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不自然。。
そんな名前は日本には無い名前だね。黒歯常之とか扶余豊璋などは、日本人と似た名前だな。
百済の王子である扶余豊璋は人質として日本で暮らした。
もちろん日本が宗主国で百済が属国の関係だったが。今の感覚としては不自然ですけど、2文字+2文字のところは日本人っぽいです
>>1
日本にも無い感じです
日本の苗字は、住んでる土地に由来してるものが多いのです。
仏教系の名前とも違う気がします結構クールでカッコイイ名前w
でも日本人らしくはないな
失われてしまったのがもったいない>>1
日本人とは、かけ離れた名前がある。何て読むのか分からない。
福留っていうのは名前じゃなくて、苗字ならいる。
福留孝介(ふくどめ こうすけ)っていう野球選手がいるね。
常之っていうのは名前で有るね。日本語だと「つねゆき」で変換すると、この字が出る。
貴方は百済人が日本に渡って支配層になったと言いたいんだろうけど
中国や日本の古文書には「百済は百済人と漢人と倭人の多民族国家である」と書かれているよ。
これは韓国人だけが知らない。
だから百済の武寧王の墓の内装は全て中国様式で、棺は日本製の高野槇で造られた和式の木棺。
王の装飾品だけ百済独自の物。
画像は百済国の王子が1人で日本へ来た時のことを描いた絵。
右側に居る日本人たちは立ったままだが、家来の百済人は平伏している。
百済王子は第38代天皇である天智天皇(中大兄皇子 626~672年)から武器と領地を貰ったと書いてある。>>8
스레 작성한 사람인데요, 별로 그런 악의를 가지고 질문한 것은 아니에요.
나는 역사 전공은 아니지만 백제와 일본의 관계, 백제와 신라 관계를 찾아보면 재미있으니까 그것뿐.
한국 고등학교 교과서에 백제가 문화를 전수하고 영향을 주었다는 이야기는 서술되어 있지만 상하관계라는 이야기는 없어.
오히려 최근에는 마한의 잔존세력이 5세기까지 전라도 남부에 존재했다던가 한반도 남부에 독자적인 지역 세력이 있었다던가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편견 너무네요
그리고 후쿠도메라면 알고 있습니다. Wbc에서 김병현에게 홈런쳤던 사람이구요. 얼마전에 선동열이 꼽은 최고의 외야수 중 한 명이네요. 지금은 hanshin이던가>>9
難しいですね
漢字を4つ並べたら、日本人の名前っぽくなるのでw
発音の方は、全然日本的ではないようです
中国の歴史書「梁書」によれば、「今言語服章略與高麗同」
訳すと「(百済の)言語や服装などが高句麗とほぼ同じ」
百済の文化が日本的であると考えた場合、高句麗の文化まで日本的であったことになってしまいます
さすがに、それはないでしょうw
でも、昔の日本が使っていた百済の文化には、たとえば、年号があります
当時の日本も暦と年号は作っていました
でも、暦は1年間だし、日本の年号はすぐに変わるので、長い単位で年代を表すのに便利だったようです
他にも、百済滅亡の際に大量の百済難民が日本に来て、いろんな遺物が残されているようです>>9
逆の見方をすれば、新羅はこの頃すでに名前が漢人化してしまっていたという事でしょう。
使っている漢字の意味も悪くないので
百済風の名前を現代で使っても面白いと思うのですが。>>1
読み(発音)は全く違いすが、漢字は日本では不自然には感じません。
姓で通用しそうなのは
鬼室
福信
黑齒
常之
砂宅
智積
福留
名でありそうなのは
福信
常之
智積
ただし、少し旧く感じます。
今の韓国人の姓名(朴槿恵とか安貞桓とか)の方が
日本の名前としては、はるかに不自然に感じます。>>1
確か、百済語や新羅語等は、当時の発音は、解明できてないから、極めて大きな古代史の謎になっていると思う。
日本語は、言語体型が複雑になるが、漢字語を『音読み』と『訓読み』に別ける事で、上代日本語以後の系譜を『訓読み』に残り、当時の読み方し易い部類です。
朝鮮語が、漢字語の正韻化を経て、古代朝鮮語の固有の読み方が、死語となっています。固有語としていくつか残っている言葉(例えば『海』、바다、해)も有りますが、かなり消滅している為、朝鮮語の系譜として一番近いと考えられている新羅語でさえ、当時の発音が謎の
ままです。
鬼室福信(GwiShil Bok shin)、黑齒常之(HeukChi Sang ji)、砂宅智積(ShaTaek Ji jeok)、憶禮福留(UhkRye Bok ryu )
上記全て、ほぼ漢字由来発音ですね。文献では、漢字で記載で、当時の固有語読みは、謎です。
鬼室福信(GwiShil Bok shin)
日本音読み(KiShitu FukuShin)
日本訓読み(OniMuro FukuNobu)
黑齒常之(HeukChi Sang ji)
日本音読み(KokuShi Jyo Shi)
日本訓読み(KuroHa TsuneKore)
砂宅智積(ShaTaek Ji jeok)
日本音読み(ShaTaku Chi Sheki)
日本訓読み(SunaTaku Tomo Tsumi)
憶禮福留(UhkRye Bok ryu)
日本音読み(OkuRei Fuku Ryu)
日本訓読み(OboeRei Fuku Tome)
漢字語の『福』や『宅』や『禮』は、訓読み存在しないので、そのまま音読みを当てはめました。『福(fuku)』や『宅(taku)』は、実際の発音は『fuk』や『tak』でも問題無いかと思います。(日本語のローマ字が子音で終了する習慣が無いので、その様な表記します。)
漢字由来の音読みでは、かなり似てますね。共に中国由来の発音だからでしょうか?
