정복하는것은 바보들이나 생각하는것이다.
      보급물자부터 전술 선박기술 갑옷기술 그리고 키도 작은 열등한 왜인이 2개의 선진국을 지배한다는것은 왜인이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하는것 그 이상은 아니다.

    • 472名無し2017/06/30(Fri) 01:07:48ID:UzOTc4MDA(4/23)NG報告

      >>470
      何を説明出来ないのか不明だが、日本では紀元前後より急速に鉄の使用が増えている。
      朝鮮半島での鉄製造は前漢や燕の影響によるものだと思うが、辰韓、弁韓地域は鉄の製造が盛んだった地域の筈だが、任那を倭が勢力下にし続けたのはこの鉄の存在が大きいのではないか。

      鉄に関してはその黎明期に前漢や朝鮮半島からの供給が主だった事は間違いないと思う。

      この事が何か俺の論に矛盾を生じさせているか。

    • 473名無し2017/06/30(Fri) 01:09:28(1/1)

      このレスは削除されています

    • 474^^ * ◇의 exrbfoxtip2017/06/30(Fri) 01:21:08ID:YxMTgzODA(47/65)NG報告

      >>472그당시에 백제 근초고왕이 초강대국 고구려를 정복하고 고국원왕도 죽였는데.
      왜가 바다를 건너서 신라와 백제를 정복하는것은 불거능한 이야기이다.
      망상으로만 생각해라.

    • 475名無し2017/06/30(Fri) 01:22:52ID:UzOTc4MDA(5/23)NG報告

      >>471
      どうも考え方が民族史観に囚われていて古いな。

      百済も、新羅も、任那地方も韓国でも無ければ、日本でもない。

      任那地方は倭人という、日本列島の勢力と繋がりのある朝鮮半島の先住民だ。

      鉄の製造が中国から伝わったら当然皆それを使うだろ。そして作ろうとするだろ。日本は初期に主に任那地方に頼ったんだ。

      再度言うが、任那も百済も新羅も韓国ではない。
      現代の民族史観から離れないと俺の話をお前は理解出来ない。

      それでは聞くが百済は何故倭国に援軍を頼ったんだ。弱くて劣るのなら頼る必要ないだろ。

      何度も言うがお前が教わった民族史観から離れろ。

    • 476^^ * ◇의 exrbfoxtip2017/06/30(Fri) 01:31:15ID:YxMTgzODA(48/65)NG報告

      >>475
      백제가 도움을 요청헌것운 당과 신라의 합동작전에서 어떻게 생각해도 군사력이 부족하니까.
      동맹국 왜에게 지원군을 요청한것이지.
      군사적 기술은 열등해도 일단 당장 그래도 병사로 사용하는것은 문제가 없으니까.

    • 477テオリア2017/06/30(Fri) 01:33:44ID:UzOTc4MDA(6/23)NG報告

      WIKIより抜粋

      朝鮮学会編『前方後円墳と古代日朝関係』(2002年)では、西谷正は倭人系百済官僚が栄山江流域に存在したと主張し、山尾幸久は、倭人の有力者が百済に移住し、百済女性との間に儲けた二世が外交の使者になっている例を挙げ、そのような倭人系百済官僚の存在を主張した

      高麗大学教授で日本古代史学者の金鉉球は、『日本書紀』には倭が任那日本府を設置して、朝鮮半島南部を支配しながら、百済・高句麗・新羅三国の三国文化を搬出していったことになっているのに、韓国の中学校・高校の歴史教科書では、百済・高句麗・新羅三国の文化が日本に伝播される国際関係は説明がなされず、ただ高句麗・新羅・百済の三国が日本に文化を伝えた話だけを教えており、さらに百済・高句麗・新羅三国の文化を日本に伝えたとされる話は、朝鮮最古の史書は12世紀の『三国史記』であり朝鮮の古代の史書は存在しないため、すべて『日本書紀』から引用している。しかし、日本の学者が『日本書紀』を引用して、倭が朝鮮半島南部を支配したという任那日本府説を主張すると、韓国の学界はそれは受け入れることができないと拒否するのは、明白な矛盾であり、こうしたダブルスタンダードゆえに日本の学界が韓国の学界を軽く見ているのではないか、と指摘している

      >>476

    • 478^^ * ◇의 exrbfoxtip2017/06/30(Fri) 01:33:52ID:YxMTgzODA(49/65)NG報告

      당장 전략적인 측면에서도 391년경에 왜가 최고 전성기였던 백제 그리고 신라를 두 국가를 한번에
      정복하는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이다.

