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人と共に戦った朝鮮人

112

  • 1名無し2016/10/27(Thu) 12:58:19ID:QwMjQ0MTE通報

    大日本帝国による韓国併合が「反日ナショナリズム」の淵源なのだろう。
    しかし、戦時中、少なからぬ朝鮮人が「日本と共に戦いたい」と入隊を希望したのも事実。
    朝鮮人としての誇りを忘れることなく、日本軍の一員として戦ったのだ。
    決して「強制」ではなかったことを知ってほしい。

    http://ironna.jp/theme/325

  • 63名無し2016/10/29(Sat) 15:37:50ID:A1MDY2OTA(2/2)NG通報

    >>54
    当時から他力本願で怠惰などうしようもない民族だったのですね

  • 64名無し2016/10/29(Sat) 17:07:51ID:Y4MjAyMDk(2/2)NG通報

    当時の事を軽々しく言えないけども、志願した朝鮮人は、様々思惑を抱えながらも、朝鮮人の今後の身分の為、差別が無くなるようにと頑張ってたんじゃないですかね?

    親日派とかで断罪されてる韓国人も、朝鮮人の未来の為にと、それぞれの方法で動いてたんだと思うんだけど。一方的な今の韓国の価値観だけで罪人みたいな扱いになるのは残念だよね。
    自分の利益の為ってのが前提にあるのかもだけど、その人も朝鮮人なら朝鮮人の利益の為ですからね。

  • 65名無し2016/10/29(Sat) 21:45:01ID:MxNDU5MjY(1/1)NG通報

    歴史の資料をみれば当時の朝鮮人が日本人として戦った証拠はいくらでもある
    それを今の朝鮮人が否定するんだから笑えるな
    朝鮮人よ、歴史を忘れた民族に未来は無い

  • 66名無し2016/10/30(Sun) 13:42:33ID:Q0Njc1ODA(1/5)NG通報

    >>16
    アホですか?(笑)士官候補の募集に対し数百倍の朝鮮人の若者が応募し、列をなし、大陸最強といわれた戦車部隊の指揮官を勤めた少将は朝鮮人だった。差別があって最強の部隊を任せたりするかね?台湾人も優秀な技術者は零戦などの設計に迄携わっていた。朝鮮人であろうと台湾人で有ろうと有能な者は採用されていた。現実の話として挙げるならば朝鮮人は李氏朝鮮時代まで民族の半数が奴隷のようなものだった。つまりは読み書き最低限の教育すらまともに受けてこなかった訳だ。日本では江戸時代から少なくとも読み書きレベルは農民でもかなりの者ができた。この差があった以上対等になどなるわけわない。つまりは民族のレベルの差が日本人、台湾人、朝鮮人の起用の差になったにすぎない。現にソウル大学は日本の帝国大学として作られてるだろ?朝鮮人も能力が有れば大学迄通えたわけだ。そこの所、韓国人の意見を聞きたいね。あれ?そういえばソウル大学なんか日本残滓の代表みたいなものなのになんで壊さないのかな?(笑)ソウルの下水道は未だに日本が併合時代に作った物が現役だと言うけど壊さないのかな?(笑)

  • 67名無し2016/10/30(Sun) 13:48:31ID:Q0Njc1ODA(2/5)NG通報

    ほらよ。よく読め。

    旧日本軍出身の韓国人は、日本統治終了後、韓国軍の主力として朝鮮戦争などでも指導的役割を果し、第18代までの韓国陸軍参謀総長は全て旧軍出身者で占められていた。21世紀になると、日本軍の将官、高級将校を務めたものは貴族院議員、衆議院議員、道知事、裁判官、朝鮮総督府高官などを務めた朝鮮人と同様に親日反民族行為者と認定されている。他方、北朝鮮においては、旧軍の将校以上の地位にあった者は対敵協力者としてほとんどが粛清され、ソビエト連邦の士官養成教育を受けた者たちが朝鮮人民軍将校団の主軸となった。

    将官 編集
    洪思翊 - 中将(戦犯処刑)
    趙東潤 - 中将
    李秉武 - 中将(丁未七賊)
    趙性根 - 中将
    魚潭(西川潭一) - 中将
    李垠 - 中将(李王)
    李煕斗 - 少将
    金應善(宇都宮金吾) - 少将
    王瑜植 - 少将

  • 68名無し2016/10/30(Sun) 13:57:14ID:gyODk5OTA(2/3)NG通報

    今の大統領のお父さんもいましたねw
    大統領が親日罪ですか?

