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박물관 "발해는 당나라 지방정권…융합 거쳐 중화민족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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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ㅁㅅㅇ2021/04/18(Sun) 21:38:16ID:I4MzgzMzY(1/1)NG報告

      최근 한국과 중국간 역사·문화 분야 논란이 이어지는 가운데, 중국 측이 한국 고대사인 발해(698~926년)에 대해 자국 역사상 지방정권 정도로 서술하고 있는 것으로 18일 확인됐다.

      과거 발해가 있었던 중국 지린(吉林)성의 지린성박물관은 '발해국은 말갈족이 주체가 돼 건립한 당나라 시대의 지방정권'이라고 규정하면서 '200여년의 민족융합을 거쳐 최종적으로 중화민족 대가정의 일원이 됐다'고 기술했다.

      https://www.yna.co.kr/view/AKR20210416131300097?input=1195m

    • 16名無し2021/04/18(Sun) 23:43:30ID:E0NTcwOTQ(1/1)NG報告

      >>14
      「別種」
      他の種類

      日本ではこう学ぶけどな

    • 17名無し2021/04/18(Sun) 23:45:09ID:g5MDg1MzY(4/19)NG報告

      《新/舊唐書》에서舊唐書》에서, 乞乞仲象이 營州를 탈출할 때 乞四比羽와 더불어 거느렸던 집단이, 靺鞨人들이 아닌 고구려의 유민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도, 乞乞仲象이 靺鞨系가 아닌 순수 고구려系 사람이었거나, 설령 그가 靺鞨系였어도, 이미 靺鞨人과 별도로 고구려의 유민들을 직접 통솔했을 정도로, 고구려에 동화된 사람이었을 가능성에 힘을 실어준다.

      "萬歲通天年,契丹李盡忠反叛,祚榮與靺鞨乞四比羽各領亡命東奔,保阻以自固。"
      (萬歲通天年(696년)에 契丹의 李盡忠이 반란을 일으키자, 大祚榮은 靺鞨의 乞四比羽와 함께, 각자 망명자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달아나서. 스스로를 굳게 지켰다.)

      《舊唐書》에는, "각자 망명자를 거느리고"라고만 적혀 있어서, 營州에서 탈주할 당시에 乞乞仲象 - 大祚榮 계열 지도부의 통솔을 받았던 세력의 정체가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 18名無し2021/04/18(Sun) 23:55:52ID:g5MDg1MzY(5/19)NG報告

      "萬歲通天中,契丹盡忠殺營州都督趙翽反,有舍利乞乞仲象者,與靺鞨酋乞四比羽及高麗餘種東走,度遼水,保太白山之東北,阻奧婁河,樹壁自固。"
      (萬歲通天 중에 契丹의 李盡忠이 營州 都督 趙翽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자, 舍利 乞乞仲象이라는 사람이 靺鞨의 추장 乞四比羽 및 고구려의 유민과 함께 동쪽으로 달아나서 遼水를 건넜는데, 太白山의 동북쪽을 차지하고, 奧婁河를 막아 성벽을 쌓아서, 스스로를 굳게 지켰다.)

      《新唐書》에는 보는 바와 같이, 그 대상이 "高麗餘種"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공동 지도자였던 乞四比羽가 "靺鞨酋"으로 나와 있다는 점에서, 乞乞仲象은 고구려의 유민을, 乞四比羽는 말갈족을 이끌었을 가능성도 있다.

      《舊唐書》의 "各領"라는 표현을 감안하면, 충분히 개연성이 있는 해석이기는 하다. 아무튼 분명한 것은, 중국 正史에서 乞乞仲象이 통솔한 것으로 확인되는 집단은 어디까지나 고구려의 유민이었지, 靺鞨은 아니었다는 점.

      위의 기록들에 대한 합리적인 해석은,
      첫째, 乞乞仲象과 乞四比羽가 각기 다른 고구려의 유민 집단을 이끌고 營州를 탈출.
      둘째, 乞乞仲象은 고구려의 유민 집단을, 乞四比羽는 말갈족 집단을 이끌고 營州를 탈출.
      이 둘 중에 하나라고 봐야 한다. 乞乞仲象이 말갈족 집단을 이끌고 營州를 탈출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新唐書》에서 乞四比羽에 대해서만 굳이 별도로 "靺鞨 추장"이란 표현을 사용한 것은, 乞乞仲象이 그와 같은 신분이 아니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설령 乞乞仲象이나 大祚榮이 靺鞨 출신이었어도, 이들은 고구려의 계승을 내세우며 발해를 건국했다.
      그만큼 스스로 고구려人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므로, 종족과 계승성 관련 문제를 연결하는 것은 사실상 무의미 하다고 할 수 있다.