訓読は、完全に違う読みになります。
もし、百済語や新羅語の固有語の多くの発音が判れば、古代語の相関関係や、なぜ言語学的に朝鮮語が孤立した言語となったのか? かなり解明でき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1
>鬼室福信
余談だけど子の鬼室集斯(きしつしゅうし)を祀った鬼室神社が地元にあるよ>>3
自分たちとは、余り関係ない民族なのにね。>>16
新羅語、百済語の古代語の名前は、元々長いです。これは、漢字が輸入される前は、古代語の発音に近い文字を無理矢理当てはめた結果です。ただ7世紀頃に唐時代に漢字普及で、字の意味と音が一致した名前が普及します。
少なくとも、百済は、漢字語の普及する前は、高句麗と同様の扶余語族に見られる名前に近いものと推定されてます。しかし、絶対的にな情報は少ないですね。
漢字が普及する前の、百済人の名前は以下が有名ですね。
画部・因斬羅我(えかきべ・いすらが)
医博士・奈率王有僚陀(くすし・なりつおうゆうりょうだ)
『いすらが』とか『なりつおうゆうりょうだ』は、かなり無理矢理な感じがしますね。その他、漢字名が普及する前に、発音に対して当て字した名前には、以下のようなものがあります。
『伊梨柯須弥』『蘇那曷叱智』『都怒我阿羅斯等』『微叱己知波珍干岐』
同様の事が日本でもあります。古事記の神話で出て来る、名前で『伊邪那岐』イザナギ、『伊耶那美』イザナミ、『須佐之男』スサノオ
これらは、大和言葉を無理矢理、似た発音の漢字を当てはめています。
日本語は『訓読み』のお陰で、上代日本語に繋がるヒントが多く、漢字で書かれた古代語の解明が進んでいます。しかし、百済人の名前の当時の発音は、不明点が多く謎に包まれています。なお、最新の研究成果は知らない為、情報が少し古いかもしれません。>>18
万葉仮名と同じく単なる同音の漢字による当て字ですからね。
ただ、中華思想の影響か、わざと卑しい意味の漢字を使っているのもまた
中国人らしくてニヤリと笑うところですな。한국인이 없으면 신나게 날조를 하는 일본인들
백제는 일본 문화 발전에 태양 같은 나라
구당서 백제전(舊唐書 百濟傳)에 ‘백제의 세력이 남으로 바다를 건너서 왜에 이르렀다’는 내용이 있다. 백제의 세력이 일본에 확대된 것은 백제 역시 일본의 해상권과 일본 자체를 장악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백제가 일본 문화에 끼친 영향은 괄목할만한 것이었다. 백제는 왕인박사(王仁:화이길사·和邇易吉師), 아직기(阿直岐:아지길사·阿知吉師) 및 오경박사(五經博士)를 일본에 보내어 일본문화를 개척케 했다. 백제유민은 또 일본에 문자를 만들어 주었다. 한자를 간략한 가명(假名) 문자로 만들어 준 것이다. 이 가나(假名) 문자가 일본에서 헤이안지대(平安時代)에 완성됐다. 이 문자는 백제, 신라의 토(吐)에서 유래됐다. 특히 가다가나(片假名)의 タ, ヤ는 백제의 토(吐)와 동일하다. 또한 일본이 지진으로 망한다 해도 하나만을 구해야 한다는 백제관음(百濟觀音)이라는 것도 백제유민이 만들어 준 것이다. 또한 대불주조(大佛鑄造)의 기술지도자인 국중공마려(國中公磨呂)의 조부가 백제인이다. 따라서 대불주조(大佛鑄造)도 백제인의 기술로 만들어 졌다.
