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3
"(신라인들은) 집을 비단과 금실로 수놓은 천으로 단장한다. 밥을 먹을 때 금으로 만든 그릇을 사용한다."
966년, 아랍사학자인 알 마크디시는 <창세와 역사서(Kitabu'l Badi Wa'd Tarikh)>에서 신라를 이렇게 표현했다. 마크디시 뿐이 아니다. 9~12세기 사이 아랍의 지리학자들은 한결같이 신라를 '신비의 이상향'이자, '황금의 나라'로 표현한다.
"신라의 공기가 순수하고 물이 맑고 토질이 비옥하다. 불구자를 볼 수 없다. 만약 그들의 집에 물을 뿌리면 용연향의 향기가 풍긴다. 전염병과 질병은 드물며 파리나 갈증도 적다. 다른 곳에서 병이 걸린 사람은 그곳에 가면 곧 완치된다.">>610
ペット用は飾りがあって、王侯貴族が普段使う食器には何も装飾がないのか?
朝鮮では王公貴族より、犬の方が上なのかwww>>609
<삼국유사> 황룡사 9층탑 조에 신라의 지장스님이 중국 유학 때 문수보살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전한다.
"너희 국왕은 인도의 찰리 종족 왕인데 이미 불기(記:약속)를 받았으므로 남다른 인연이 있으며, 동이 공공의 족속과 같지 않다.(汝國王是天竺刹利種族 預受佛記 故別有因緣 不同東夷共工之族)"
바로 여기에 나온 찰리(刹利) 종족이 바로 사카족인데 바로 이들이 한 무제에게 패한 휴도왕의 '흉노'족이다.
여기서 '사카족'이란 석가모니의 세속 인연 종족인 석가족을 의미하며 이들은 애초 중앙아시아에서 유목을 하던 스키타이인 중 사카라고 불린 사람들이 남하하여 인도에 정착한 사람들이라는 것. 이 사카족이 남하하여 인도로 들어가기도 하고 천산을 넘어 동쪽으로도 진출하였는데 김일제의 아버지인 휴도왕의 종족이 바로 이들 천산 진출 사카족이라는 것. 그런데 문무왕비의 내용이 사실이라는 증거가 많으니 이에 따르면 신라 이사금 이후 마립간 대부터의 신라왕족은 이들의 후예가 된다는 것.
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0362841#cb>>612
新羅って外国に勝った事あるの?歴史を冒涜する韓国人が歴史的な物の価値は絶対分からんと思うよ!
>>622
Wwwww>>621
違うんだ、失礼した。>>627
“일본은 극동에 멀리 떨어져 있고 사면이 큰 바다로 둘려 있어, 외국의 군사가 들어갈 수가 없다. 단지 그 연대기(年代記)를 보면, 왜황 응신(應神) 22년에 신라 군사가 명석포(明石浦)에 들어왔다고 되어 있는데, 명석포는 대판(大阪)에서 겨우 1백 리 떨어져 있다. 적간관(赤間關)의 동쪽에 한 구롱(丘隴)이 있는데, 왜인이 이를 가리켜 ‘이것이 백마분(白馬墳)인데, 신라 군사가 일본에 깊이 쳐들어오니, 일본이 화친하고 군사를 풀어 주기를 청하여 백마(白馬)를 죽여서 맹세한 뒤에 말을 이곳에다 묻었다.’ 한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응신 12년[22년] 신해가 바로 유례왕 8년에 해당되니, 이 해와는 조금 차이가 있으나 대개 같은 때의 사건인데, 東史(동사)에는 보이지 않는 것은 글이 빠진 것이다.