    • 479テオリア2017/06/30(Fri) 01:34:54ID:UzOTc4MDA(7/23)NG報告

      >>476

      ただの屁理屈になってきている

    • 480^^ * ◇의 exrbfoxtip2017/06/30(Fri) 01:35:13ID:YxMTgzODA(50/65)NG報告

      >>477일본서기는 기본적으로 과장된 신화 같은면이 많다.
      그것을 자료라고 신용하기는 힘둘다.

    • 481^^ * ◇의 exrbfoxtip2017/06/30(Fri) 01:40:47ID:YxMTgzODA(51/65)NG報告

      근초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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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 근초고왕
      百濟 近肖古王
      백제의 13대 국왕
      본명 부여구(扶餘句)
      재위 346년 9월~375년 11월
      왕후 왕비 진씨(王妃 眞氏)
      부왕 비류왕
      이전 왕 계왕
      다음 왕 근구수왕
      근초고왕(近肖古王, ? ~375년, 11월 재위: 346년 9월~375년 11월)은 백제의 제13대 국왕이다. 이름은 중국의 《진서(晉書)》에 의하면 여구(餘句)[1], 일본의 《고사기》에는 조고왕(照古王)[2], 《일본서기》에는 초고왕(肖古王)등의 이름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録)》에는 속고왕(速古王)으로도 불린다.

      근초고왕은 마한 54개 연맹체 중 하나였던 백제국이 차츰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출 무렵 비류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체격도 아주 크고 용감했기 때문에, 둘째 아들임에도 차기 왕으로 지목되어 346년 계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근초고왕은 남으로 전라도 지역까지 마한 54개 연맹체 전체를 통일하였고, 북으로는 평양성까지 진격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371년) .

      https://ko.wikipedia.org/wiki/%EA%B7%BC%EC%B4%88%EA%B3%A0%EC%99%95

      당시 백제는 고구려의 왕을 죽일정도로 강했다.

    • 482テオリア2017/06/30(Fri) 01:42:29ID:UzOTc4MDA(8/23)NG報告

      >>478

      まず476を読め

      俺も確実に征服したとは思わない。
      というのは、朝鮮半島のこの時期はかなり政治戦略的な着いたり離れたりが繰り返された時期だと思うからだ。

      百済も新羅も屈服したわけではないのではないか
      今は倭国に従った方が得だという時期もあったというだけのことだろう。

      再度言うが、おれは倭国自体現代の日本という概念ではとらえていない。
      それは百済も新羅も韓国という概念でとらえていないのと同様だ。

      お前らの無駄な韓民族5000年の歴史という妄言スローガンや民族史観が真実を理解する邪魔をしている。
      一つ一つの残された物証をつなげれば俺の言っていることは至極当然な結果を客観的に話しているだけだ

    • 483テオリア2017/06/30(Fri) 01:46:03ID:UzOTc4MDA(9/23)NG報告

      >>480

      ちゃんと読んだか。
      韓国が都合のいいところだけ、自らの歴史に引用し教科書にも載せ、都合の悪いところは否定する姿勢をお前らの国の学者が暗に批判しているという事だ

    • 484^^ * ◇의 exrbfoxtip2017/06/30(Fri) 01:46:31ID:YxMTgzODA(52/65)NG報告

      >>482열등후진국에 따르는 이유가 없지 않는가?

    • 485テオリア2017/06/30(Fri) 01:51:49ID:UzOTc4MDA(10/23)NG報告

      >>481

      好太王碑も否定し日本書紀の都合の悪いところも否定し、三国史記の都合の悪いところも否定し、朝鮮になにも当時の残された文献がない以上お前の論は民族史観による希望の歴史を語っているに過ぎない。

      残された資料と考古学を無視して正論など語れるわけないだろ。

      だから言う。
      民族史観から離れないと真実は見えない。

    • 486テオリア2017/06/30(Fri) 01:54:21ID:UzOTc4MDA(11/23)NG報告

      >>484

      終了でいいな。
      再度言う。

      お前らの民族史観は真実を理解する邪魔になっているだけだ
      耳をふさぎ目を閉じるな。

      言いたいことあればまたどこかで俺を捕まえな

    • 487^^ * ◇의 exrbfoxtip2017/06/30(Fri) 01:55:39ID:YxMTgzODA(53/65)NG報告

      >>485불편한곳은 그냥 넘기고 단순히 호태왕비에 적혀있습니다.
      사실입니다.death ! 해도 의미가 없지.