일본작가 시바료타로(司馬遼太郞)는 1985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일본이 아직 미개했던 야요이문화(彌生文化) 후기에 한국유민에 의해 쌀농사 문화를 중심으로 한 대륙문화가 들어와 대변화가 일어났다. 백제로부터 도래한 한인 20여만 명이 일본율령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조상은 한국인이다”고 말했다. 이를 보면 한국유민이 얼마나 일본국가와 문화 건설에 큰 영향을 주었는가를 알 수 있다. 구한말 광무시대(光武時代)에 김기수(金綺秀)가 일본 통신사로 일본을 보고 와서 기록한 해사록(海槎錄)에도 백제가 경전과 음악을 일본에 준 사실로 오늘의 일본인이 백제를 말하더라고 했다. 이것은 백제가 문화기술로서 일본을 가르쳤다는 반증이다. 일본에 있어서 백제는 태양과 같은 존재다.근초고왕이 하사한 칠지도의 비밀
그러나 일본은 지금에 와서 역사를 거꾸로 변조하며 백제가 가나문자(假名文字)를 만들어주고 백제왕이 하사한 것도 하사가 아니라 조공을 바쳤다고 꾸며댄다. 1874년 10월에 일본 이시가미 진구(石上神宮=나라현·奈良縣)에서 공개됐다. 그 명문(銘文)에 ‘泰口4年口月16日 丙午正陽 造百練口七支刀口辟百兵 宜共侯王’이라 했다. 즉, 泰和4년16일에 불상(不詳), 간흉(姦凶)을 제거하는 백연口 칠지도(百練口七支刀)를 만들어 후왕(侯王)에게 주었다고 한 것이다. 이 명문(銘文)에 대해 일본학계에서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것이 후쿠야마도시오(福山敏男)씨의 견해다. 그는 고의로 백제왕의 연호인 태화(泰和를 ‘泰口’로 고쳐 동진(東晋)이 야마토(大和) 4년이라고 해석해 신공후(神功后) 52년에 백제가 칠지도(七支刀)를 헌납했다는 기록에 결부시키고, 신공후(神功后)가 백제를 지배했다는 기록이 금석물(金石物)에 의해 실증됐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칠지도의 해석에 있어서 관건(關鍵)은 후왕(侯王) 두자이다. 후왕(侯王)은 제왕(帝王)의 지배를 받는 속국의 왕을 가리킨 것이다.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이 일본 왕을 후왕(侯王)이라 칭한 것은 백제왕이 제왕(帝王)으로서 일본 왕을 지배한 것을 실증한다. 그 일본 왕이 신공후(神功后)라면 신공후(神功后)가 도리어 백제왕에게 속국인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필자는 일본 유학 당시 교토대학 우에다(上田正昭)교수의 칠지도(七支刀)에 대해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우에다(上田正昭)교수는 “칠지도(七支刀)는 헌납이 아니라 백제(근초고)왕이 일본의 왕에게 하사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 칠지도(七支刀)가 한국의 학자에 의해서 규명되는 것이 부끄러우니 일본 사학자로서 분명히 헌납이 아니라는 것을 밝힌다”고 말했다. 양심적인 말이다. 이 같이 이것은 백제왕이 후왕(侯王)이 아니고 일본을 제후국으로 둔 제왕(帝王)이라는 것이 판명됨을 말하는 것이다. 우에다(上田正昭)교수가 아니더라도 이미 국내 학자들에게서도 최태영 선생과 최인선생 선생 등 많은 역사 연구하는 사학자에 의해 다 밝혀져 아는 사실이다. 백제왕은 제왕(帝王)으로서 연호를 사용하고 있으나 왜왕은 제왕(帝王)이 아니라 후왕(侯王)이기에 연호도 없다. 백제의 왕인 근초고왕(近肖古王)은 태화(泰和)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태화(泰和)는 백제왕의 연호를 가리키는 말이다. 중국도 후한시대 위 무왕(魏 武王) 조조(曹操)가 천하를 호령 할 때에 역사상 대 제왕인 주문왕(周文王)에 자비(自比)하여 천하를 호령하는 뜻으로 백연 철 칠지도(百鍊鐵 七支刀)를 만들어 일본 왕에게 준 사실이 있다.