    • 19名無し2021/04/19(Mon) 00:01:59ID:cwNzExODg(6/19)NG報告

      《通典》에서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발해는 본래 粟末靺鞨이다. 그 우두머리인 大祚榮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震旦이라고 불렀다. 先天 年間(AD 712년)에 비로소 靺鞨이라는 국호를 버리고, 오로지 발해라고만 불렀다. 開元 7년(AD 719년)에 大祚榮이 사망하고, 諡號를 高王이라고 하였다."

      《宋史》 定安國傳
      "定安國本馬韓之種. 爲契丹所破 保其西鄙."
      (定安國은 본래 馬韓의 한 종족이다. 契丹에게 攻破되니, 그 西鄙를 지켰다.)

      渤海 부흥세력이었던 定安國이 《宋史》에서는 馬韓의 한 종족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삼국시대부터 고구려의 별칭으로서 韓/三韓/馬韓/弁韓 등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흥미로운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백제나 신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

    • 20名無し2021/04/19(Mon) 00:08:15ID:cwNzExODg(7/19)NG報告

      《金史》에서 등장하는 渤海 관련 기록이다.

      "金之先,出靺鞨氏。靺鞨本號勿吉。勿吉,古肅慎地也。元魏時,勿吉有七部:
      曰粟末部、曰伯咄部、曰安車骨部、曰拂涅部、曰號室部、曰黑水部、曰白山部。
      隋稱靺鞨,而七部並同。唐初,有黑水靺鞨、粟末靺鞨,其五部無聞。粟末靺鞨始附高麗,姓大氏。>李績破高麗,粟末靺鞨保東牟山。後爲渤海,稱王,傳十餘世。"

      金의 先祖는 靺鞨氏에서 나왔는데, 靺鞨은 본래 勿吉이라고 불렀다. 勿吉은 옛날 肅慎의 땅이다.
      元魏 당시 勿吉에는 7部가 있었는데, 말하기를 粟末部/伯咄部/安車骨部/拂涅部/號室部/黑水部/白山部이다.
      隋가 靺鞨라고 불렀는데, 7部는 모두 같다. 唐 초기에, 黑水靺鞨과 粟末靺鞨이 있었는데, 그 5部는 듣지 못했다. 粟末靺鞨은 처음에 高麗에 속하였는데, 姓은 大氏다. 李績이 高麗를 깨뜨리자, 粟末靺鞨은 東牟山을 차지했다. 그 후에 渤海를 다스리고, 왕을 칭하였으며, 十餘世를 전하였다.

    • 21名無し2021/04/19(Mon) 00:12:48ID:AyNjY4OTk(3/5)NG報告

      そもそも大祚栄の一族が高句麗役職についていないし、靺鞨として高句麗の支配を受けていただけだろう。
      さらに、官職も含めて唐の政体を模している上、代々唐の冊封を受けている訳だし。

      てか、李氏朝鮮の頃から、渤海を朝鮮史に含めるかどうか、議論が別れていたと聞くけど、統一見解になったのかね。

    • 22名無し2021/04/19(Mon) 00:14:38ID:cwNzExODg(8/19)NG報告

      다음으로는 한민족의 기록이다.

      이 중에서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崔致遠이 쓴 글이다. 그가 唐의 황제에게 올린 글인 "渤海가 신라의 윗자리에 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음을 사례하는 表(謝不許北國居上表)"에서,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崔致遠이 이 글을 쓰기는 했는데, 신라의 왕이 唐의 황제에게 보내는 국서의 형식이다. 따라서, 당시 신라의 공식적인 견해라고 봐도 무방한 것이다.

      "臣謹按渤海之源流也。句驪未滅之時。本爲疣贅部落。靺羯之屬。寔繁有徒。是名栗末小蕃。嘗逐句驪內徙。其首領乞四羽及大祚榮等。至武后臨朝之際。自營州作孼而逃。輒據荒丘。始稱振國。"
      (渤海의 源流는, 高句麗가 망하기 전에는 본래 사마귀만한 部落으로서 鞅鞨의 족속이었는데, 이들이 번영하여 무리가 이뤄지니까, 이에 粟末 小蕃이란 이름으로 항상 고구려를 좇아서 內徙하더니, 그 守令 乞四羽 및 大祚榮 등이 武后 臨朝 때에 이르러, 營州로부터 죄를 짓고 도망쳐서, 문득 荒丘를 점거하여, 비로소 振國이라고 일컬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渤海의 원류를 鞅鞨이라고 서술하는 동시에, 고구려에 內徙했다고 하여, 渤海의 모체가 고구려의 일부였음도 밝히는 이중적인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 23名無し2021/04/19(Mon) 00:23:20ID:cwNzExODg(9/19)NG報告

      《삼국사기》 崔致遠傳의 '太師侍中께 드리는 편지(上太師侍中狀)' 中,

      "摠章 원년(AD 668년)에는 令公 李勣에게 명령하여 고구려를 격파하게 하고, 安東都督府를 설치하였으며, 儀鳳 3년(AD 678년)에 이르러, 그 사람들을 河南과 隴右에 옮겼습니다. 고구려의 남은 무리들이 모여서 북쪽으로 太白山(백두산) 아래를 근거지로 정하여,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渤海라고 하였습니다."

