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時代に武臣政権ができなかったのはどうしてです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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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名無し2017/10/07(Sat) 11:23:01ID:kxOTY4MzA(1/1)NG通報

    朝鮮時代に武臣政権ができなかったのはどうしてですか?

  • 2名無し2017/10/07(Sat) 14:11:49ID:AwNTQ0ODA(1/1)NG通報

    무신이 약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 35.2017/10/07(Sat) 14:17:30ID:AxMTMwNjA(1/4)NG通報

    잘 모르지만

    글을 가져왔습니다


    조선이 무신인 이성계의 무력반란으로 건국된 나라입니다.
    그 자신이 무력의 중요함과 위험성을 잘 알고 있기에, 건국하자 마자 개인의 군대인 '사병 혁파'를 실행합니다. 태종 이방원도 무엇 보다 사병혁파를 우선 합니다.
    용의 눈물을 보면 알 수 있죠.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모택동의 유명한 말이죠.
    지금도 중국은 국가 주석은 물려 주어도 중앙군사위 주석은 권력을 모두 내놓거나 죽을때 까지 유지합니다. 모택동, 등소평이 그러했습니다. 이것은 고려때 무신 정권과 최충헌을 보면 알 수 있고, 대부분의 창업군주가 무신 입니다. (중국 송나라의 태조 조광윤, 태조 왕건도 전공으로 출세한 무신, 도요토미 히데요시, 칭기스칸, 주원장 등) 그러니 이들 무신에 대한 견제는 고려 광종때는 무신의 주축이었던 호족들을 대규모 숙청하거나, 과거제를 통해 벼슬길을 일원화 합니다. 무술 보다는 공부다 이거죠. 조선시대는 비록 무과를 설치하지만 더 심하게 견제합니다.
    무관은 정3품이상은 진급 못하고, 녹봉을 비롯해서, 고위무관직은 거의 명예직화하며 대부분 왕실종친들이 담당합니다. 또한 무관은 정치에 참여 할 수 도 없고, 지방직에서도 차별이 이었습니다.
    이순신장군의 경우를 보면 거의 문과에 급제 할 수 없거나, 한미해진 양반들이 주로 지원하는 것과 중인 심지어 천인들도 전공이나 벼슬을 구입하는 공명첩의 대부분이 이들 무관직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차별은 국방력의 약화로 이어집니다. 중국 송과 조선은 비슷한 점이 많은 나라 입니다. 지나친 문치주의, 관료제등. 이 지나친 문치주의의 폐악이 그대로 조선에 나타납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그 증거입니다. 한마디로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칼든 놈들이 무섭다가 그 차별의 원인입니다.

  • 45.2017/10/07(Sat) 14:21:18ID:AxMTMwNjA(2/4)NG通報

    >>3

    의견들을 몇개 더 가져옵니다


    고려시대때는 원체 문신이 득세하던 시기였습니다.
    문신과 무신은 그 성향이나 여러가지가 반대라서 서로 대립하고 마찰하기 때문에 문신이 득세하니 무신을 업신여긴 것이고요.
    조선때는 국가 정책으로 문신 위주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서자의 문제인데요.
    서자는 문과를 볼 수 없지만 무과는 볼 수있었습니다.
    조선시대의 서얼차별은 현재의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일반 상민들어게는 위세등등한 양반일지 몰라고 같은 양반 안에서는 인간취급도 못 받았습니다.
    더욱이 조선 초기 왕자의 난이나 세조의 반정 등으로 무인들에 대한 경계는 더 커져갔죠.
    그들 스스로 무인의 힘을 이용해 권력을 잡은 것이니까요. 특히 세조의 경우는 더더욱요. 그러다보니 무인에게 힘을 주지 않기 위해 무관을 천시한 것입니다.차별하고요.
    또한 조선은 유교의 나라고 유학의 내용에 따라 몸 쓰는 것을 아주 천하게 여겼습니다.
    몸 쓰는 것으로만 따지면 무관보다 더 한 직종도 별로 없죠.
    민족의 무예가 조선 들어서며 사라진 것도 이 때문입니다.