    • 488名無し2017/06/30(Fri) 02:19:12ID:UzOTc4MDA(12/23)NG報告

      >>487
      今日はこれで最後にするが、俺はお前と論ずる中、韓国は劣っている等差別的な事は何一つ話してない。
      資料に基づき、客観的な真実を共有しようとしているだけだ。

      お前は昼間尊重して欲しい旨のレスを残しているが、お前は俺と今話す中、窮してきたさい後進国、劣った等、根拠もない差別的な発言をしている。

      自分の言った事との言動不一致を感じないか。
      みっともない。

      素直に

    • 489名無し2017/06/30(Fri) 02:21:32ID:UzOTc4MDA(13/23)NG報告

      素直に認めるべきは認める強さを持て
      俺は勝った負けたの話をしようとしている訳ではない。

      おやすみ

    • 490^^ * ◇의 exrbfoxtip2017/06/30(Fri) 03:31:38ID:YxMTgzODA(54/65)NG報告

      >>488후진적이고 기술적으로 열등한것을 그럼 어떻게 설명하라는 말인가?

    • 491^^ * ◇의 exrbfoxtip2017/06/30(Fri) 03:33:12ID:YxMTgzODA(55/65)NG報告

      >>488 너희들의 쓸데없는 한민족 5000 년 역사라는 망언 슬로건과 민족 사관이 진실을 이해하는 방해를하고있다.
      하나 하나 남겨둔 물증을 연결하면 내가 말하고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를 객관적으로 이야기하고있을 뿐이다

      니가?

    • 492^^ * ◇의 exrbfoxtip2017/06/30(Fri) 03:34:43ID:YxMTgzODA(56/65)NG報告

      486테오리아1時間前ID:UzOTc4MDA(11/13)
      >>484

      종료에 좋다.
      다시 말한다.

      너희들의 민족 사관은 진실을 이해 방해가있을 뿐이다
      귀를 막고 눈을 닫기 마라.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또 어디 선가 나를 잡아 마라

      종료라고 말하고 왜 다시와서 작성을 하는것인지?

    • 493名無し2017/06/30(Fri) 14:03:22ID:UzOTc4MDA(14/23)NG報告

      >>492

      お前らの国でどう教えられているかは知らんが、新羅も百済も実態として300年代中盤に国としてまとまった国だろう。高句麗は当然、倭と比しても、300年代はまだ弱小国であったと見るべきだろう。

      中国の資料でも、好太王碑も日本書紀でも基本的に高句麗、倭国と新羅、百済の関係に感し、記載されている事は大差がない、

      百済の近肖古王の高句麗攻撃は事実だろうが、すぐに反撃されている。

      少なくとも300年代、倭国が新羅、百済と比し、弱く劣っていた事を証明できるものは何一つ存在していない。中国、日本、高句麗の資料はその逆を語るものばかりだ。皆が一緒に捏造したのか?

      民族主義で思い込みの希望の歴史に何時までもすがるな。

    • 494^^ * ◇의 exrbfoxtip2017/06/30(Fri) 18:13:44ID:YxMTgzODA(57/65)NG報告

      >>493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는 성덕왕 19년(720)에 신라가 일본의 서쪽 변방을 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21년(722년) 10월에 모화군(毛火郡)에 모벌군성(毛伐郡城)을 쌓아 관문으로 삼고, 일본의 적들의 길을 막았다. 성의 둘레는 6,792보(步) 다섯 자에 동원된 역도(役徒)는 39,262인이었으며, 책임자는 원진(元眞) 각간이 맡았다.[13][주 1][14] 이는 경주의 동남쪽 경계였다. 30년(731년)에는 동쪽 해안으로 쳐들어온 일본의 병선 300척을 격퇴하고, 가을 9월에 백관에게 명하여 적문(的門)에 모여 수레 쇠뇌[車弩] 쏘는 것을 관람하는 등의 군사훈련을 실시했다.[15] 패강 이남 지역의 영유권을 승인받은 뒤인 35년(736년) 이찬 윤충과 사인 영술(英述)을 시켜 평양(平壤)·우두(牛頭) 두 주(州)의 지세를 살펴보게 하였다.

      https://ko.m.wikipedia.org/wiki/성덕왕

      너희들은 백촌강 전투 이후에 다시 패배하였다.

    • 495안녕하세요 조선인입니다 일단 간단하게 똥술로 아침을 시작하고 산책으로 조금 돌아다니다가 여자 강간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PC나 스마트폰으로 카이카이에서 일본인에게 논파 당해서 한국인 특유의 정신병인 홧병이 발병해 키보드를 강타 그렇기 때문에 입력 수단이 제한적인 나에게는 더 이상 닉네임을 길게 만들 수가 없네요 죄송합니다2017/06/30(Fri) 18:15:14ID:g4MTYyNzA(1/1)NG報告

