もう一つヒント、日本と韓国が同じ国であった場合、どちらに王を置きますか?
>>950에도시대는 1300년뒤의 일인데... 그때의 일본이야 당연히 훌륭하다.
>>950
넷우익,니트 쪽바리는 아직도 말을 잘 이해하지못하는 모양ㅋㅋㅋ
수만명이 한 척에 탄다는게 아니라
일본은 당시에 그럴정도의 수백척의 선박을 지을 기술이 되지않았다고
때문에 중국까지 가는건 불가
애초에 중국까지 가는게 가능했다면 왜처음부터 중국과 교류하지않았던거야?
중국으로 갈때 백제 배에 타고 갔잖아?
일본사신의 모습>>952
>4世紀の隋の記録を見ると、倭は骨矢印を作成し木の鎧を着るという話が出てくる。
それは知らなかった。
詳しく教えてほしい。>>954 기록으로는 중국측 자료가 있고. 봉수통수법이라는 백제의 도로 교통망정비와 교류정비의 공식법이 존재한다. 백제의 수도 부여에는 운하공사의 유적이 존재한다. 백제가 중국과 교류하기 위해서는 고구려를 통해서 하거나 바다로 해야했다. 그러나 4세기에 백제의 기습공격으로 고구려왕이 왕성함락과 함께 전사한다. 급격히 나빠진 백제 고구려관계로 인해서 바다를통해서 중국과의 교류를 직접하게 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372년부터 621년까지 서해를 건너 중국에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어 조공했다는 기록이 있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백제가 육로를 이용하지 않고 바닷길을 택한 것은 고구려가 육로교통을 막았기 때문이다. 제21대 개로왕 18년(472)에는 고구려의 침공을 막기 위해 원군을 청하러 북위(北魏)로 사신을 보낼 때도 고구려가 막아 육로로 가지 못하고 서해를 건너갔다는 기록도 있다. 더불어 백제가 일찍부터 바닷길을 개척할 수 있었던 것은 항해술과 해양선을 만드는 조선기술이 아울러 발달했기 때문이다.
일본으로간 왕인박사가 타고 대한해협을 건너갔던 떼배인 `티우`는 고증에 의하면 직경 30cm의 삼나무 11개를 엮어 만든 길이 약 7m에 너비 약 4m, 높이 1.5m에 역시 나무로 엮은 평상을 위에 설치하고, 너비 3m에 높이가 3.3m인 황포돛 1개를 달아 노를 저어 가는 뗏목배였다. 왕인박사는 이 배를 타고 전남 영암 대불항 근처에서 출발하여 완도-보길도-고흥 앞바다를 지나 대마도 남단을 거쳐 일본 큐슈 연안으로 들어가 후쿠오카 남쪽 가라쓰 항에 상륙했을 것으로 사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사학자들의 추정이란 상륙지점의 추정을 말한다.
백제는 남조에도 여러곳에 무역거점과 백제의 거점을 만들었다. 이를 통해 동맹국가인 남조와 연합하여 북조와 전투를치루기도 한 국가다.명나라 사기 <동서양고> 중 범례조를 보면, 나침반은 원래 중국에서 발명되었으나 이를 선박항해용으로 사용한 것은 백제의 해민들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인들은 나침반을 이용하는 ‘침경항복’이라는 새로운 항해술을 개발해 이용했다. 이것이 바로, 방향을 잡는 ‘곤신침(坤申針)’과 거리를 계산하는 ‘갱’, 수심을 재는 ‘탁’이라는 항법이라고 중국고사기인
<무비지> 중 정화항해도(鄭和航海圖)와 엔닌의 일기는 기록하고 있다.
백제의 해민들은 노와 키 그리고 돛 달린 바닷길 전용 해양선을 1세기 중엽부터 만들어 탔던 듯하다. 백제의 해양선은 중국의 배와 달랐다. 우선 노와 키가 다르다. 중국의 배는 노를 당기는 반동으로 물을 밀어 가기 때문에 큰 힘이 필요해 배 양쪽에 많은 노공(櫓工)이 필요했다. 마치 로마시대 갤리선과 비슷한 해양선이었다. 따라서 중국의 노는 도 또는 즙이라 하여 사람의 힘이 많이 필요한 비능률적인 도선이었다. 반면 백제의 노는 끝을 스크루형으로 회전시켜 물을 저어 가는 능률적이고 과학적인 노선이어서 사람의 힘이 크게 필요하지 않았다.