      발해의 건국 세력을 '高句麗殘孽'으로 표현했다.

      《삼국유사》에서는 〈紀異〉 제1 '鞅鞨·발해' 편에서 발해를 다루고 있다.
      註釋에 인용한 신라의 古記에서는, 大祚榮을 고구려의 옛 舊將으로 서술하고 있으나, 인용자인 一然 본인의 개인 의견(按)으로는, 발해를 鞅鞨의 '별종'으로 간주했다.

      "新羅古記에, 高句麗의 舊將 祚榮의 姓은 大氏로서, 殘兵을 모아서 나라를 太伯山南에 세우고, 國號를 渤海로 하였다고 한다. 以上 諸記事를 보면, 渤海는 靺鞨의 別種인 바, 다만 開合하는 것이 같지 않았을 뿐이다."

      여기서 '별종'이라는 표현을 (중국 학자들의 주장처럼) '혈통적으로 관련이 없는 별개의 집단'으로 보게 될 경우, 渤海는 靺鞨의 '分派' 또는 '후계 집단'일 수가 없게 된다.

    • 24名無し2021/04/19(Mon) 00:33:23ID:cwNzExODg(10/19)NG報告

      이에 대하여, '鞅鞨·발해'라는 篇名을 강조하면서, 신라에서는 발해를 鞅鞨로 인식했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篇名은 어디까지나 고려인이었던 一然이 임의로 붙인 것일 뿐이다.
      그와 별개로 인용한 신라 당대의 기록은 엄연히 大祚榮을 고구려人으로 표현한 만큼, 그러한 篇名을 "신라人들은 발해가 고구려에서 기원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라는 증거로 취급할 수는 없다.

      이는 崔致遠의 '謝不許北國居上表'의 嘗逐句驪內徙 云云과 상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만약에 新羅古記를 '新羅의 古記'이 아니라, 고려시대에 편찬된 신라 역사서의 제목으로 본다면, 이는 고려인들이 발해를 고구려의 후계 국가로 봤다는 증거가 되며, 이는 고려사회에 발해의 원류를 一然의 按과 다르게 보는 시각이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一然이 발해를 鞅鞨 국가로만 보고 고구려와는 무관한 존재로 여겼다면, 기본적으로 高麗의 前史를 다루고 있는 〈紀異〉篇에서 다루었을 리가 없다. 고려인들은 '肅愼-挹婁-勿吉-鞅鞨-女眞'으로 이어지는 퉁구스계의 여러 종족에 대하여, 한번도 동족 관념을 표출한 적이 없었고, 따라서 이들의 역사를 자국 역사의 일부로 취급한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에서도 肅愼·挹婁·勿吉·黑水 등을 다룬 篇目은 없으며, 다만 '鞅鞨·발해' 篇에서 鞅鞨의 前身으로서 언급한 것이 전부다. 그와 같이 肅愼·挹婁系를 철저히 자국의 역사에서 배제했던 고려인이, 鞅鞨을 자국의 역사에 포함시킨 것은, 당연히 발해와의 연관성 때문인데, 그처럼 발해를 자국의 前身 중 하나로 취급한 관념은, 그 나라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의식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성립하기 힘들다.

    • 25名無し2021/04/19(Mon) 00:36:09ID:cwNzExODg(11/19)NG報告

      《高麗史節要》에서의 발해와 大祚榮.

      "발해는 본래 粟末靺鞨인데, 당나라 武后 때에, 고구려 사람 大祚榮이 달아나서 遼東을 지키니, 당나라 睿宗이 渤海郡王으로 책봉하였다. 그 후에 스스로 발해國이라 일컬으며, 扶餘ㆍ肅愼 등 10여 나라를 아울러 전부 차지하고, 문자ㆍ禮樂과 官府의 제도를 세웠다."

      발해는 본래 粟末靺鞨인데, 건국 주체는 고구려에 속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념은 '謝不許北國居上表'에서 나온 발해의 기원觀과 동일하다.

    • 26名無し2021/04/19(Mon) 00:45:47ID:cwNzExODg(12/19)NG報告

      그렇다면, 왜국의 기록은 어떨까?
      발해의 왕 大武藝가 스스로 扶餘의 풍속을 이어 받았다고, 왜국에 표현한 적이 있다.

      "발해 측에서 국서에 스스로를 ‘高麗國王’이라고 칭했다. 그리고 '발해가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扶餘의 풍속을 간직하고 있다(復高麗之舊居 有夫餘之遺俗)'라고 하였다." 《続日本紀》 中.