  • 69名無し2016/10/30(Sun) 14:01:34ID:Q0Njc1ODA(3/5)NG通報

    ※66の訂正
    戦車部隊の指揮官は金錫源だわ。「金錫源の部隊に出会ったら戦うより逃げろ」と中国軍では言われてたらしい。金錫源の日本軍における階級は大佐。これは叩き上げとしては洪思翊についで高い階級。朝鮮戦争に韓国軍の少将として参戦。功績をあげるも李承晩に意見する為疎まれ失脚。李承晩がゴミみたいな奴なのに韓国の為に戦った金錫源が親日派辞典?(こんなくだらないもの必要かね?)に載ってる事が違和感しか感じないんだけど?

  • 70名無し2016/10/30(Sun) 14:04:05ID:Q0Njc1ODA(4/5)NG通報

    >>68
    確か、朴正煕は血判状みたいなことして軍人になりたいとか書いて「国を思う勇敢な少年」みたいな記事で新聞に載ってたらしいね。

  • 71名無し2016/10/30(Sun) 15:26:51ID:E5ODQxNzA(2/2)NG通報

    >>66
    志願兵は強制だったそうだ>>54

  • 72名無し2016/10/30(Sun) 15:31:20ID:gyODk5OTA(3/3)NG通報

    >>70
    血判状ですか・・・物凄い強制性が感じられますねw

    白馬鹿さん見てるヽ(´▽`)/

  • 73名無し2016/10/30(Sun) 17:31:34ID:Q0Njc1ODA(5/5)NG通報

    >>72
    これかな。

  • 74名無し2016/10/30(Sun) 21:26:42ID:Q1NTg1MzA(8/25)NG通報

    >>44
    君は歴史を知らないようだから教えてあげる。
    日本軍の死者は100万人以上が餓死と病死だ。
    日本人も飢えに苦しんで骨と皮だけになったんだよ。
    朝鮮人の日本兵だけが困窮していたわけではない。

    君たち反日韓国人がよくやる扇動で、日本軍がした一部の
    蛮行をもって全ての日本軍がそうだったと捏造扇動することだ。

    南京大虐殺にしても日本軍が来るということで住民は十万人以上が
    逃げ出して人口が半分くらいまで減ったのに、日本軍が来ても
    住民は平和な状態だったから一気に戻ってきたんだ。

    一般人への虐殺もあったが、それは便衣兵という民間人の恰好をした敵兵が
    民間人に紛れていたので民間人ごと虐殺してしまった。
    日本軍が南京に入った時の写真を見てみろ。子供や大人が笑顔で日本軍と
    一緒に写っている。自分を殺そうとしてる日本軍に笑うことなんかできるか?

    画像は、1937.11.6 南京占領前。日本兵と中国人の子ども。江南地方にて

  • 75名無し2016/10/30(Sun) 21:28:27ID:Q1NTg1MzA(9/25)NG通報

    1937.12.17 日本軍の南京入城式

    何で南京の住民が笑顔で万歳をしてるんだ?

  • 76名無し2016/10/30(Sun) 21:29:02ID:Q1NTg1MzA(10/25)NG通報

    1937.12.20 南京占領7日後。日本兵から菓子をもらって喜ぶ南京の家族

  • 77名無し2016/10/30(Sun) 21:29:36ID:Q1NTg1MzA(11/25)NG通報

    1937.12.20 南京占領の7日後。疫病防止のため南京市民に予防措置を施す日本の衛生兵

  • 78名無し2016/10/30(Sun) 21:30:42ID:Q1NTg1MzA(12/25)NG通報

    1937.12.20南京占領の7日後。南京市民と談笑する日本兵

  • 79名無し2016/10/30(Sun) 21:31:53ID:Q1NTg1MzA(13/25)NG通報

    中国人の子供と日本兵

  • 80名無し2016/10/30(Sun) 21:33:59ID:Q1NTg1MzA(14/25)NG通報

    1938年「中国無名戦士の墓」と書かれた墓標の前で、慰霊祭を行う日本兵

  • 81名無し2016/10/30(Sun) 21:36:52ID:Q1NTg1MzA(15/25)NG通報

    孫文の銅像に青天白日旗をかける日本兵

  • 82名無し2016/10/30(Sun) 21:37:33ID:Q1NTg1MzA(16/25)NG通報

    中国人の子供に芸を披露する日本兵(1938年)

  • 83名無し2016/10/30(Sun) 21:57:46ID:Q1NTg1MzA(17/25)NG通報

    孟子朝に参詣する日本軍人の心得。

    孟子は孔子と共に支那人が最も尊崇する偉人である。
    我ら日本人にとっても精神的文化の大恩人である。
    日本における神社仏閣への参拝と同様に慎み深く行動せよ。

