ホンソンファ著/京文化史
古代韓日関係史を研究する著者が、これまで学術大会で発表した論考を集めて、単行本として出版した。
著者は、日本の歴史書である「日本書紀」に注目して古代韓半島と日本列島の関係を分析する。特に、関心を持つテーマは、日本の石上神宮にある「七支刀」と韓半島南部に存在した任那4県だ。
彼は、七支刀の製作時期が369年という通説を拒否して、「408年11月16日に、百済の世子が珍貴に生まれたことを契機とし作って、倭王に下賜した刀」と主張して、任那4県は、これまで知られていた全羅道南部ではなく、慶南西部一帯という見解を提示する。
著者は、「日本書紀による韓半島関係史分析には、未だに不十分な部分があって、私たちの枠組みと視点から日本書紀を再解釈して見る必要がある」と強調する。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12467663
日本式の前方後円墳を埋め戻す国にこんな事を言われても何の説得力もないんだがw
因みに日本書紀では七支刀は百済からの献上品とされてるね。'候王'의 '侯'는 왕보다 하위에 있는 신하를 지칭하는 字이다. 보통 '제후', '후작' 등의 단어에 쓰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왜국의 일부 학자들은, 백제가 아니라 東晉에서 七支刀가 제작되어서 단순히 백제를 경우하여 왜국에 하사됐다는 학설을 제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그 근거가 빈약할 뿐만 아니라, <일본서기>에도 七支刀는 백제의 '谷那鐵山'이라는 곳에서 채굴한 鐵로 만든 劍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현대의 논쟁이나 候王의 속뜻이 무엇이었든, 당시 백제 왕실은 왜국 왕실을 '候王'이라고 부른 듯하다.>>24
デマを広めてしまった。
修正ありがとう^ ^백제가 왜국에 '인질'을 보냈다는 식의 표현이 있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근거하여, '인질을 보낼 정도였으면, 七支刀 역시 솔직히 헌상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七支刀와 直支가 왜국에 보내진 것은 서로 시대적 간극이 길다. 따라서,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다.
즉, 전성기 당시에 七支刀를 보낸 것과, 고구려에 밀려 국운이 기울어진 시절에 인질을 보낸 것을 비교하는 것은 애초에 무리다.>>24
七支刀는 중국에서 제작되어 왜국에 전해졌다?
七支刀의 文句의 '泰□'를 泰和(=太和)라고 해석해서 東晉의 年號를 사용했다는 점을 근거로서, 백제가 東晉의 年號를 사용하는 제후국이며, 七支刀는 중국의 東晉이 왜왕에게 하사할 것을 백제王에게 명령하여 전달한 물건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太’와 ‘泰’는 서로 엄연히 다른 글자임에도 불구하고, '泰□四年'를 중국 東晉의 年號인 "太和四年(369년)"이라고 주장하는 것은,이치에 맞지 않다.
물론 전근대 한민족의 외교와 관련된 부분에서, 당시 동아시아 지역에서 사실상의 표준으로 쓰이던 紀年인 중국의 年號를 사용한 사례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백제의 武寧王陵과 그 묘지석이 발견되어, 6세기 초반의 백제는 중국의 年號를 사용하지 않았음이 밝혀졌다. 따라서 4세기~5세기에 백제가 중국의 年號를 사용했을 가능성도 희박해졌다.>>24
하지만 우리가 100번을 양보해서 왜국 측의 주장대로, 七支刀의 年號는 일단 백제의 年號가 아니라 중국의 年號라고 가정해보자. 역설적이게도 백제가 독자적인 年號를 사용했다는 증거가 있는데, 칠지도에 기록된 것은 東晉의 年號라고 밝혀진다면, 왜국의 주장대로 七支刀는 중국에서 제조된 검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반대로 백제가 당시에 중국의 年號를 사용했다면, 七支刀를 백제가 제조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통상적으로 한반도에서도 중국의 年號 사용이 일반화되었으니, 중국에서 제조한 물건이란 근거가 될 수 없음)
왜국의 사학계에서, 백제는 독자적인 年號가 없이 중국의 年號를 사용했기 때문에, 七支刀는 중국에서 제작된 劍이며, 또한 중국에서 하사받은 물건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논리가 전혀 성립되지 않는다.