      발해의 지배층인 고구려系는 少數였고, 피지배층인 靺鞨系가 다수였다는 식의 기록은, 기본적으로 왜국 역사서인 《類聚国史》에 기반을 두고 있다.

      "又傳奉在唐學間僧泳忠等所附書, 渤海國者高麗之故地也. 天命開別天皇七年, 高麗王高氏爲唐所滅也. 後以天之眞宗豊祖夫天皇二年大祚榮始建渤海國, 和銅六年受唐冊立. 其國延袤二千里, 無州縣官驛, 虛虛有村里, 皆靺鞨部落. 其百姓者, 靺鞨多, 土人少, 皆以土人爲村長, 大村日都督, 次日刺史, 其下百姓皆日首領, 土地極寒, 不宣水田,俗頗知書."
      (또한 在唐學間僧 泳忠 등이 덧붙여 보낸 글을 받들어 전하였다. 발해국은 高麗의 옛 지역에서 일어났는데, 天命開別天皇 7년에 高麗王 高氏가 당나라에 의해 멸망했으며, 그 후 天之眞宗豐祖父天皇 2년에 大祚榮이 비로소 발해국을 세웠다. 和銅 6년에 당나라에서 冊立받았다. 그 나라는 사방 2천里이며, 州縣과 官驛이 없으며, 곳곳에 村里가 있는데 모두 靺鞨 부락이다. 그 백성은 靺鞨人이 많으며, 土人은 적다. 모두 土人이 촌장이 되었으며,大村에는 都督, 다음에는 刺史이며, 그 아래는 백성들이 모두 首領이라고 부른다. 토지는 극도로 춥고, 水田이 마땅하지 않다. 자못 풍속에 글을 안다.)

    • 27名無し2021/04/19(Mon) 00:46:40ID:Q5MTgwMzY(1/1)NG報告

      知らん。興味ない

    • 28名無し2021/04/19(Mon) 00:46:56ID:Q5ODY3OTA(1/1)NG報告

      そもそも「朝鮮民族」という定義が、日本や中国などの外国と韓国では異なっているのではないかな?

      韓国では「東夷族」そのものが朝鮮民族だとするような説も頻繁に見られる
      韓国の中高年の人々が「孔子は韓国人」とした根拠が「孔子が東夷族出身だから」だったり

      漢字を捨てた韓国人にはわからくてもしかたないが、「東夷族」という字は「東方に住む野蛮な異民族」というような意味
      複数の民族をまとめて指す表現であり、ひとつの民族を指す言葉ではありません

      そのため、外国には高句麗でさえ朝鮮民族の国ではないとする学者もいるのですよ
      まあ、諸外国でも学者によって「朝鮮民族」の定義が微妙に違っていたりして曖昧なんですけどね

      蛇足ですが、大昔の中国では、なぜか倭人(日本人)は南の方(ベトナムの近く?)に住むと認識されていて、東夷族には含まれていなかったようですw

    • 29名無し2021/04/19(Mon) 00:57:27ID:cwNzExODg(13/19)NG報告

      이 부분만 보아도, 단순히 고구려系가 少數였다는 주장을 확정하기가 쉽지 않다. 어느 시대의 이야기인지, 泳忠(永忠)는 발해에 대해서 얼마나 알았는지, 어느 길을 지나서 왔는지 등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당시 발해의 수도인 上京龍泉府와 왜국으로 가는 東京龍原府의 항구(두만강의 하구 또는 그 부근으로 추정됨)를 연결하는 日本道는, 옛 고구려의 가장 변방으로서 原 고구려人의 비중은 비교적 낮고, 靺鞨을 비롯한 非고구려系 종족이 많이 살았던 지역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唐書》는 龍泉府를 숙신의 옛 땅으로, 龍原府를 濊貊의 옛 땅으로 기록했다.
      肅愼이든, 濊貊이든, 전부 발해가 건국될 시기에 존재했던 종족은 아니었지만, 그의 후손 또는 親緣性이 강한 집단이 거주했다고 보면 될 것이다. 발해 후기의 首都인 上京龍泉府의 위치 자체가 지금의 흑룡강성 일대로서, 새롭게 복속된 집단이었던 黑水靺鞨을 다분히 의식한 입지이다. 본래 발해 초기의 首都는 두만강 유역의 中京顯德府로서, 오래 전부터 고구려人들이 거주하던 지역이었다.

