懐かしき、群山の日本の残滓を見てみたいです。
정말로 94세 노인?
>>13
日本人熊本が建築して医療施設として使われたという。>>17
お祖父さんは、最近の群山の景色を見たことはありません。
だから懐かしいのでしょうね。
色々とネットで検索して写真を取り込んで見せたら知っている建築物が結構残っているようですね。
最初の写真の穀物商だった、広津家邸宅は知っているようです。
住んでいた広津氏にも面識があり知っているようです。>>23
빵집 이성당은 100년 전통을 자랑한다. 상호는 1945년 해방과 함께 지어졌다. 이성당은 일본인 히로세 야스타로(廣瀨安太郎)가 1910년께 지금은 군산시 영화동(대화정)에 개업한 '이즈모야'(出雲屋)에서 출발한다. 야스타로는 일본 시마네 현 이즈모시(出雲市)에 살았으며 아들들의 군 복무를 피하기 위해 1906년 군산 이주를 결행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성당의 전신 이즈모야는 찹쌀을 곱게 빻아 반죽해 약한 불에 살짝 데치거나 기름에 튀겨내는 화과자(和菓子) 일종인 아라레(あられ) 전문 과자점이었다. 향긋한 맛을 더하기 위해 새우, 해태(김) 등 해산물을 넣거나 쑥을 넣어 만들기도 했다. 일본에서 과자와 제면 기술을 익혔던 야스타로는 새우를 넣어 만든 '에비아라레'(えびあられ)를 잘 만들었다 한다.
초기 이즈모야는 대화정(大和町)에 있었다. 당시 대화정은 지금의 영화동 부근으로 군산의 중심가였다. 사진 속 이즈모야는 일본식 목조건물로 기초공사가 안 된 하꼬방(판잣집) 수준이다. 발전 시설이 갖춰지지 않은 때여서 가게에 전등도 밝히지 못하고, 과자도 장작불에 구워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군산전기'가 전기사업을 공식적으로 시작한 때는1912년 4월 1일이었다.1920년대 초, 야스타로는 일을 도와주던 큰아들(겐이치)을 동경으로 유학 보낸다. 겐이치는 일본에서 단팥빵, 크림빵, 케이크와 같은 서양 제빵·제과 기술을 배워온다. 그리고 솜씨가 좋은 동생(스케지로)과 함께 다양한 빵과 과자를 만들기 시작한다. 훗날 겐이치는 이즈모야를 물려받고, 스케지로는 분점을 운영하면서 형의 사업을 돕는다.
당시 군산 제과업자들은 빵의 주재료인 밀가루는 군산에서 구하고, 설탕·버터·치즈·향료 같은 부재료는 일본에 본사를 둔 메이지 제과를 통해 공급받았다. 아버지를 닮아 사업수완이 뛰어났던 겐이치는 다른 업소들 주문을 대신 해주는 중간 도매상 역할을 하면서 수수료를 챙겼다. 그리고 이즈모야에서는 메이지제과가 취급하는 캐러멜, 초콜릿, 사탕 등도 팔았다.
>>24정확한 시기는 확인할 수 없지만 군산좌, 희소관 등 시내 극장에서도 화과자를 팔았다. 거리의 행상도 있었다. 행상은 주로 조선 사람이었고, 간혹 일본 소년도 있었다. 출출할 저녁 무렵이면 당고(짬짬이)나 모찌(찹쌀떡), 요깡(양갱) 등을 사라고 외치며 거리를 활보했다. 당시 행상들은 화과자가 담긴 나무상자 양쪽 귀퉁이에 광목 끈을 길게 연결해서 목에 걸고 다녔다 한다.
상호와 전화번호가 좌우로 배치된 이즈모야 광고는 찹쌀과자와 각종 떡, 토산물 등을 취급하며 주문을 받아 납품한다고 홍보하고 있다. 당시 이즈모야는 일본에서 들여온 조리기구와 자동화 기계를 설치하고 여러 종류의 빵(식빵, 팥빵, 크림빵, 과자빵 등)과 떡, 과자를 만들었다. 그중 떡은 정월(일본 설)이나 기념일이 가까워지면 은행, 기업체 등에서 다량으로 주문이 들어왔고 배달은 삼륜차와 자전거를 이용했다.
조선 시대 대감댁 다과상을 떠오르게 하는 사각반 모양의 소반 그림은 이즈모야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여겨진다. 초기 개업시절 간판과 명치정 시절(1930년대)에 제작한 대형 간판에도 같은 모양의 소반 그림이 보인다.