즉 중국의 年號였든 백제의 年號였든, 백제가 年號를 어떻게 사용했는지 그 의문을 해소할 만한 유물이 추가로 발견되지 않는다면, 七支刀가 중국에서 제조되었다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조선은 명나라의 年號를 사용했고,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명나라의 年號가 기사의 가장 앞에 항상 등장한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왕조실록>이 중국에서 기록된 역사서는 아니라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24
백제는 일반적으로 年號 또는 年號+干支(60甲子)로서 年度를 기록한 다른 국가들과 다르게, 그냥 干支만으로 年度를 표기했다. 《翰苑》에서 인용된 《括地志》에는, "年度를 기록할 때, 별도로 年號를 쓰지 않고 60甲子로만 차례를 삼는다[其紀年, 無別號, 但數六甲爲次第]"라는 기록이 있다. 후대에 발견된 砂宅智積碑에도 "甲寅年正月"이라고 干支(60甲子를 사용했다. <일본서기>에도 百濟三書를 인용한 기사들은 干支로만 기록했다. 학자들은 백제가 외교문건이나 외교 무대에서는, 중국 南朝의 年號를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추정한다.
게다가 백제가 단순히 전달자의 역할을 했다는 학설에는 虛點이 많으며, 왜국 내에서도 점차 설득력을 잃어가는 학설이므로, 논점을 벗어났다. 그리고 東晉이 백제로 하여금 왜국에 七支刀를 하사하도록 지시했다면, 중국에도 왜국에 七支刀를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전해지는 기록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
중국이 七支刀를 만들었다면, 七支刀의 銘文에도 중국이 그 주체로 언급되어야 하는데, 그런 사실을 의미하는 文句는커녕, 東晉을 암시하는 단어가 하나도 없다.>>37
その国は、とっくに無くなっないますが?
それも、一千年以上も前に。
何を今更自慢げに言うのかわからないw
大体、全裸道って嫌われてるよねw鮮人て、高句麗の子孫だと自慢するけど、
百済の子孫だと言わないね、w
なんで?w
高句麗は中国の歴史だし〜w>>24
단순히 백제가 전달자였을 뿐이었다면, '백제'라는 文句가 나올 이유가 없다.
왜국에서는 東晉과 백제가 조공 관계로 얽혀있었기 때문에, '候王'을 지칭하는 것은 (倭王이 아니라) 백제王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왜국과 東晉이 주고 받는 물건에, 굳이 백제/백제王을 언급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단순히 백제가 왜국과 東晉 사이에서 전달자의 역할을 했고, 중국이 七支刀를 왜국에 하사하라고 백제에게 전달했다면, 東晉을 위시한 제후국인 백제와 中華 질서에 이제 편입한 왜국의 지위를 생각해야 한다. 왜국 학계는 백제와 왜국이 당시의 중화질서에서 지위가 동등한 국가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七支刀가 近肖古王 시절(4세기)의 물건이 맞다고 가정해보자.
近肖古王은 '鎭東將軍'이라는 작위를 하사받았는데, 倭王은 중국 南朝에서 하사받은 작위가 하나도 없었다. 아니, 그 당시에 東晉과 통교한 기록조차 없다.
우리가 100번을 양보해서 東晉애서 하사한 것이 사실이라고 가정해도, 최소한 백제가 왜국에 헌상했다는 왜국 사학계의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또한 중국에서는 七支刀와 비슷한 樣式이 출토된 적이 없으나, 한반도에서는 七支刀의 근간이 되는 原三國 시대의 金冠 樣式이 지속적으로 출토된다. 나뭇가지를 형상화한 金銀銅 제품이 한반도 古代 왕조들의 originality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年號 하나만 가지고, 七支刀는 중국에서 제작 또는 하사했다고 주장하기에는, 그 근거가 너무 부실하다.>>42
どーでもいいんだよ、
所詮、滅亡した百済だろ?