      왜국의 使臣 泳忠는 당연히 日本道를 지났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泳忠가 보았던 발해의 풍경은, 肅愼의 후손일 가능성이 있는 拂涅 靺鞨 또는, 濊貊에 속하는 扶餘·沃沮系가 많이 살았던 豆滿·牡丹江 유역 일대, 즉 발해 동부의 모습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 30名無し2021/04/19(Mon) 01:08:07ID:cwNzExODg(14/19)NG報告

      이와 같이 고구려 유민의 구성 비율도, 大祚榮 시기/文王과 武王 시기/黑水靺鞨을 흡수한 이후 등을 모조리 고려해야 한다. 또한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에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였는지를 추측해야 한다. 이러한 단계로 나가지 못했기 때문에, 《類聚国史》의 내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

      중국의 동북공정의 연구 보고서는, 고구려의 인구가 거의 모두 당나라로 잡혀가서, 과거의 고구려 영역이 무주공산이었을 지경으로 변했다는 수준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발해의 피지배층이 대부분 靺鞨人이었다는 논리에 대하여 가장 크게 반박할 근거다. 상식적으로 한 나라가 멸망한 이후에 모든 피지배층이 적국으로 전부 끌려가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멸망할 당시에 추정되는 고구려의 인구에 대해서도 이견이 존재하지만, 이 사람들을 모두 당나라로 끌고 갈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설령 끌고 간다고 가정해도, 수백만명의 난민들이 갑자기 중원으로 유입되어 엄청난 혼란만 야기된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東프로이센 지역의 독일인들이 모조리 추방당한 사례가 존재하지만, 이는 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다.

      애초에 '靺鞨'이라는 호칭은 당시의 靺鞨人들이 스스로 사용한 호칭이 아니라, 외부에서 편의상 정한 호칭이었을 뿐이다. 고구려 변방의 주민을 부르는 泛稱· 卑稱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崔致遠이 사용한 '渤海靺鞨'이라는 표현도 그러한 비하 의식과 관련되어 있다는 추측도 있다. 崔致遠이 쓴 '謝不許北國居上表'은 기본적으로 발해를 비방할 목적으로 작성되었기 때문에, 신중히 참고할 필요도 있다는 것이다. 고구려와 靺鞨, 양측 집단 모두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국가라면, 당연히 중국의 통일 왕조와 당당히 맞서서 수차례 승리한 고구려보다는, 야만인 취급을 받는 靺鞨과의 연관성을 강조하는 것이, 그러한 목적을 이루는 데에는 유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 31名無し2021/04/19(Mon) 01:20:56ID:cwNzExODg(15/19)NG報告

      당시에 기록된 '靺鞨'에 대해서는, 다방면으로 생각해봐야 한다.
      중화중심의 역사관으로, 대부분의 이민족들은 중국 왕조에서 붙여준 他稱으로 기록되어 있다. 靺鞨의 최초 조상은 肅愼으로, 이들은 秦 이전의 종족이다. 이들이 漢代에는 挹婁였고, 남북조시대 後魏에는 勿吉 그리고 隋·唐代에는 靺鞨로 불린 것이다.

      '靺鞨'이란 종족적인 측면에서, 기록상의 '靺鞨'로 불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구려人과 발해人을 의미하며, 고구려와 다르게 현대에 인식되는 전통적인 '靺鞨'은 흑수말갈을 의미한다.

      현재 중국에서는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발해의 始祖인 大祚榮과 피지배 계층이 靺鞨人이었다고 해서,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大祚榮은 과연 靺鞨人이었는가"에 대한 의문은, (상술한 바와 같이) <舊唐書> 이미 大祚榮을 '高麗 별종'이라고 칭하고 있듯이, 그는 靺鞨系 고구려人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靺鞨'이란, 자칭했던 종족 명칭이 아니라, 唐 또는 고구려의 중심세력이 都城 중심의 시각에서 변방 세력을 편하게 부르는 뜻으로, 이민족의 명칭인 '靺鞨'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왕조시대의 국가관은 주로 首都 중심이었기 때문에, 國內城/平壤城 주민의 입장에서 시골의 사람들을 이민족처럼 靺鞨로 불렀다는 것은, 요즘 서울 시민들이 지방의 사람들을 촌놈이라고 멸시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新唐書>에서 기록된 大祚榮이 粟末靺鞨이란 것도, 그가 현재의 松花江 유역 출신인 시골 사람이란 뜻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 32名無し2021/04/19(Mon) 01:34:31ID:QyNzcyMA=(1/1)NG報告

      【事実】

      今の韓国とは何の関係も無い。

    • 33名無し2021/04/19(Mon) 01:35:52ID:cwNzExODg(16/19)NG報告

      首都 중심의 역사관은 <삼국사기>의 기록에서도 알 수 있다.