      환빠가 또 ww

    • 496^^ * ◇의 exrbfoxtip2017/06/30(Fri) 18:18:36ID:YxMTgzODA(58/65)NG報告

      왜의 가야 지배를 입증할 고고학적 유물이 전혀 없다. 만약, 왜가 가야를 정복했다면 4세기에 가야 유물이 끊기고 6세기에 왜의 유물이 출토되어야 한다. 하지만, 출토된 유물은 4~6세기까지 가야유물이 계승된다.
      5세기~6세기 전반에 걸쳐, 야마토왕조가 가까이 있는 구주왕조를 정복하고 있지 못했는데, 그 이전(4세기)에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정복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않는다. 4세기는 백제의 근초고왕 전성기로써, 백제의 전성기에 일본이 한반도 남부 지방을 정복할 수는 없다.
      그 당시, 배의 운송 능력이 군인 25명, 말 2~3필 정도이다. 이러한 능력으로는 일본 열도로부터 한반도 남부 지방을 경영할 만한 충분한 병력과 물자를 한반도에 전달할 수 없다.
      남조(南朝)의 송(宋)으로부터 받았다는 왜왕의 책봉기사 역시 왜왕이 받은 칭호의 등급이 고구려, 백제보다 낮았다는 점에서 해당 칭호는 별 의미가 없음이 중국 기사로 확인된다. 왜왕은 478년에 안동대장군을 받았는데, 백제왕은 420년에 그보다 두단계 높은 진동대장군을, 고구려왕은 백제왕보다 두단계 높은 정동대장군을 받았다. 당시 중국과의 교류가 없던 신라를 빼고, 왜왕이 중국왕조들에게서 받은 칭호는 항상 고구려, 백제보다 낮았다.

      https://ko.m.wikipedia.org/wiki/임나일본부설

    • 497^^ * ◇의 exrbfoxtip2017/06/30(Fri) 18:21:59ID:YxMTgzODA(59/65)NG報告

      《일본서기》는 8세기 초에 쓰여진 책으로써 그 내용이 의심스럽고 상호 모순되는 부분이 많아 지금은 일본의 학자들도 비판을 하는 자가 상당히 많다. 임나일본부설과 관련된 일본서기의 대표적인 왜곡으로 백제의 장군 목라근자(木羅斤資)에 대한 일본서기의 서술이 있다. 일본서기 382년 기록[6] 을 보면 전쟁에서 대가야를 구원한 사람은 백제 장군인 목라근자로 되어 있다. 그러나 목라근자의 가야제국(諸國) 평정과 대가야 구원을 마치 천왕의 명에 따라 일본에 파견하여 이루어진 것처럼 왜곡되고 있다. 백제는 내륙국이였던 대가야를 바로 구원할 수 있었지만, 일본은 내륙에 있는 대가야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바다를 건너 한반도 남쪽 지역들을 뛰어넘어야 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7] 이 기록을 근거로 일본의 학자들은 일본이 가야를 200년 가까이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했었다.
      '일본' 이라는 국호는 고구려,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멸망한 7세기 이후에 사용된 것이니 만큼, 4세기에 '일본' 이라는 명칭이 들어가는 '임나일본부' 가 있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8]
      임나일본부는 중요한 역사 기록 일텐데 고사기에는 전혀 기록이 되어 있지않다. 720년 편찬된 일본서기보다 8년 전 편찬된 고사기에는 신공왕후의 임나정벌과 같은 사실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9]
      200년간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데 한국의 기록에 이를 입증할 만한 단서가 전혀 없다. 단지 '임나' 라는 지명만이 광개토왕릉비, 삼국사기, 진경대사탑비에 보일 뿐이다.

    • 498^^ * ◇의 exrbfoxtip2017/06/30(Fri) 18:22:55ID:YxMTgzODA(60/65)NG報告

      일본서기는 720년도에 편찬되었다.
      >>494

    • 499テオリア2017/07/01(Sat) 00:01:58ID:MxNzQwNjA(15/23)NG報告

      >>494
      三国史記新羅本紀には「日本国」ではなく、ここだけ敢えて「日本の賊」と記載されている。
      時代背景的にも日本国軍とは常識的に考えられない。記載通り日本軍ではなく、日本の賊軍なのだろう。
      あまり重要なことではない。

      また、百済や新羅を征服したとはそもそも俺は言っていない。好太王碑文にある臣民としたということがイコール征服したというわけでもないだろう。新羅と百済はそもそも高句麗に従ってたが倭人勢力が影響を及ぼしてきたくらいの認識でいいのではないか。いずれにせよ、このあたりから微妙な力関係の駆け引きがかなり活発になっていったということだろう。ここもとりあえずはこれ以上議論はしない。
      おれがお前に言いたいことは倭人は百済、新羅が明確に成立する以前より確実に朝鮮半島南部に定住していた人間がいたという事。また、お前らは教科書で習っていないだろうがその倭人勢力は後々朝鮮半島に想像以上に影響力を及ぼしていったということだ。
      細かい点の史実検証に関しては学者間でも様々な意見があるためここではもう触れない。