そんなもん興味ねーわ,聞きたいわ、鮮人に。
おまえらの、アイデンティティって何処?
高句麗か?、百済か?新羅か?
高麗か?朝鮮か?
まぁ、一番近い朝鮮だろうね。前も同じ話をしたと思うが「泰」と「太」は遠い字ではないし、正朔を奉じるということの意味を軽く見すぎてる。
>>46
그럼 '候王'이란 호칭은?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候王
감히 속국에서 종주국의 왕을 '候王'이라고 불렀구나!>>42
日本でも、刀が東晋で作られたというのは定説ではないようだ。
銘文は、「百済王が倭王に贈った」との解釈が定説とされ
当時の背景として、高句麗の圧迫を受けていた百済が倭との同盟を求め、贈られたとされている。>>48
どうしたの?狂ったのか?だから言っただろ
顔が変わってしまうほどモンゴルに凌辱された民族の末裔とは、全く関係がない
ただ百済があったエリアに住んでいるだけ
何も継承していない
一体、現在の朝鮮人と何の関係があるんだ?ww>>51
朝鮮民族でしょ?>>51
そもそも百済から同盟を求めて来たんだと思うよ?
だって高句麗に攻められて困っていたのは百済。日本は別に困っていなかった。
だから百済は日本に王子を人質に寄越した。
当時の百済の国土と、日本の国土を比べてみなさいよ。どう考えても日本の方が大きな国でしょう?
中華の序列もクソもない。
百済より 日本が強い国だったのは当たり前。>>51
百済の支配層と、百済の領民の言語は違っていたらしいね。
その百済の支配層は難民になって日本に逃げて来て保護された。
そもそも半島には、百済の子孫はいないんじゃないの?https://hanja.dict.naver.com/#/entry/ccko/996f32cb127d4a979f53e2d120478191
太
大(태)ㆍ泰(태)와 통자(通字).
https://hanja.dict.naver.com/#/entry/ccko/55a1a6a646064d62b7035a4d0d2e4327
泰
또 太(태)에 통하여 크다, 거만떨다의 뜻이 있음.
韓国の字典でどうなってるのかと思って調べてみた。韓国語でのニュアンスはわからないが、少なくとも関係ない字なんて言っちゃうのは勉強不足だろ。>>60
色々混同されている様にも感じます。
ただ、知らないだけかも知れませんが...
若しくは...認めたくないのかも(笑)>>38
ぐだぐだ言っているようだが、要点は裏面に「故為倭王旨造」と記されていることだ。「為」というのは、奉仕するというニュアンスを伴うから、下位の者が上位の者に向けて使う言葉だ。主君が家臣に対して「お前のためにこの尊い刀を作った」と言うだろうか。家臣が主君に対してこそ「ご主人様のためにこの刀を作らせていただきましたので、献上いたします」と言うはずだ。また下賜品とはこれからも忠誠を尽くせという意味で送られるから、実用的な物であるのが一般だ。七枝刀のような、非実用的、祭祀的な品を送るのは、それが献上品であることの証だ。
そもそも当時百済が倭国に記念品を「下賜」しなくてはならない契機がない。当時百済が倭国に軍事同盟を求めていた状況がある以上、それを乞うために送られた献上品であることが確実だ。この七支刀献上に関して、『日本書紀』神功皇后摂政52年条に、百済と倭国の同盟を記念して神功皇后へ「七子鏡」一枚とともに「七枝刀」一振りが献上されたと記されている。年代的にも合致しており、これが百済からの献上品であることを支持している。属国だった百済の王なら献上だろ
どっちにしろ韓国とは関係無い事韓国人は、中国の歴史書で百済が登場するのは、宋(420-479)の史書である宋書が最初である事は知ってるんだろうか?