      "당나라 황제가 安市城에 진군하여 공격하니, 북부 褥薩 高延壽와 남부 褥薩 高惠眞이 고구려軍과 靺鞨兵 15만명을 거느리고 安市를 구원하려 했다. (중략) 延壽와 惠眞은 그 무리들 36,800명을 거느려 항복을 청하고, 軍門에 들어와 엎드려 절하며 구명을 청하였다. 당나라 황제가 褥薩 이하 官長 3,500명을 추려내서, (당나라의) 내지로 옮기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여 평양으로 돌아가게 하고, 靺鞨人 3,300명은 거두어서 모두 구덩이에 묻어 죽였다." 『삼국사기』 卷21, 高句麗本紀9 上

      여기서 "평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고구려軍이란, 단순히 고구려의 군대가 아닌 평양 사람으로 보는 것이 마땅한데, 만약 저 고구려군이 고구려의 군대를 뜻하는 것이라면, "고구려"로 돌려보냈다고 서술하는 것이 적절하기 때문이다.
      비슷한 사례로서, 敬順王 9년에 신라를 고쳐서 慶州로 했다는 기록을 보면, 신라가 곧 慶州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와 같은 맥락에서 "고구려 = 평양"으로 보았다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발해의 주민은, 발해가 건국되기 30년 전에 멸망한 고구려人들이, 그대로 그 지역의 주민으로서 발해人이 된 것이고, 그 당시에 (黑水靺鞨을 제외한) 靺鞨人이라고 불린 주민들은, 고구려와 다른 종족이 아닌 고구려 변방의 주민을 멸시하는 호칭으로 불렸던 것이다. (왜국에서도 동부 지역민들을 '東夷', 가고시마 지역의 사람들을 薩摩隼人라고 부르며, 변방 주민으로 취급한 적이 있다.)

      물론 이러한 주장에 따르자면, 勿吉과 靺鞨의 외교 기록은 고구려 중앙정부가 변방 주민들조차 통제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粟末靺鞨과 고구려의 전쟁 및 그로 인해 厥稽部를 중심으로 한 粟末靺鞨의 8部가 수나라로 이탈한 점은, 변방 주민이 중앙정부와의 싸움에서 패배하여 그 일부가 중국으로 망명한 것이다.

    • 34名無し2021/04/19(Mon) 01:38:59ID:cwNzExODg(17/19)NG報告

      의견들을 종합해보자.
      기본적으로 靺鞨 부족들과 고구려는 정치적으로 서로 이질적인 집단이었다. 그러나 고구려의 통치 체제 하에 변방 주민으로 존재한 기간이 있었고, 이 기간동안 고구려의 직접적/간접적 지배를 통해 고구려人으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한 " 靺鞨系 고구려人"들이 일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해당 집단이 고구려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발해를 세웠다는 것이다.

      고대~중세를 막론하고. 제국은 원래 다민족 집단인 경우가 많았으며, 제국 내의 다민족들 중에서는 제국을 계승하며 융화되려는 세력도 있었던 동시에, 제국으로부터 이질성을 유지하며 이탈하려는 세력도 있었다. 굳이 유사한 사례를 제시하자면, 미국의 흑인/한국계 왜인/인도계 영국인들을 거론할 수 있다. 이들은 전부 미국인/왜인/영국인으로 구분되지만, 이들이 현지 국적을 취득하고 정치에 참여할 경우에는 미국 역사/왜국 역사/영국 역사로 구분된다.

    • 35名無し2021/04/19(Mon) 01:45:00ID:cwNzExODg(18/19)NG報告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였다는 점에는, 고고학적 증거도 존재한다.

      고구려의 石室은 독특한 天障 형태로 유명하다. 穹窿形이라고 불리는 arch形 천장에서 시작해서, 모서리가 있는 折天井形 천장, 집 모양을 본딴 맞배 지붕形 천장, 고임 천장, 고임 천장 중에서도 삼각 고임, 평행 고임이 있으며 ,고임 天井의 형태는 이중/삼중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고구려가 멸망할 무렵의 石室들은, 대부분 삼각 고임과 평행 고임이 이중으로 베풀어진 양상의 천장을 보이고 있다. 渤海의 古墳에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삼각 고임과 평행 고임을 조합한 천장으로 축조하며, 벽화의 再製 또한 고구려가 멸망한 시점의 벽화들과 같은 주제로 그려진다. 구조적으로도 渤海 초창기의 古墳은 고구려의 古墳과 거의 같다.

      발해가 고구려人들과 靺鞨人으로 구성되었지만, 분명 고구려의 별종인 靺鞨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발해의 초기 古墳문화도 고구려의 古墳문화와 거의 같고, 사실상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 36名無し2021/04/19(Mon) 01:45:30ID:AyNjY4OTk(4/5)NG報告

      >>33
      色々書いてくれているけど、
      靺鞨である以上、沿海州の歴史というのが本当は正しいと思う。
      まあ、満州国が今もあったら、そこの歴史に分類される話かと。

      まあ満州国は、もうないので半島に渤海が与えた影響と滅亡によって生じた事柄、中国に渤海が与えた影響と滅亡によって生じた事柄、どちらが影響が大きいか、という話だと思うよ。

      渤海を滅ばした遼になると、半島の歴史に絡んで来るとは思うけど。

    • 37名無し2021/04/19(Mon) 01:49:11ID:cwNzExODg(19/19)NG報告

      그래서 결론은 무엇이냐.

