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연호 사용을 우리나라가 비판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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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名無し2019/05/04(Sat) 16:21:30ID:A5NTI0MzI(1/1)NG報告

      비판 대상은 제국 시절부터 사용된 연호입니다. 히로히토의 즉위 이후 사용한 연호 '쇼와'는 그 자체가 군국주의의 상징이었습니다. 히로히토 일왕은 태평양 전쟁 개전을 결정했었죠.

      미군은 종전 이후에 일본에게 군국주의 색채가 짙은 연호를 폐지하라고 했습니다. 그에 따라 일본의 연호가 실질적으로 폐지되지는 않았으나, 법적 근거가 상실되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2차대전 후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고 황실전범이 폐지되면서 연호 사용의 법적 근거가 상실되었으나, 1979년에 다시 법제화되어 모든 공공기관에 제출되는 서류에는 연호를 쓰도록 규정되었습니다.

      맥아더를 위시한 미군정은, “일본을 어떻게 약화시킬까, 일본이 다시 재기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정책의 전부였다”라고 인터뷰에서 회고했던 적이 있습니다.(NHK, スペシャル 戦後70年 ニッポンの肖像-政治の模索-第1回 保守 二大潮流の系譜 , 2015.7.18.)
      종전 이후 30년이 이상 元號 사용은 법제화되지 않아, 西紀와 元號 중 사용자가 임의로 선택해 썼습니다.

      그러다 일본회의의 前身 일본청년협의회가 元號를 일본의 공식 연호로 기록할 것을 법제화하려고 한 시도가 바로 '元號 법제화' 운동입니다. 일본회의는 미군정의 정책에 대해 불신감을 갖고, 그런 체제의 소멸을 정치적 사명으로 삼았던 단체입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연호 부활 시도였고, 椛島有三에 의해 1968년부터 1979년까지 元號 법제화, 즉 연호 부활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연호 부활 운동을 총괄한 세력이 현재 일본 우익의 총본산 '일본회의'입니다. 일본 우익들이 과거의 영광을 되살리자며, 결국 1979년에 연호를 법제화시켰습니다.

      '令’는 주로 명령을 의미하는 독재적 뉘앙스를 띠고 있습니다. 그래서 도쿠가와 막부의 통치가 끝날 무렵인 1860년대에 이미 연호로서 거부당한 적이 있습니다. 도쿄 중앙대 중국철학 교수인 水上雅晴는 '令'의 강력한 뉘앙스 때문에, 令和가 매우 긍정적이지는 않다고 술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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