      書籍引用を様々したいがとても書ききれないから、さしあたりは下記位の見解でいいだろう

      これまでのところ全羅南道に11基、全羅北道に2基の前方後円墳が確認されている。朝鮮半島の前方後円墳はいずれも5世紀後半から6世紀中葉という極めて限られた時期に成立したもので、百済が南遷する前は伽耶の勢力圏の最西部であった地域のみに存在し、円筒埴輪や南島産貝製品、内部をベンガラで塗った石室といった倭系遺物を伴うことが知られている。韓国の慶北大学の朴天秀教授は、韓国の前方後円墳は在地首長の墓を避けるように単発的に存在し、石室を赤く塗るものもあり、九州の古墳と共通点が多い為、被葬者は九州出身の豪族だった可能性を指摘している。また、朴は、全ての文化は韓国から日本に渡ったし、前方後円墳だってそうだ、という反応が1980年代の韓国ではあったが、それは間違いで、韓国の前方後円墳は5~6世紀に日本から韓国に渡った文化を示す例であるとし、朝鮮半島南部の倭の統治機関としての「任那日本府説」の存在を否定しつつ、一方で韓国民族主義の影響を強く受けた自国研究者の学説を厳しく批判し、この時代の朝鮮半島への倭の影響を認めている

    • 500テオリア2017/07/01(Sat) 00:31:27ID:MxNzQwNjA(16/23)NG報告

      >>498

      追加で海外での扱いを紹介

      世界各国では世界約50カ国で教科書を出版しているオックスフォード大学の出版社が制作している教科書は「5世紀の日本の勢力は朝鮮半島南部まで支配した」と記述している。また、プレンティスホール社が出版しているアメリカの教科書『世界文化』は「西暦400年ごろ、(日本は)幾つかの氏族が連合して日本の大半を統一し、朝鮮南部の地域を統治するまでに至った」と記述してあり、カナダやオーストラリアの教科書もまた、同様の記述が存在する。またコロンビア大学のオンライン百科事典や米議会図書館には、「古朝鮮は紀元前12世紀に、中国人、箕子が朝鮮半島北部に建てた国だ。その当時、朝鮮半島南部は日本の大和政権の支配下にあった」と書かれている。中華人民共和国では上海人民出版社が出版している教科書『世界史講』は「新羅は、半島南方で 早くから長期間にわたって倭人の基盤となっていた任那地区を回復した」と記述している。中華人民共和国の外務省は、同省のホームページの日本史介欄で、「5世紀はじめ、大和国が隆盛した時期にその勢力が朝鮮半島の南部にまで拡大した」と記述していたが、韓国政府からの抗議を受け、第二次世界大戦以前の日本歴史部分を全て削除した。

      ;;;;;;;;;;;;;;;;;;;;;;;;;;;;;;;;;;;;;;;;;

      俺は上記見解位強い影響力があったという立場ではない。

      倭人は漢書「論衡」で春秋時代呉の建国の祖太伯の子孫とされている。これは晋書、梁書とも一致した記載である。まあ子孫かどうかは別としても、春秋時代呉国の住民及び遺民が海路及び朝鮮半島経由で5000年ほど前より相当数九州地方に渡来してきていることはDNA比較から間違いない。また、水稲栽培の担い手となった集団でもある。
      弥生人の祖となる集団の大きな一つであり恐らく、当時中国朝鮮半島民にも上記記載認識はあったものと思われる。

      「隋書」より
      新羅 百濟皆以俀爲大國 多珎物 並敬仰之 恒通使往來
      要するに
      百済、新羅が、倭は大国で珍物多く倭をを尊敬して仰いでいたとし、使いを通わせていた
      ということだ。

      民族主義史観歴史教育を受けてきていれば受け入れがたいことかもしれないが、
      差し当たり、君には古代倭国の認識と百済、新羅との関わりを再考するきっかけになってくれれば俺はそれでいい。
      以上