      결국 발해는 당대와 직후의 시대를 다룬 宋과 高麗에 이르기까지, 고구려의 후예라는 것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국가였다. 중국 측에서는 인종적으로 "靺鞨人"이라는 이유로, 발해가 고구려와는 별개의 국가였다고 정의하고 있지만, 상술하였듯이 자칭/타칭 고구려의 계승 국가로 인정되었으며, 고구려의 문화도 계승하였다.

      이런 경우는 의외로 역사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극히 일부 滿洲人系 지배층과 대다수 漢族系 피지배층으로 이루어졌던 청나라가 바로 이런 경우였다. 비록 한자를 사용했으나, 청나라는 女眞의 후예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갖고 있었고, 朝鮮이나 漢族 등에게도 명백히 오랑캐라는 취급을 받고 있었던 "여진족 국가"였다.

    • 38名無し2021/04/19(Mon) 01:57:49ID:AyNjY4OTk(5/5)NG報告

      結論?
      渤海は靺鞨が作った沿海州にあった国、だと思いますよ。
      そんなに半島になにか影響を与えているんですか?

    • 39日本首狩族酋長(似非右派・似非保守専門)2021/04/19(Mon) 02:19:25ID:c1OTM1MDY(1/1)NG報告

      >>1
      万里の長城より北は、支那じゃないけどな(*´エ`*)

      満州人の絶滅の次は、渤海併呑ですか。

      中国共産党らしいやり方だね。

    • 40名無し2021/04/19(Mon) 02:33:38ID:kzMzQ5OTc(1/1)NG報告

      韓国人は日本人の130倍ものトリチウムを放流し、海産物を口にし、倍もの放射能を毎日、吸ってるわけじゃん。中国のおじさんキムチよりひどいんじゃないの?政府ちゃんと言ってるの?事実は受け入れたほうがいいよ。隠し事が多いから。韓国人の発言みると、自分を棚に上げてよく言うなーって笑ってみてる。世界がわらってるよ。多分、政府はコンクリートに核廃棄棒を混ぜて使ったのいってないんじゃん?喉頭がん多くない?まーどうせ信じないんだろうけど気をつけなさい。科学的真実だけを信じなさい。こういうのは、愛国心で、批判だけをするのではなく。韓国人がしらないこといっぱいあるよ。あと、世界が笑ってるから。 違う国行って歴史まなんだほうがいいよ。違うことだらけだし。中国以外の国ね。

    • 41名無し2021/04/19(Mon) 07:32:07ID:QwNzE1MTA(1/4)NG報告

      そもそも、今の中国って、中国共産党が支配する地域だよな
      言ってしまえば、唐と中国共産党は何の関係もないよな

      朝鮮人にしても、中国人にしても、頭おかしくね?w

    • 42名無し2021/04/19(Mon) 07:36:17ID:QwNzE1MTA(2/4)NG報告

      中国にしても、朝鮮にしても
      日本と同じ歴史を捏造しようとするから狂うんだよな

      中国も、南北朝鮮も、日本とは違うんだよ
      中国も、南北朝鮮も、20世紀半ばにできた国なの!
      わかった?w

    • 43名無し2021/04/19(Mon) 07:41:56ID:QwNzE1MTA(3/4)NG報告

      例えばな
      今のイラン人が「イランの領土は、ペルシャ帝国の領土だ」って言ったら、どう思う?
      狂ってると思うだろw

      それが、朝鮮人であり、中国人だよwww

    • 44名無し2021/04/19(Mon) 07:50:48ID:c3NzY2MTM(1/1)NG報告

      >>37
      >国際的に認められた国

      国際的ってどこよ?

      ギリシャ?
      ローマ?
      エジプト?
      それとも。ガンビアにでも認められていたの?

    • 45名無し2021/04/19(Mon) 08:11:15ID:QwNzE1MTA(4/4)NG報告

      朝鮮人と中国人へ

      日本と唐は交流がありました!

      しかし、中国も韓国も北朝鮮も
      唐と交流はありません!

      あるわけないんだよww

    • 46名無し2021/04/19(Mon) 08:48:49ID:I2NDk3ODg(1/1)NG報告

      中国:渤海は唐時代の地方政権で中華民族台定義メンバーでアル
      韓国:渤海は韓国の古代史ニダ

      日本:中・韓の主張、共に異見があるけど、少なくともお前らは一緒で良いよ。

    • 47名無し2021/04/19(Mon) 08:59:11ID:g4NTY3NzI(1/1)NG報告

      발해 문서 "일본은 사위의 나라"

    • 48名無し2021/04/19(Mon) 09:02:21ID:A0MjQ3Njc(1/2)NG報告

      >>47
      ねぇバカなの?