백제는 일본에게 문물을 준 대(大) 제왕국가(帝王國家)
일본은 역사적으로 한국과 도저히 비교가 안 되는 나라임에도 우리나라와 비교 우위를 점하기 위해 모든 면에서 내세우나 분명한 것은 일본의 고대역사는 우리유민의 역사라는 사실이다. 일본 땅에서 없는 사실도 우리 것을 그대로 옮겨 기록을 남기려 한 것은 이해가 되나 왜는 우리나라의 후국(侯國)에 지나지 않았다. 칠지도(七支刀)에 의해 백제왕이 후왕(侯王)이 아니고 제왕(帝王)인 것이 더 판명되고 있다. 75년 발견된 백제 무령왕(武寧王)지석(誌石)에는 붕(崩)이라 각명(刻銘)했다. 제왕(帝王)의 사(死)를 붕(崩)이라 하고 후왕(侯王)의 사(死)를 훙(薨)이라 한 것으로 봐도, 백제가 제왕(帝王)으로 등극한 것과 왜(倭)가 후왕(侯王)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중국에 아첨하는 김부식(金富軾)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무령왕(武寧王)이 훙(薨)했다고 기록하고 후왕(侯王)으로 비하했다. 또한 서거정(徐居正)은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서문에서 신라왕이 연호를 칭 한 것은 참담한 일이므로 이를 삭제했다고 했다. 이 같이 자기나라 역사를 비하(卑下)하는 사대사가(事大史家)가 백제왕의 연호(泰和)를 문서역사에 기입하지 아니했던 것이다. 이러한 것을 일본은 인용하며 우리역사를 비하하려고 하나 백제가 일본을 지배한 제왕국(帝王國)이요 일본(倭)이 백제에 예속된 후왕국(侯王國)의 나라라는 사실을 백제 칠지도(七支刀)가 실증해 주고 있다.일본은 또 일본과 조선의 2천년(日本と 朝鮮の 二千年) 책 114~115면에 일본 천지왕조(天智王朝=38代)는 백제의 병법(兵法) 산성기술(山城技術)을 배웠다고 했다. 지금 규슈(九州)지방의 조선산성(朝鮮山城)을 신롱석(神籠石) 또는 신호석(神護石)이라고 부른다. 이는 신비한 산성으로 신앙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산성을 백제인의 지도에 의해 축조됐다고 전하고 있다. 당연히 그 당시 우리 유민들이 미개한 왜인들을 지도하에 둔 것은 말 할 것조차 없고 백제가 문무양면에서 일본을 지배하고 가르친 것이다. 중국의 구당서(舊唐書)에 백제의 세력이 왜(倭)에 이르렀다고 한 것이다. 북사 백제 전(北史 百濟傳)에 백제를 동방강국(東方强國)이라고 칭했다. 백제는 진세(晉世)에 북부 중국에 진출해 요서(遼西), 진평(晉平)을 점유하고 남부 중국에 진출해 월주(越州)까지 이르렀다. 지금도 지역에는 무령왕릉(武寧王陵) 같은 백제 왕릉이 3백여개가 있다고 한다. 이처럼 동방강국인 백제가 태화(泰和)라는 연호를 칭하고 당당한 제왕국가(帝王國家)로서 후왕국(侯王國)인 일본을 지배한 것이다. 이러한 백제를 후왕국(侯王國)으로 비하(卑下)하려고 일본이 아무리 역사왜곡을 해도 백제가 대륙까지 호령했던 대 제왕국가(帝王國家)였던 사실을 숨길 수 없는 것이다. 지금 교과서는 아주 잘못된 것이다.
>>1
先に中国の資料での関連、関係性を調べたほうが良いんじゃない日本でも明治になって創氏するまでは上層階級のみで源平藤原等の姓をメインに使ってた
それまでは平民なら〇〇村の太郎だから〇〇太郎みたいな感じで名乗ってた
日本での名前の付け方は大雑把に纏めると大きく3回変わっている
日本人が名乗ったのを中国人が中国読みで漢字にあてていた時代
遣隋使廃止以降はオリジナル路線になったけど上層階級のみ通じる姓中心の時代
明治になって藩での管理から国の管理になり近代的戸籍制度が整った自由な氏の時代
現在日本人の感覚で過去を見るのは厳しいよね
백제인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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