– 유례왕 8년 신해는 서력 291년임, 신해년은 응신 22년임
안정복 동사강목 제2상>>629
일본은 아득하게 하늘 동쪽에 있어 사방이 큰 바다이므로 외국 군사가 들어가지 않았다. 다만 그들의 ‘연대기’를 보니, 소위 ‘응신천황(應神天皇) 22년[서력 291년]에 신국(新國) 군사가 왔다.’ 하였고, 딴 본(本)에도, ‘신라 군사가 명석포(明石浦)에 들어왔다.’ 했다. 명석포는 대판까지 겨우 1백여 리다. 적간관(赤間關) 동쪽에 구롱(丘壟) 하나가 있는데, 왜인들이 가리키면서, ‘이것이 백마분(白馬墳)이라는 것인데, 신라 군사가 일본에 깊이 들어왔으므로 일본 사람이 화친하기를 청하여 백마를 잡아 맹세하고 말을 여기에다 묻은 까닭이다.’ 하였다. 이세(李稅)의 일을 추적(追跡)해 알았으나 밀교(密敎 임금의 비밀 전교(傳敎))에 관계된 것이므로 별도로 계초(啓草 계본(啓本)의 초고)를 만들고 여기에다 다시 갖추어 기재하지 않는다.
日本邈在天東。四面大海。外兵不入。但見其年代記。其所謂應神之二十二年。新國兵軍來。一本則曰。新羅兵入明石浦。石浦距大坂纔百有餘里。赤間關之東有一丘壟。倭人指之曰。此是白馬墳。新羅兵深入日本。日本人請和解兵。刑白馬以盟。埋馬於此故云。跟尋李稅之事。係是密敎。故別具啓草。不復具載於此。
부상록(扶桑錄) [석문(石門) 이경직(李景稷)] (조선 광해 9년에 에도막부를 방문한 통사관 이경직이 당시 열람한 일본 비장 도서의 하나인 '일본연대기'를 부상록에 옮김)
아마 일본연대기라는 책의 내용을 복사한것 같다.>>630
当時(西暦291年)の日本に明石浦ねーからw
韓国がまた捏造してるw「イ・ギョンジクが当時閲覧した日本脾臓図書の一つである「日本年代記」を浮上録に移した」
いつもの韓国捏造w>>633
そもそもイ・ギョンジクの捏造だ>>634
뭐 날조라고 생각하고 싶으면 그렇게 생각하면 좋다.
조선시대 기록이고 별로 강요하지않는다.韓国は自国の都合よく翻訳捏造する。
한가지 의미있는것은 백마는 신라에서 왕족이 탈수있는 말이고 국가간의 서로 중요한 약속을 할때에는 그 백마를 죽여서 약속을 하는
慶尚北道議員「日本の歴史歪曲に対馬返還の主張で対応すべき」
https://kaikai.ch/board/116342/>>640
나도 모른다.>>631
「西暦291年に日本に」
訂正 「西暦291年の日本に」金冠が好きなのは歴史とか知的なものじゃなく、「日本にマウントとれそうな何か」でしかないからなぁ
まともに話しても単純に時間の無駄。>>643
「白馬」ではないが、「白鳥」陵と呼ばれる古墳は
存在するよ화주(火珠)란 불을 일으키는 구슬이란 뜻으로, 수정빛의 바둑알 모양인데 햇빛에 갖다 대고 솜을 가까이에 놓으면 그 솜이 탄다고 전해진다. 이 화주는 볼록 렌즈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광학회의 설명에 따르면 현재까지 발견된 우리나라 최초의 안경이기도 하다.안경의 역사 따라서 이 유물은 굳이 선덕여왕의 전설의 도구가 아니라 할지라도 일단 7세기 이전부터 신라인들이 수정 렌즈와 광학기술의 원리를 이해하고 있었다는 중요한 증거 자료가 된다. 또한 기존에 우리나라에 전해지던 가장 오래된 수정렌즈 공예품은 1590년경 제작된 학봉 김성일의 애체(靉靆), 즉 수정 안경인데 이 화주는 깎은 수정면의 다듬기나 공예기술적인 측면에서 천여년 더 이후의 작품보다 더 정밀하여 당시 신라의 공예술이 가히 현대 기술과도 비견될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수준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기록상으로 중국에서는 11세기부터, 유럽에서는 13세기부터 렌즈를 사용했으며, 최초의 안경은 1286년 이탈리아의 피사의 살비노 다르마트(1258~1312)와 피렌체의 수도자 알레산드로 다 스피나(1313년 사망)가 발명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이 렌즈는 그보다 500~700여년 더 앞서 만들어진 한국의 렌즈로, 한국광학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신라 금관및 장식품을 올리는 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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