배의 방향을 잡는 키 역시 달랐다. 백제의 것은 배의 뒤꽁무니에 고정시켜 좌우로 회전하는 전용키였지만 중국의 키는 노인 도를 사용하거나 배 한쪽의 도들을 쉬게 하여 방향을 틀었다. 이처럼 백제의 배는 바다를 건너기에 알맞은 순수 해양선이지만 중국의 배는 주로 양자강 같은 중국대륙 내 여러 큰 강에서 사용하는 도강선이라, 속도가 느리고 무거워 바다용으로는 적합하지 않아 백제의 해양선을 따라 잡지 못했다.>>962
그것에 대해 많은 말들이 있었는데 너희를 뜻하는 '왜'는 아니라는게 정설
심지어 이미지만 봐도
신발도 안 신는 사람이 신발을 신는사람을 식민지 삼는게 가능?
오로지 중국의 기록에만 의존하는게 쪽바리의 실태 ww>>967 뭐가 괴롭다는건지 ㅋㅋㅋ 백제또한 한국인데?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 500년간 싸우면서 중국대륙의 삼국과 같은 다른의미의 동질감이 형성됐다. 최종결전인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하나가되어 한반도를 지켜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971
철 얘기관련해서는 니얘기가 맞다
철생산지인 가야와 왜는 엣날부터 교역을 많이했다.
일본은 4c에 철을 쓴것이 맞다>>976 아무도 倭를 속국으로 했다고 말을 안했다만? 그런걸 보고 쉐도우 복싱이라고 한다 ㅋㅋㅋㅋㅋㅋ 일본인들은 어지간히도 쉐도우 복싱을 잘한다. 복싱을 좋아하는 민족
삼국사기 시절에 여전히 화랑세기와 같은 신라의 사료와 , 백제, 고구려의 사료가 남아있었다고 한다. 사실 이것은 조선시대까지 있었겠지만. 조선왕조말기에 사료가 많이 분실되었다.
>>977
쪽바리야 야마토정권에게 지배당한게 아니라 문물을 전해준거야
그 당시 일본의 기술력으로는 불가능해
백제 승려들이 일본으로건너가서 쇼토쿠태자를 가르치는 스승이 된 시점에서
아까부터 귀막고 눈막고 무슨말을하는거야대체wwwwwwwww
눈이 있으면 글을 읽어라. 똑같은 말 반복하는 앵무새 새끼인가
야마토가 백제땅을 지배한 증거를 가지고와知りたく無い、知っていても認めたく無い事実はなかったことにしたい、まともな歴史資料もない貧国の朝鮮人と歴史について語っても無意味だし、時間の無駄w
>>984
일본은 당대부터 꾸준히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가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라는 해석을 밀었지만 한국이나 북한 학계는 이를 부정해왔다. 정인보의 경우는 '왕의 훈적을 나열한 비에서 유독 고구려에 불리한 기사를 실을 까닭이 없다'는 이유로 의도적인 생략이 있는 것으로 보고, 오히려 주어를 고구려에 두어 '왜가 신묘년에 침공하니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토벌하였다'는 식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저 문장의 앞에는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라는 문장이 나온다. 즉 정인보식으로 해석하면 '백제와 신라는 원래 속민으로 조공하고 있었다.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왔기에 (고구려가) 백제를 격파하고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혹은 왜를 격파하고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라는 뜻이 된다. 맥락상 왜가 오자 박살내고 백제와 신라를 좀 더 낮은 예속 단계였던 속민에서 종속국 수준인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전략적으로 볼 때도 왜가 백제와 신라를 '깨뜨리고' 신민으로 삼았다는 해석이 납득이 안 가는 게, 강대한 고구려가 남하하고 있는 시점에서 신라뿐만 아니라 동맹 관계였던 백제까지 공격해서 신민으로 삼는 것은 삼국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짓이다. 하지만 이후에도 백제와 왜는 멀쩡히 협력관계를 유지한다.