  • 55.2017/10/07(Sat) 14:25:00ID:AxMTMwNjA(3/4)NG通報

    조선의 경우 전쟁이 많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불교가 사라지고 조선은 유교 중시 사회가 되어버리면서 더욱 그랬습니다 .
    즉 전쟁 보다는 글, 사군자, 같은 것에 관심을 갖고 초기에 한반도 영토가 거의 확정 되면서 그 이상의 영토 확장은 하지 않았고 백성들을 보살피는데만 신경을 썼습니다.
    결국 이러한 이유등이 나중에 남한산성에서 인조가 청나라 왕 한테 세번 절을 하는 치욕을 맛보고 율곡 이이 선생께서 10만 양병설을 주장했지만 이 역시 무시되고 결과적으로 임진왜란에서 치욕적인 상황을 맞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려는 무신과 문신에 계속적인 대립에서 문신이 우세하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전쟁이 많아서 무신들이 어느 정도 권력을 갖고는 있었지만 이런 대립 속에서 문신이 우세하도록 만든 인물이 있었습니다.
    김부식이 였습니다. 김부식은 대학자, 정치가로 문신의 대표격이였는데 이 와중에 묘청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이 난을 김부식이 총사령관을 맡아서 전부 진압했고 이후에 고려 조정과 왕들은 문신을 더욱 가까이 했습니다. 결국 무신들은 차별이 심해지자 정중부를 중심으로 무신의 난을 일으켰던 것 입니다.

  • 65.2017/10/07(Sat) 14:28:00ID:AxMTMwNjA(4/4)NG通報

    >>3

    번역이 조금 이상하게 됩니다

    "문신" = 文臣

    "무신" = 武臣

  • 7名無し2017/10/07(Sat) 14:29:18ID:I3NzU3MTk(1/1)NG通報

    >>1
    中国と同じ科挙を採用していたから武官は文官より下とみなされていたから
    小中華を自称していたくらいだからね

    また根強い儒教社会だから職人なども賤業とされていた
    だから優れた陶工などの地位も低かった

  • 8名無し2017/10/07(Sat) 14:45:58ID:UxMjM2MDQ(1/1)NG通報

    >>2 >>3 >>4 >>5 >>6 >>7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

  • 9名無し2017/10/08(Sun) 07:30:20ID:k3MzMzNzY(1/1)NG通報

    中華王朝が、属国の朝鮮に武力を持たせないようにした事が大きい。
    現在でも一緒でしょ。
    大国は周辺国の軍事力強化を恐れる。

  • 10名無し2017/10/09(Mon) 15:22:20ID:I0ODY2MDY(1/2)NG通報

    >>5
    朝鮮で起こって事は あなたの記述からだいたいわかる。
    古代日本で 軍事を司る豪族(物部氏 大伴氏など)が力を失っていった過程と、
    同じだと思う。

    古代日本における最後の武力を使った権力争い 壬申の乱のあと、
    日本も中国(唐)の真似をした律令制度による国づくりがすすめられた。
    律令制度では 土地は国のものとなり、豪族は氏姓(身分)を与えられ、宮廷貴族化する。
    9世紀の初めに最後の軍事衝突があったあと(薬子の乱) 
    12世紀中ごろの平治の乱まで、
    日本においても 武力による争いは姿を消す。

  • 11Bダッシュ2017/10/09(Mon) 15:29:56ID:MwMjI1OTA(1/1)NG通報

    中国が目を光らせていたからでしょ。

  • 12名無し2017/10/09(Mon) 15:39:57ID:I0ODY2MDY(2/2)NG通報

    >>10
    12世紀に入ると 土地の開拓がすすみ、
    開拓を行った地方の有力者たちが、中央に従うことを嫌うようになる。

    軍事力をもたない中央は 争いの調停をすることもしなければ、
    生産力向上の役にたつことをするわけでもないから、
    自分の努力で土地を開拓したものたちが 自分たちの利益を取りまとめてくれる政権をもちたいと考えるのは、当然の成り行きだ。

    地方の有力者たちが武装して、中央の貴族、特に天皇の子孫を旗頭に担いだのが武士で、
    武士の権利を中央から守り、武士同士の争いに判決を出すのが 武士の棟梁の仕事。
    ここから 日本の封建時代が始まる。

    雨の多い日本は 木を切り倒しても次々生えてきたので、エネルギーに困ることがなかった。
    そのため 鉄の生産が活発に行われ、農機具にも使われるようになり、
    土地の開拓を積極的に行なって 地方の生産力があがっていった。

    韓半島の場合(中国もだが)木を切ると 次が生えてこないために、禿山になってしまう。
    エネルギーが枯渇したために、十分な鉄器を作ることもできないし、
    水を蓄えることができない禿山のために、土地自体もやせ細っていった。
    朝鮮末期の農業生産力は 朝鮮初期のころの3分の1に過ぎなかったという。
    武士が生まれるほど 地方経済が伸びなかっ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