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중화의 판단근거는 무엇인가? 중화와 夷狄을 판별하는 구분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게 된다.
첫째. 지역적 기준 (중원)
둘째. 종족적, 혈통적 기준. (漢族)
셋째. 문화적 기준. (주나라의 왕도정치와 예악문물로 대표되는 유교 문화의 보전하는 국가 집단)
그러나 중화를 판단하는 당대의 가장 큰 기준은 다름 아닌 문화적 기준이었다. 즉, 중화와 夷狄의 판단 기준은 거주하는 지역과 민족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고 유교적 행동규범과 정치제도의 실행 여부에 따라 판단되었다.
이처럼 화이론에서 주목되는 점은, 중화와 夷狄을 비교하며, 우월성을 따지고 있는 와중에도 오랑캐가 중화로 변모하는 가능성을 결코 부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맹자 역시 '夷狄의 땅' 초나라에서 태어나 공자의 가르침을 받았던 陳良을 언급하면서 用夏變夷의 논리를 도출해내고 있었다.
이러한 화이론의 중화 구별은 당나라에 와서 더욱 발전하였다. 당대 최고의 학자 중 하나였던 韓愈는, 춘추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에 대해서, "중국의 제후라도 夷狄의 예에 따르면 夷狄으로 간주하고, 夷狄이라도 중화의 경지에 나아가면 중화로 간주한다." 라고 규정했다. 韓愈의 이러한 주장은 중화와 夷狄이 예법의 준수 여부에서 확인되는 문화적 개념임을 재확인 하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계속 쓰겠습니다.)왜 게임하고 있는데 스레가 올라간거야.
기다려줘.- 3
名無し2017/10/26(Thu) 21:35: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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ホントに無駄だな
今日の夕飯の話の方がまだましだ
キムチか?여진족의 금나라에 의해 중국 북부 지역을 상실했던 송나라 시대, 남송의 학자 朱熹 역시 胡安國에 의해 정립된 北宋 對 화이론의 기본 인식을 그대로 공유하고 있었다. 그는 춘추에 담겨진 공자의 亂臣賊子에 대한 왕도의 숭상과 패도의 배격, 그리고 중화와 夷狄의 명확한 구분 기준 3가지를 제시했는데, 그 가운데 중화와 夷狄의 구분은 다음과 같이 천명하였다.
"秦나라는 포악함으로 인해 時와 書를 불태우다가 결국 망했다. 漢나라는 그러한 폐단을 거울삼아 관대한 덕을 숭상하고 經術之士를 존중하였기에 많은 유학자들을 배출했다. (중략) 그러나 魏晉의 사류들은 방탕하게 변하여 浮虛함을 숭상할 뿐, 예법이 없었으니, 마침내 그들은 예법이 없었던 탓에 夷狄과 다를것이 없었다."
朱熹는 이처럼 漢代의 훈고학의 흥함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나, 그들은 예법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여 魏晉 시대에 이르러서는 夷狄과 다르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비판했다. 朱熹의 이러한 설명은 중화문명의 실체가 출신 지역이나 종족이 아니라 유교의 핵심교리인 예의의 실천 여부에 따라 달려 있다는 고대 중국 화이론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을 계승하였다.
이처럼 예의로 집약되는 유교문명을 華夷분별의 기준으로 삼았던 문화적 華夷論은 이후 송나라의 정치제도, 문물 제도를 국가의 기본으로 삼고, 朱熹의 학문을 정신적인 근거로 삼고자 계획했던 조선의 성리학자들, 특히 임진왜란과 명나라 중심의 국제질서가 붕괴하는 과정을 겪어야했던 17세기의 조선 성리학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우경섭, 조선 중화주의의 성립. (유니스토리, 2013)재밌게 읽었다.
어쩐지 조선의 소중화주의는 말이야.
동로마 제국 멸망 이후 자신들이 로마의 적합한 후계자라고 주장하던 나라들을 보는 것 같구나.
오스만 제국은 말할 것도 없고 루마니아, 조지아, 러시아... 등등내가 존경하는 중국은 송나라,명나라
그 외 모두는 일본과 같은 오랑캐, 문화적,사상적으로 존경할것이 없는どうでもいいけど、女真族って漢字だけでみるとアマゾネスみたいなのを想像してしまうw
>>1
それなりに、面白く読んだ>>6
동로마 멸망 이후 제3의 로마 경쟁과 중화사상은 좀 다르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하지.
소중화의 다른 예시로 베트남이 있다. 중세 이후 베트남이란 국가 형성 과정은 정치적으로는 중원의 통일 제국에서 철저한 독립을 추구하되, 문화적,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오히려 중화 문명의 내재화가 진행되었다.
베트남 조정을 베이징을 비롯한 중원의 그것과 대비 되는 남조라 칭했고, 참파, 크메르 같은 인근 나라들을 정벌하며 유교를 비롯한 중화 문명의 전파를 명분으로 삼았다. 과거 제도와 종묘사직에 지내는 제사 또한 일찍부터 수용하여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정복한 참파나 크메르쪽에 중국식 작위를 내리며 외왕내제식 통치를 했다고 알고 있다.
화이론적 세계관에서 세계의 중심은 언제나 중화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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