    • 501名無し2017/07/01(Sat) 00:49:41ID:MxNzQwNjA(17/23)NG報告

      >>500

      5000年前✕
      3000年程前位から○

    • 502^^ * ◇의 exrbfoxtip2017/07/01(Sat) 01:51:08ID:M5Nzk2MjY(61/65)NG報告

      >>500 1996년 이후 마한 지방(전남 영광 군동리, 충남 보령 관창리)에서 일본보다 최소 한 세기 이상 앞선 시대의 주구묘가 대량으로 나와버렸다. 정확히는 지금까지 일본에만 있었던 주구묘가 한국의 발굴기법 발달로 주구묘가 청동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놓쳤던 사실을 파악하게 된 것이다. 국사 교과서를 달달 외웠던 사람들이라면 기억할 지도 모르겠지만 주구묘는 국정 국사 교과서 시절 마한 파트에 떡하니 사진까지 나와있다. 자세한 설명은 없지만, 한국 사학계가 식민사관의 극복에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 환빠 보고 있나? 고대 삼한세력과 당시 왜와의 교류가 있었다는 것은 한일역사학계가 인정하고 있으니, 결론은(...) 이 사건으로 당시 일본학계 전체는 상당한 충격을 받아서, 한국에 NHK 방송사가 헬기까지 띄워 영상자료를 찍어가고, 일본학자가 직접 발굴현장에 찾아와 한국산 주구묘를 바라보며 '평생의 연구가 다 날아갔다'며 눈물까지 흘렸다. 더욱이 전라도에서 기원전 3세기경의 대형 주구묘들이 발굴되면서 기존의 설은 더욱 흔들리게 되었다.(HD 역사스페셜 한일역사전쟁, 영산강 장고형 무덤편)
      https://namu.wiki/w/임나일본부설?from=임나일본부

    • 503名無し2017/07/01(Sat) 02:21:01ID:MxNzQwNjA(18/23)NG報告

      >>502
      知ってるよ。
      韓国の学会にとっても喜ばしい結論にたどり着く訳では無いかもしれないからあまり調査が進展してないよね。

    • 504テオリア2017/07/01(Sat) 04:56:57ID:MxNzQwNjA(19/23)NG報告

      言い忘れてたが任那日本府なる名前は当然、後年付けられたものだ。
      様々な意見があるが正直実在の有無には俺はそんなにこだわっていない。そんな物があろうがなかろうが、倭の勢力が朝鮮半島に影響力を及ぼしていた事は間違いないからだ。


      百済にしろ、新羅にしろ倭国に朝貢し、人質を差し出していた時期がある訳だから、倭勢力が支配したしないはともかく、相応の影響力を両国に及ぼしていた事は間違い無い事だ。それ位はいくらお前でも認める事が出来るだろう。

      韓国はどうしても支配された歴史から、古代史に於いても倭勢力の影響を小さくする為の証拠、論考を一生懸命探し出そうとしている様に見受けられるが、最低限上記位は認めることが出来なければ、それこそお前らは集団ファンパ
      となってしまう。

      各歴史書から正否はともかく倭国が朝鮮半島南部を支配していたと言う事は任那日本府があろうが無かろうが基本的に韓国以外ではスタンダードな古代史認識であると言う事は認識した方が良い。

      それを覆せるだけの明確な資料、証拠がないからだ。

    • 505^^ * ◇의 exrbfoxtip2017/07/01(Sat) 05:07:28ID:M5Nzk2MjY(62/65)NG報告

      >>504갑자기 영향력에서 왜구에게의 조공으로 바뀌는것인가?
      너는 기본적으로 논리도 없고 근거도 없다.

    • 506^^ * ◇의 exrbfoxtip2017/07/01(Sat) 05:14:43ID:M5Nzk2MjY(63/65)NG報告

      칠지도 앞면의 후왕(侯王)은 왜왕(倭王)을 가리키는 것으로 백제가 왜의 상국이었음을 뜻하고, 뒷면에 전시후생(傳示後世,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은 전형적으로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명(下命)하는 형태의 문장이라는 점에서 칠지도는 백제가 왜왕에게 하사한다는 뜻으로 줬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 507^^ * ◇의 exrbfoxtip2017/07/01(Sat) 05:33:30ID:M5Nzk2MjY(64/65)NG報告

      일본의 이와 같은 논리로 인해 일본에 그토록 중요했던 신라와의 관계가 몇 번 위기를 겪은 일도 있었다. 예컨대 735년 당나라와의 관계가 완전히 정상화돼 대동강 이남 땅이 신라의 영유임을 당나라가 최종적으로 인정하자, 의기양양한 신라 정부가 일본에 사신을 보내 “우리 국호가 왕성국(王城國)으로 개칭됐다”고 알렸다. 더는 신라를 함부로 무시해 망언을 퍼붓지 말라는 강력한 메시지가 담긴 통보였다. 이에 대해 일본 쪽이 “조공국가가 우리에게 알리지 않고 국호를 무단으로 바꾸었다”고 강하게 반발하고 신라도 자존심을 지키느라 742년 일본 사신의 접견을 거절해버렸다. 이런 갈등을 자초하면서까지 일본이 신라를 ‘번국’으로 보려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 508^^ * ◇의 exrbfoxtip2017/07/01(Sat) 05:34:04ID:M5Nzk2MjY(65/65)NG報告