晋(265-420)の晋書の段階ではまだ馬韓という地域の中に小国が56ヵ国あると書かれているだけで、その前の三國志魏書では56ヵ国の代表的な国名が書かれていて、その中の伯済国が後の百済国かと推測されている程度のものだから、中国から見ると5世紀までの百済は、いるかどうかも分からない弱小国でしかない。百済を建国したのは高句麗人
高句麗はチャイナなのか?朝鮮なのか?広開土王碑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耒卯年來渡海破百殘加羅新羅以為臣民
〈そもそも新羅・百残は(高句麗の)属民であり、朝貢していた。
しかし、倭が辛卯年(391年)に海を渡り百残・加羅・新羅を破り、臣民となしてしまった。〉- 70
名無し2021/07/01(Thu) 01:52:20(1/1)
このレスは削除されています
학자들이 알아서 연구 하겠지...
칠지도 논쟁은 "傳示後世" 여기에서 이미 끝난 문제이다.
더 언급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다.
일본 학자들이 東晋 에게서 받았다는 주장을 했던 이유도 결국 "傳示後世"를 반박할 방법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74
名無し2023/07/23(Sun) 04:05:17(1/1)
このレスは削除されています
>>74 そんなことないよ?
tennouのDNAから半島人の遺伝子が出ると日本皇族は朝鮮人なの?>>76
百済は日本のいち地方に過ぎない百済と韓国には何の関係もないけどね。仮に百済が日本を作ったというなら日韓併合を非難する理由も無くなるけどな。馬鹿が過ぎるというもの
>>77
O1b2系Yハプロタイプは百越の系統で、日本と朝鮮のO1b2系は6000年以上前、朝鮮半島に人の痕跡がほぼ無い時代の直後に分かれている
実際には百越が登場するより古い時代なので、共通の先祖を持つと言う程度の話だが、元々、中国人が日本人は百越と関係があると考えていたのは、風俗が南部の沿岸の部族と似ていたから
韓の南の倭・・・中国人がどうやって皆黄色人種の中から、朝鮮半島の南部に住む黄色人種を倭人と見做したのか?
斯蘆國にいた倭人・・・韓の南の倭のような集団ではなく、雑多な集まりの中からどうやって見分けたのか?
韓国人が考えているのは、『韓国にあるものは全て韓国が起源』だが、記録上も朝鮮の政治体は中華王朝の列侯から始まり、朝鮮人は周辺地域からの流入民の集まりで、百済ですら為政者と民は言葉が違うと記録が残るように、朝鮮人の民族統合はかなり遅い
朝鮮人は国家権力の枠組みによって作られた民族で、朝鮮の歴代国家は形質の似た部族が集まって出来上がったものではない
高麗が編纂した正史ですら新羅王脱解尼師今は倭人としか読めず、新羅三王家全てに関わりのある瓠公も倭人で、韓国人が地面から湧いて出てきた混じり気の無い民族であるかのように主張するような純血性など、気にしていた様子は無い
双城総管府を裏切った武官の子で腹心が女真の李成桂が簒奪しても許されるあたり、李成桂が女真かモンゴル人かなど議論せずとも、朝鮮建国時に於いても朝鮮人の同胞意識はかなり低かったと考えざるを得ない韓国としてな何がなんでも「下賜」にしたい気持ちはわからないでもないし、
それを歪曲する学者が存在することをわかるけど、
韓国人全員が「下賜ニダ!」と信じる馬鹿さは理解を超越しているよね。
馬鹿の考え休むに似たり。
韓国人はモノゴトを考えるだけ無駄だし迷惑。不鮮明だった文字が一部判明したみたいですね。
国宝・七支刀、初のCT調査 不鮮明だった文字の一部がくっきりと(2025年5月20日)
https://www.asahi.com/articles/AST5M4QVYT5MUCVL01FM.html
七支刀は百済王が倭王に下賜した刀ニ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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