  • 84名無し2016/10/30(Sun) 21:58:44ID:Q1NTg1MzA(18/25)NG通報

    南京千両2日目の市民

  • 85名無し2016/10/30(Sun) 22:00:33ID:Q1NTg1MzA(19/25)NG通報

    >>84 訂正
    南京占領2日目の市民


    南京陥落直後。南京近郊にて中国人の子供と手をつないで歩く赤星昂(あかぼしたかし)少尉

  • 86名無し2016/10/30(Sun) 22:01:02ID:Q1NTg1MzA(20/25)NG通報

    南京市民に食糧や菓子を配る日本兵

  • 87名無し2016/10/30(Sun) 22:03:37ID:Q1NTg1MzA(21/25)NG通報

    英国の新聞「north China daily news」に掲載された
    南京市民に食糧等を配る日本兵たち

  • 88名無し2016/10/30(Sun) 22:04:45ID:Q1NTg1MzA(22/25)NG通報

    日本兵と遊ぶ中国人児童たち(1937年)

  • 89名無し2016/10/30(Sun) 22:06:31ID:Q1NTg1MzA(23/25)NG通報

    天津 大和公園の日本軍部隊に遊びに来た中国人の子供たち

  • 90名無し2016/10/30(Sun) 22:08:06ID:Q1NTg1MzA(24/25)NG通報

    平和の戻った南京で、ジョン・マギー牧師のもと日曜礼拝を持つ中国人クリスチャンたち。

  • 91名無し2016/10/30(Sun) 22:10:15ID:ExNzM1MDA(1/1)NG通報

    朝鮮人も日本人と共に戦い、戦犯に処せられた事実は韓国にとって建国を否定されます
    そのため自分達を被害者、日本を加害者として置いておく事が何よりも必要なのです
    「悪辣な日本軍国主義と独立を賭けて戦い、建国した」
    この神話の上に現在の韓国が成り立っていると言えるでしょう
    まさにこれは彼らが口にする「歴史を忘れた民族に未来は無い」
    を自らが実行している皮肉な事実です

  • 92名無し2016/10/30(Sun) 22:11:56ID:Q1NTg1MzA(25/25)NG通報

    南京占領の14日後 南京の中国人家族と日本兵

  • 93ㅇㅇ2016/10/31(Mon) 13:27:40ID:I1NzcyNDM(1/6)NG通報

    제가 조선에 징병제를 실시한 것은 1943년 3월 1일자로 개정병역법을 시행하면서부터이다.
    그러나 이 징병제가 실시되기 이전부터 육군지원병·해군지원병·학도지원병 등 지원이라는 이름 아래 조선 장정들이 병원(兵員)으로 동원되고 있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징병은 이러한 지원병 동원까지를 포함한 넓은 개념으로 인식해야 하고, 이에 대한 거부운동 또한 전체로서 파악해야 한다.
    중일전쟁 이후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할 때까지, 일제가 조선 청년을 군인으로 동원한 과정은 몇 단계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일제는 1937년에 도발한 중일전쟁이 확전되어가자, 조선에 대한 황민화정책(皇民化政策)이 추진되는 상황에서 자질이 우수한 조선 청년들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보다 병력으로 흡수하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착안하였다.
    그리하여 1938년 2월, 칙령 제95호로써 〈조선육군특별지원병령〉을 공포하였다. 이에 따라 연령 만 17세 이상으로서, 소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을 가진 자는 육군 특별지원병으로 지원할 수 있도록 하였다. 지원자로서 신체검사 합격자는 조선총독부 육군병지 원자훈련소에서 4개월의 훈련을 받은 다음 현역 입대하거나 제1보충역에 편입되었다.

  • 94ㅇㅇ2016/10/31(Mon) 13:27:50ID:I1NzcyNDM(2/6)NG通報

    그러나 말이 지원병일 뿐, 경찰서를 비롯한 각 행정기관과 어용단체, 홍보기관 등이 총동원되어 지원을 강요하고, 또 직장별·지역별 지원경쟁을 부추김으로써, 해당자들은 지원하지 않고 배겨낼 수 없는 상황에 몰렸다.

    그리하여 전국의 총지원자는 첫 연도인 1938년에 2,964명이던 것이, 1942년에는 무려 25만1594명에 이르는 기현상을 나타내었다. 이러한 결과로, 징병제 실시로 지원병제가 폐지되는 1943년도까지 총 1만7664명이 육군지원병으로 동원되었다.

    이어서 일제는 1943년 7월 칙령 제108호로 〈해군특별지원병령〉을 공포, 8월부터 시행함으로써 다시 해군지원병이 동원되었다. 같은 해 10월에 제1기생 1,000명, 1944년 4월에 제2기생 2,000명이 진해에 있는 해군병지원자 훈련소에 입소해 6개월의 훈련을 받은 뒤 해병단(海兵團)에 입대하였다.