      7세기 후반부터 일본의 구체적 제도 개혁의 현실적 모델이 신라인 경우가 많았지만, 궁극적으로 이 시대의 일본이 최상의 모델로 여긴 것은 당나라였다. 당나라는 수많은 ‘번국’을 거느린 세계 최대의 제국이었으며, 당나라와 싫든 좋든 조공·책봉 외교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신라는 적어도 형식상 그중의 하나였다. 일본도 당나라의 전례에 따라 ‘번국’을 갖고 싶어했지만 실질적으로 일본의 영향하에 있던 외국이란 아이누의 조상 등이 섞여 있는 혼슈 북부 지방의 선주민 에미시(蝦夷) 등 일본열도 오지의 주민들 정도였다. 그들도 빈번히 전쟁을 일으키는 등 일본을 ‘종주국’으로 무조건 인정하지도 않았다. 현실 세계에서 ‘동방의 제2 당나라’가 될 수 없던 일본은 결국 현실이 아닌 관념의 세계에서 신라 등 당나라의 형식상 ‘번국’들을 자국의 ‘번국’으로 표기하기에 이르렀다. 더군다나 당나라와 더 거리가 멀었던 일본은 신라와 달리 당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지 않았기에 이와 같은 ‘제국적 상상’을 하기가 더욱더 쉬웠다. 거기에 가미된 것은 일본 지배계층 속에 많이 들어간 백제인과 고구려인 등 한반도 출신들의 적대적 신라관이었을 것이다. 신라인들이 ‘일통’(一統·통일)이라고 표현했던 대동강 이남 영토의 정복 과정은 그들에게 다름 아닌 ‘망국’이었기 때문이다.

    • 509^^ * ◇의 exrbfoxtip2017/07/01(Sat) 05:34:26ID:A1MTgzMTk(1/2)NG報告

      ‘번국’이라는 말을 신라에 대해 줄곧 써온 일본이지만 663년 백촌강(금강) 대첩에서 참패한 교훈이 있었기에 ‘번국’과의 대대적 실력 경쟁은 조심스럽게 피했다. 그러다 727년 강대국 고구려의 후계 국가로 인식됐던 발해의 사신이 최초로 일본에 온 뒤로는 일본이 신라보다 더 우호적이고 강력하다 싶었던 발해의 손을 들어 신라에 대한 적대 행위까지도 감행하기에 이르렀다. 예컨대 731년 일본 배 300척이 동해안을 습격해 신라 주민들을 약탈하는 사태가 벌어졌다(<삼국사기> 제8권). 그러나 일시적 습격 정도는 했어도 대규모 신라 침략을 단행할 만한 역량이 당시 일본 지배자들에겐 없었다.

      755년 신라의 최대 동맹국이던 당나라에서 안록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 신라가 외부 지원을 받을 가능성이 당분간 없어졌을 때 일본이 발해와 공조해 신라를 크게 협공할 계획을 몇 년 동안 추진했지만 이도 불발에 그쳤다. 신라의 군사력이 두려운데다 763년 211명이나 되는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한 신라의 외교술이 잘 먹힌 모양이었다. 즉, 신라를 실력으로 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 문화 수준에 대해 열등감을 느꼈던 만큼 ‘관념적 번국론’의 당위를 오히려 더 고집하는 모양이었다. 결국 자국민들을 향한 일종의 ‘조정의 자존심 세우기 작전’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이런 고대의 ‘번국론’이 19세기 말 일제의 한국 침략을 합리화하는 데 이용됐다는 사실이 지금까지도 7~8세기 신라와 일본 관계사에 대한 한국인의 호의적 관심을 막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http://h21.hani.co.kr/arti/COLUMN/71/25431.html

    • 510^^ * ◇의 exrbfoxtip2017/07/01(Sat) 05:36:05ID:A1MTgzMTk(2/2)NG報告

      아이누의 조상 등이 섞여 있는 혼슈 북부 지방의 선주민 에미시(蝦夷) 등 일본열도 오지의 주민들 정도였다. 그들도 빈번히 전쟁을 일으키는 등 일본을 ‘종주국’으로 무조건 인정하지도 않았다.

    • 511名無し2017/07/01(Sat) 05:37:15ID:MxNzQwNjA(20/23)NG報告

      >>506
      寝ようと思ったらレス早いな
      あくまで記載に於いては朝貢とされている。俺が勝手に言っている訳ではない。
      しかし、百歩譲って意味合い的には明確な上下関係を表したものでもないだろう。

      百済は対高句麗対策で倭勢力を味方にしておきたかった事情がある。

      幾ら何でも人質を差し出す国が下賜をする立場にある訳がなかろう。
      流石にここまで行けばファンパだ

      お前の文は翻訳が上手くできない部分が以前から多い。

    • 512^^ * ◇의 exrbfoxtip2017/07/01(Sat) 05:39:33ID:Y4MTU0MDU(1/1)NG報告

      >>511인질이 아니고 보증인인것이지.