    • 49名無し2021/04/19(Mon) 09:30:07ID:Q3NjYzMTE(1/1)NG報告

      >>47
      朝鮮人はいつもいつもバカばっか。

    • 50名無し2021/04/19(Mon) 09:40:03ID:M2MjE5MTc(1/2)NG報告

      高句麗の流民が逃げ込んだんだよ
      日本にも来てたけど

    • 51名無し2021/04/19(Mon) 09:41:41ID:I1OTk2MTg(1/1)NG報告

      >>47
      한국인 특유의 오만함은 DNA로 계승되고 있습니다

    • 52名無し2021/04/19(Mon) 10:16:04ID:IxOTg5MzA(1/1)NG報告

      >>37

      >高句麗の後裔

      韓国がこれに入らないだろアホw
      いつ韓国と高句麗が合流したんだw

      高麗は新羅から独立する為に過去の国の名前を使っただけで高句麗に一切関係が無い。

    • 53名無し2021/04/19(Mon) 10:22:35ID:UzNDQ4Mzc(1/1)NG報告

      >>47

      結論から言うと 渤海も高句麗も中国の植民地で 

      朝鮮半島に植民地国しかなかったということ! 当時は中国と日本しか存在しなかった!という真実

      糞だらけの韓国 ↓

    • 54名無し2021/04/19(Mon) 10:46:43ID:M2MjE5MTc(2/2)NG報告

      中国では百済史も
      すでに中国史に編入されてるみたいだね

    • 55名無し2021/04/19(Mon) 11:47:26ID:EzOTIwMTg(1/1)NG報告

      >>7
      渤海国に関して中国と日本の古代史は一致してるが、なぜか韓国だけが違う。

    • 56名無し2021/04/19(Mon) 12:08:29ID:IyNjM2MDI(1/1)NG報告

      >>44

      현대 이전의 중원 왕조들
      한민족계 왕조들
      당시의 왜국

    • 57名無し2021/04/19(Mon) 12:15:06ID:gxNDUzMjU(1/2)NG報告

      また朝鮮人が、wikipediaを100%コピーしたか?w
      知識皆無なので、そのままコピーするレベルをご覧下さいw

    • 58名無し2021/04/19(Mon) 12:16:08ID:gxNDUzMjU(2/2)NG報告

      >>56
      過去1000年間、中国の忠実な奴隷の朝鮮人。
      中国奴隷する事を、全世界に誇らしく自慢する書籍も作成♪

    • 59名無し2021/04/19(Mon) 12:22:40ID:A0MjQ3Njc(2/2)NG報告

      num wikiと無条件愛国youtubeは韓国人に脳内麻薬のような症状を起こさせる

    • 60名無し2021/04/19(Mon) 14:38:57ID:M3MDIxMTI(1/2)NG報告

      >>1
      シナ共産党とも韓民国とも連続はないよ

    • 61名無し2021/04/19(Mon) 14:40:37ID:M3MDIxMTI(2/2)NG報告

      >>11
      こいつ朝鮮人並の思考回路だな。情けない奴

    • 62名無し2021/04/19(Mon) 19:47:25ID:MwNzI5ODQ(1/1)NG報告

      なんだろううね、
      特段、日韓の歴史論争にもなってない分野を持ち込んでるだけだね。

    • 63名無し2021/04/20(Tue) 10:59:58ID:c5MDI3MDA(2/2)NG報告

      >>61
      くやしいニダー^^

    • 64名無し2021/04/20(Tue) 16:04:32ID:I5ODk0MjA(1/1)NG報告

      靺鞨人の多種族融合の国。

      前期中期後期で変質。公用語は初めは靺鞨語。
      統一で漢化が進んで漢語へ。属する高麗人、突厥人、契丹人、室韋人、回紇人などはそのまま自己の言語
      属する高麗人、突厥人、契丹人、室韋人、回紇人などは自己言語。

      『新唐書』巻二二〇・東夷伝・新羅、『太平広記』巻四八一・新羅条
      8世紀の唐の記録には、新羅人が新羅の東北境の住民である渤海人のことを、
      黒毛で身を覆い、人を食らう長人。

      首都上京は、長安ではなく平城京を真似た可能性はある。
      727年、渤海は高仁義らを日本に派遣、
      交流は渤海滅亡までの200年間継続。
      実態は別として渤海からの使節を日本は朝貢であると認識、
      日本側は渤海側の使者を大いに歓待、財政的負担で後期では12年に1回と回数の制限。

    • 65名無し2021/04/21(Wed) 13:30:46ID:Y2NTQ5NTA(1/1)NG報告

      支那人=朝鮮人
      これで全てがうまくい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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