신문 발행연도인 1926년은 군산항 부잔교 준공식에 참석한 사이토 총독이 부두에 산처럼 쌓인 쌀을 보고 '오, 고메노 군산!'(쌀의 군산)을 외쳤던 그해다. 이즈모야가 위치한 '명치정'과 내항을 연결하는 해망굴도 그해 개통된다. 부청(시청) 이전을 앞두고 바둑판 같은 격자형 도시 권역도 지금의 월명동, 신흥동까지 확대되는 시기다. 일본인 제과업자들 친목 모임인 '군산 과자상조합'도 있었다고 한다.자그만 아라레 전문점으로 출발한 이즈모야는 1920년대 들어 조선인 상가 밀집 지역인 영정(송방골목)에 분점을 개설한다. 가업을 이어받은 겐이치는 1930년대 초 번화가인 명치정(지금의 이성당 자리)에 있는 2층 목조건물로 확장 이전한다. 그리고 한쪽 공간을 커피숍과 레스토랑을 겸한다. 레스토랑에서는 런치 정식, 돈가스, 오므라이스 등을 팔았다.
1930년대 명치정은 부청(府廳)을 비롯해 부영도서관, 군산의료원, 군산금융조합, 군산산업조합, 군산상공회의소, 군산심상고등소학교, 전매국 군산판매소, 미나카이(三中井) 백화점, 사진관, 고급요리점, 카페, 가구점, 문구점, 서점, 식료품점, 양품점, 병원, 운동구점, 종묘원 등 동서양 건축양식이 혼합된 현대식 건축물이 즐비해 이국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부인과 5남매를 데리고 대한해협을 건너온 히로세 야스타로. 그의 가족들은 일제 식민통치 36년 동안 이즈모야 명성만큼이나 부(富)를 누렸다. 그러나 1945년 해방과 함께 그들의 운명도 바뀐다. 귀국 보따리를 싸야 했던 것. 겐이치는 재산과 이즈모야 명성을 지키겠다면서 1개월여를 완강히 버티다가 먼저 귀국했던 부인이 다시 돌아와 설득하자 마지못해 귀국선에 오른다. 당시 그의 나이 쉰하나. 분노에 앞서 '인생무상'을 느끼게 한다.
라고 신문기사에서 그랬음이렇게 이즈모야의 역사가 끝나고 이씨가 매입, 발전시키면서 지역 명소가 되어 현재엔 백화점에 분점까지 내놓고 있다.
米を運んだ鉄道の「群山~浮き橋・鉄道」なんかも知っているようです。
これもネットに動画が上がっていたので見せたのですが、周りに家が立ち並んでいて驚いていました。
当時は、周囲には何も無かったそうです。「出雲屋」は今も健在なのですね。
当時の群山は銀行や商業会館など日本の都市と変わらないぐらい立派な建物が建ってたとも言っていました。>>29
그때 부교 남아있을걸? 아마 이것같은데. 근대유산으로 취급됨.ネットで少しは分かっていましたが、反日の韓国で日帝残滓である当時の建物がここまで完璧に保存されているとは思いませんでした。
群山では、日本の建築物は破壊されずに綺麗に残っているのですね。
一つ質問して宜しいでしょうか?
韓国では、多くの日本統治時代の建築物が取り壊されましたが。
どうして、群山だけここまで保存することが出来たのでしょうか?>>34
대부분의 일제시기 건물들은 한국 전쟁으로 파괴되거나 1960년대,70년대의 대규모 수도권, 경상도 지역의 재개발 시점에서 철거되었고,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총독부 관사도 95년경에 철거되었다.
군산은 전라도 북부지역에 위치해 전쟁의 피해도, 대규모 재개발도 비교적 최근이었으니까, 그무렵엔 건물을 문화재로 등록하거나 관광지로 재개발하는 쪽으로 선회했겠지.
서울에 경성당시 문화재가 거의 없는 이유도 위와 같음. 개발을 엄청나게 했으니까.>>37
없어. 내가 젊은이고 고등학교 졸업에 대학 재수까지 하지만, 중2던 이명박 독도방문사건 당시를 빼고는 한번도 현실에서 반일감정을 본적이 없었다.