    • 513^^ * ◇의 exrbfoxtip2017/07/01(Sat) 05:47:15ID:k4MTI0ODM(1/3)NG報告

      삼국통일 후 신라와 일본의 관계 편집

      신라의 삼국통일전쟁 시기인 663년 일본은 백제 부흥운동을 지원할 목적으로 42000명의 군대와 800척 이상의 함대를 파견했다가 백강 전투에서 대참패를 당하였다.

      이후 한동안 일본은 오노 성(大野城, 665년)[1] 과 카네다 성(金田城, 667년)[2] 을 축조하고 방어전쟁준비를 하는 등 당의 침략위협에 대한 공포에 시달렸다. 그러나 나당전쟁으로 인해 신라와 당의 관계는 매우 악화되었고 신라는 당과의 전쟁위험이 존재하는 동안 후방의 위협을 제거할 목적으로 일본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720년까지 교류를 증진하며 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그동안 일본은 당의 율령체제를 모방해 국가체제를 정비하며(→701년, 다이호 율령) 천황중심의 일본식 중화사상에 입각한 대외이념을 표방하면서 신라를 자신들의 번국(藩國)으로 간주하는 야량자대(夜郞自大)적인 태도를 표출하기도 했다. 《일본서기》등이 편찬(720년)되면서 소위 진구 황후의 삼한정벌설이 조작된 것도 이즈음이었다.

      당시에 상승일로의 국세에 있던 신라로서는 이런 일본의 태도를 용납할 수 없었고 720년 경부터 두 나라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치닫기 시작했다. 동시에 일본의 무례한 태도도 도를 넘어 급기야 일본이 사신을 파견해 조공을 강요하다가 추방당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신라에서도 사신을 파견했다가 다자이후(太宰府)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결국 731년 (성덕왕 30년) 일본은 병선 300척을 동원해 신라를 침공했으나 패배하고 말았다.[3]

      그 후 일본은 신라와 관계에 대한 대안으로 발해와 적극적으로 통교하기 시작했다. 발해는 일본 견당사의 호송을 목적으로 일본에 사절을 파견하기도 했다.

      그 후에도 신라와 일본의 관계는 험악하게만 돌아가고 있었고 이런 양국간의 극한의 대립은 경덕왕대(742년 ~ 765년)에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집권기에 절정에 달해 있었다.

      https://ko.m.wikipedia.org/wiki/신라정토계획

    • 514名無し2017/07/01(Sat) 05:56:04ID:MxNzQwNjA(21/23)NG報告

      >>510
      8世紀以降に於いての記述に於いては、記載者がどの国の目線で記載するかで表現も変わる。

      翻訳が不十分だが、簡単に言えば新羅との間は日本が従わせようとしたが全然上手く行かなかったという感じだろう。お前の読みにくい文と大した認識は変わらないのではないか。
      貿易の様なものは盛んだったようだが。

      アイヌの件も何書いているかよく分からないが
      アイヌ制圧に大和朝廷が苦労していたのは事実だ。

      8世紀半ば以降は時代も違うから別に話す必要もないだろう。

    • 515名無し2017/07/01(Sat) 05:57:30ID:MxNzQwNjA(22/23)NG報告

      >>512
      どっちでもいい。

    • 516^^ * ◇의 exrbfoxtip2017/07/01(Sat) 05:57:36ID:k4MTI0ODM(2/3)NG報告

      >>514 ‘번국’을 갖고 싶어했지만 실질적으로 일본의 영향하에 있던 외국이란 아이누의 조상 등이 섞여 있는 혼슈 북부 지방의 선주민 에미시(蝦夷) 등 일본열도 오지의 주민들 정도였다. 그들도 빈번히 전쟁을 일으키는 등 일본을 ‘종주국’으로 무조건 인정하지도 않았다.

    • 517名無し2017/07/01(Sat) 06:08:02ID:MxNzQwNjA(23/23)NG報告

      >>513
      三韓征伐が操作かどうかは見解をはっきり出しかねるが、その他はそんな感じだろう。

      寝るからな。
      おやすみ。

      有り得ないが韓国が日本を併合したら日本人は日本民族ではあるが韓国人になる。
      逆も同じ論理だ。
      下らないケンカはしない方が良い。

    • 518^^ * ◇의 exrbfoxtip2017/07/01(Sat) 06:09:13ID:k4MTI0ODM(3/3)NG報告

      >>517말바꾸지마.

    • 519流狼2017/07/01(Sat) 07:10:43ID:QxOTQ0NzA(1/1)NG報告

      「中国が分裂したら、朝鮮南北が統一する」って思ってたけど
      他のスレで、検討してたら、
      「中国が分裂したら」、中国は、islみたいになるから、半島、それどころじゃないや(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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