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의 역사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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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노무현2017/01/03(Tue) 19:12:59ID:E4NzMxOTQ(1/1)NG報告

      먼저 "일제는 악랄한 수단으로 조선의 토지를 약탈했다"고 외치는 한국 교과서와 달리 대만의 교과서는 일본이 도입한 토지소유 제도의 합리성을 강조하고 있다.

      淸領時期,臺灣土地所有權關係複雜。日治以後,總督府針對已墾農地與山林原野,先後進行土地與林野調査,以便確定徵租對象,增加田賦收入,進而保障土地交易安全。此外,更趁機將大批未登記所有人的林野收歸國有,轉賣給資本家,籍此吸引投資或設立企業。(p. 78)
      청나라 시절 대만의 토지소유 관계는 복잡했다. 일본시대가 되며 총독부는 이미 개간되고 있었던 농지와 산림, 벌판에 대하여, 잇따라 토지, 임야조사를 실시했다. 그래서 징세 대상의 확정을 쉽게 하고 세입을 증가시켜 토지거래의 안전성을 보증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밖에 소유자가 등록되지 않은 임야가 있으면 국유지로 접수했고, 그것을 자본가에게 전매함으로써 투자나 기업 설립을 유도했다.


      한국 교과서가 철도, 도로, 항만등 산업기반 정비를 "대륙침략을 위한 발판"이라고 애써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반면 대만 교과서는 긍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淸陸上運輸方面,基隆到高雄間的縱貫鐵路於1908年全線通車。糖廠出資鋪設的鐵道ヽ聯絡各城鎭的公路也陸續完成,使得臺灣島內的人員往來與物資運輸更加便利。對外港口方面,爲了聯絡日本內地與東南亞地區,分別擴建基隆港與高雄港,臺灣因而成爲往來東亞的重要中繼站。或設立企業。(p. 79)

      육상교통면에서는 기룽에서 가오슝으로 이르는 철도가 1908년에 개통했다. 제당회사가 출자해서 부설한 철도나 도시간을 연결하는 간선도로도 잇달아 완성되고 대만도내 왕래와 물자 수송은 더욱 편리해졌다. 해상수송면에서는 일본 내지나 동남아 각지와 연락하기 위해서 기룽항과 가오슝항이 각각 확장되어 대만은 동아시아 왕래의 중요한 중계점이 되었다.

      청나라 시절 대만의 공권력 소재는 분명하지 않았고 사회 치안도 좋지 않았다. 일본시대에 들어가며 총독부는 경찰과 보갑(保甲)을 통해서 질서유지에 노력하고 범죄를 방지했다. 또 학교 교육과 사법 제도가 확립되어 대만사람들 사이에 준법의 습관이 점차 양성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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