읽고 반박부탁드립니다 wwwwwwwwwwwww조공을 하고서 도대체 무슨 내정을 간섭을 했다는 건지? 조공, 책봉으로 맺어지는 천하는 무한히 변하는 天道를 인간세상에 재현한다는 시스템이다. 주나라가 그 모범이다. 사마천이 사기에 기록할때 이러한 인식이 잘 나타난다. "항상 올바르고 정의로운 天의 법도란 알 수 없다. 도적 강도인 도척이 만수무강하고 백이 숙제와 같은 義를 아는 자들은 산에서 고사리를 캐먹다 죽었다." 이런 책봉 조공의 천하에서 천자는 天을 상징하기에 天을 중심으로 천하관 구축을 하기때문에 조공 책봉을 하는 것이다. 다만, 그것은 형식적인 것으로 그것을 통해서 교류를 하고 政敎禁領이라는 내정, 외교에 대한 간섭은 일채 배재되는 것이 당시의 상식이다. 그저 명분상의 조공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적어도 속국이라고 하려면 일본제국이나 원나라 정도는 되야지 속국이라고 할 수 있다.
>>983
口で喚くだけなら、資料の無い貧国人でも出来るからなwww.>>990
韓国の歴史学とは、事実や根拠を必要とする実証的研究の手法を欠いた一種の倫理学な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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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韓歴史共同研究(第一回:2002-2005 第二回:2007-2010)が行われています。
そのどちらにも出た人に古田博司(筑波大学教授)氏の以下の発言からお察しください。
古田: 日韓歴史共同研究委員会も似てますよ。‥‥日本側の研究者が「資料をご覧になって
くださ」と言うと、韓国側は立ち上がって、「韓国に対する愛情はないのかーっ!」
と、怒鳴る。‥‥さらに、「資料をみせてくれ」と言い返すと、「資料はそうだけれ
ど」とブツブツ呟いて、再び「研究者としての良心はあるのかーっ!」と始まるので
関川: ‥‥先方(韓国人)が実証的歴史事実の積み重ねでは説得されるつもりがないことは
認識しておかないといけない。
関川: 歴史の実証的研究では韓国に勝ち目はないでしょう。事実よりも自分の願望という
か、「かくあるべき歴史の物語」を優先させるようですから。‥‥
古田: 民族的感情を満足させるストーリーがまずあって、それに都合のいい資料を貼り付
けてくるだけなんですね。当然、それ以外の様々な資料を検討していくと、
矛盾、欠落、誤読がいっぱい出てくる。
櫻井: それは韓国の大学の歴史研究者ですか。
古田: イエス。これは韓国の伝統的な論争の流儀であり、思考パターンなのですね。李朝時
代の両班の儒教論争も、みなこれですから。要するに「自分が正しい」というところ
からすべてが始まる。実はこの「自分が正しい」という命題が実証不可能なんです。
この思想が突出したものが、北朝鮮の主体思想にほかなりません。
櫻井よしこ・関川夏央・古田博司「韓流“自己絶対正義”の心理構造」
(文藝春秋『諸君!』2006年4月号 69~70頁)なんで韓国人って歴史を知らないの?
>>988
시끄럽다 쪽바리야
자신의 주장을 펴려면 남의 주장도 일정부분 받아들일 것
일본이 전 국토가 황폐해졌던 시기는 전국시대뿐
그것도 영주와 영주의 싸움으로 일반농민은 건드리지않았다는 모양三国史記 巻25 腆支王
或云直支 梁書名映 阿莘之元子 阿莘在位第三年 立爲太子
六年 出質於倭國
十四年 王薨 王仲弟訓解攝政 以待太子還國 季弟碟禮殺訓解 自立爲王 腆支在倭聞訃 哭泣請歸 倭王以兵士百人衛送 旣至國界 漢城人解忠來告曰 大王棄世 王弟碟禮殺兄自王 願太子無輕入 腆支留倭人自衛 依海島以待之 國人殺碟禮 迎腆支卽位 妃八須夫人 生子久尒辛
百済の王子は、AD390年代に倭へ人質に派遣されている。
390年代時点で、明確に倭>百済の関係だった事は間違いない。
もし仮に、369年時点で百済>倭だったとして、20年でひっくり返るだろうか?>>992
왜 쪽바리는 끊임없이 선동,날조해?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불가능?
백제를 지배했다는 물적,사료 증거를 가져와>>990 광개토 비문에 대해서는 앞에서 몇번이나 얘기했다.. 제발 앞 코멘트나 보고 얘기를 하자.
일본인은 어째서 역사를 모르는건가?
4세기에 뼈화살과 나무갑옷을 입던 미개인들인 일본이 백제 신라가 탐나는것도 이상하지 않다 ㅋㅋㅋㅋㅋ
부러워한다고 해서 도둑질은 나쁜것이다 일본인들 ㅋㅋㅋ 앞의 코멘트들을 잘 읽어보고 역사를 배워라
ㅋㅋㅋ
高句麗をも凌駕した古代日本の国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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