적어도 사회에서는 '내'가 어떻게 살고 무엇을 하느냐에 집중하며 살아가니까 사람들이 뉴스도 국내이슈가 아니면 잘 챙겨보지도 않았음.
반일이 작동하는것도 과거에 대한 이슈, 자민당 위주의 정치가 아니면 작동하지도 않고, 영화들도 대부분 역사적 이슈를 건드리는 중.
역사, 그리고 정치를 빼고 "일본이 무엇이냐?" 고 하면 남자들은 AV나 아니메 얘기밖에 못할걸? 그정도로 무관심해.
개인적으로 고2 당시에 아버지가 일본인이던, 그래서 성이 이가라시던 애를 봤지만 이지메나 반일같은건 듣도보도 못했다.
요약하자면, 역사나 정치를 뺀 나머지에 대해선 오히려 우호에 가깝거나 무관심하다.>>37
최근에는 오히려 일본식 건물을 짓기도 한다
서울의 일본음식점에 써있는 일본어를 보면 혼란스럽다그리고 뭐, 군산에 있는 건축물들이 딱히 우리를 탄압하려고 만든것까진 아니잖아? 그런걸 보겠다면 서대문 형무소에 가겠지.
뭔가 특이해. 내가 가봤지만 거기 구시가지는 매력있어. 그냥 그래서 가는거야.政府と社会は反日でも韓国人はそんなに日本には興味(歴史と領土は別)が無いのですね。
韓国人が日本に旅行でよく来ますが嫌いな日本にどうして旅行に来るのか不思議でした。
韓国という国は、複雑なのだと実感しました。군산의 전성기는 일제시대였겠지
지금은 전라도 변방의 시골도시
발전이 더딘 시골이니까 옛날 가옥들이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46
交通が不便なのですね。
調べてみたらソウルから高速バスが出ているようですね。
2~3時間ほどかかるみたいですけど。
宿泊施設もあるみたい。>>48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
大変参考になります。古い建物は建築がキレイですね〜。
私も橋を撮りましたよ。>>51
見覚えあると思ったら、これは和歌山県のの和歌浦ですね。
韓国でも有名な「雑賀一族」の発祥地で本拠地ですね。W2戦争中に、群山で生まれた日本人です。両親は、群山市郊外の「新豊里」で米作農家でした。おそらく今は、市街化して田園の面影はないでしょうね。
今も元気な母は、大勢の現地の人と仲良く米を作った話を良くします。日本の敗戦で、引き揚げるとき、現地の皆さんと泣いて別れたそうです
元気な間に、群山を訪問したいと思うことがありますが、ネット見ると激しい反日感情などが依然として有る現状から、田舎を日本人が一人歩いても安全なのだろうかと躊躇する気持ちもあります。>>54
多くの韓国人にとって、反日という感情はあまりみられない気がします
日本人から見た「韓国人の反日」は、韓国人の愛国なのだと思います
だから、日本人から見れば、「反日なのに、なぜ、たくさん日本に遊びに来るのか?」という疑問も、韓国人の意識では「愛国してるだけだから」と考えれば理解できます
韓国人の愛国は「比較」に基づき、「感情的」な表現になります
日本人とは逆みたいです
日本人は韓国人の反日行為に対して、証拠を見せ、証拠を求め、その証拠の検証を求めます
しかし、韓国人にしてみれば、愛国に証拠は要らない。行動あるのみなのです
文化が違うのです
日本人が韓国人の反日を批判しても、韓国人にとっては愛国を批判されたことになります
ここに、日韓の長年の平行線の、大きな理由のひとつがあるように感じます
だから、韓国で注意すべき反日は、愛国につながる反日
愛国につながりにくい反日なんかは、気にしなくてもいいと思います
たとえば、一般の日本人観光客への攻撃とかはないと思います
逆に、韓国人の親切さに驚かれるかもしれません
ただ、ボッタクリには注意してください
観光客は誰であっても被害にあう可能性があります>>55
私の懸念は、韓国の田舎を歩いていて、昔のこととは言え元植民地時代の地主の子孫に対して、特別な視線を受けるのではないかということでした。
ネットなどで報道される韓国の地域の記念日には、仮装した日本兵を退治する行事があることを知り、日本人に対する敵愾心を永遠に残そうとする韓国人には近寄りがたいものを感じます。
一般旅行者にとっては通常のリスク以外に問題はないということですね。韓国の反日について丁寧なアドバイスありがとうございました。郡山で日韓友好を!
群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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