    다음 단계로 나타난 것이 이른바 학도지원병이다. 태평양전쟁에서의 병력 소모가 가속화되자, 일제는 1943년 10월 병역법 일부를 개정하여, 고등·전문학교 이상 재학 중의 법문계(法文系) 학생에 대한 징집유예제도를 폐지하였다. 이에 따라 그간 징집유예를 받고 있던 일본의 법문계 학생들이 같은 해 11월 일제히 입대하였다.

  • 95ㅇㅇ2016/10/31(Mon) 13:27:59ID:I1NzcyNDM(3/6)NG通報

    이와 관련해 일본정부는 같은 해 10월 육군성령(陸軍省令) 제48호로써 〈쇼와(昭和) 18년도 육군특별지원병 임시채용규칙〉을 공포해, 병역의무가 없는 조선 학생들에 대해서도 법문계 재학생 또는 졸업생의 병원 동원을 강행하였다. 이 조치로 국내외를 통해 4,385명의 해당자들이 1944년 1월 20일 일제히 일본군문으로 끌려갔다.

    이러한 예비과정을 거치는 한편, 1943년 8월부터 시행한 개정병역법에 의해 전면적 징병제 실시단계로 들어갔다. 이에 따라 1944년 4월 1일부터 8월 20일 사이에 제1회 징병검사가 실시되어 모두 20만6057명이 징병검사를 받았고, 합격자들은 1944년 9월부터 1945년의 일제 패망 때까지 순차적으로 징집되었다. 입대 인원은 최소한 18만4000명 이상인 것으로 추계되고 있다.

    일제는 지원병·학도병·징병 등의 동원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결코 그들의 뜻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 계도·권장·강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기피, 거부하는 저항이 일어났다. 우선 학도지원병의 경우, 적지않은 인원이 지원을 거부, 기피해 응하지 않았다. 그 중에는 산악지대에 은신처를 마련, 동지를 규합해 집단생활을 하면서 무장투쟁을 준비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경상남도 함양군 출신 하준식(河俊植)이 학병 지원을 거부, 덕유산 은신골로 피신해 징용·징병 기피자 73명을 규합, 광명당(光明黨)을 조직해 후방 교란 게릴라전을 기도한 것은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런 저항적인 거부운동은 전국 주요 산악지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지리산·운문산·포천군 산악지대, 금강산 등은 주요 근거지였다.

  • 96ㅇㅇ2016/10/31(Mon) 13:28:09ID:I1NzcyNDM(4/6)NG通報

    학도병으로 입대한 경우에도 교육중의 일본군부대에서 반란과 집단탈출을 모의하거나, 일선에서 연합군측으로 탈출해 항일대열에 참가하는 예가 허다하였다. 1944년 8월에 있었던 대구 제24부대 학병들의 집단탈출사건, 같은 해 11월에 발각된 평양사단(平壤師團) 산하 각 부대 학병들의 반란 및 집단탈출 모의 등은 대표적 반군사건으로 일제에 큰 충격을 던졌다.

    한편, 전선으로 동원된 뒤 중국군 지역으로 탈출해 광복군(光復軍) 또는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으로 넘어가거나, 남방전선에서 미·영군(美英軍)측에 투항해 항일전열에 참가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학도지원병에서 이러한 저항이 일어난 것은 일본이 패전에 대한 확신과 일본군대에 동원되는 것에 대한 민족적 저항심 때문이었다.

    징병에 있어서도 이를 반대, 거부하는 저항이 일어났다. 1944년 4월부터 제1회 징병검사가 실시될 때 국내외의 적령장정 총수 26만6225명(국외거주자 5만2059명) 중 수검예정인원은 21만8659명이었다. 그러나 수검기일인 8월 20일까지 수검하지 않은 인원이 5.8%인 1만2602명에 달하였다. 이는 갖가지 방법으로 징병검사에 불응한 인원이다.

    이러한 징병검사 불응·기피에 대해 총독부가 작성한 ‘제85회제국의회예산설명자료’는, ‘징병 곧 전사라는 그릇된 관념에 아직도 사로잡힌 채, 적령자로 하여금 도피하게 해 소재를 감추고, 혹은 호적연령을 정정해 이를 기피하려’' 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징병검사를 받고 징집에 응하지 않은 인원이 얼마나 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일제 당국으로서는 예상하지 못한 많은 인원이 징병을 거부했던 사실은 그들의 기록에서 나타나 있다.

  • 97ㅇㅇ2016/10/31(Mon) 13:28:18ID:I1NzcyNDM(5/6)NG通報

    현재 지원병 제도가 거의 지원동기가 불순하고 권력에 눌려서 낸 자도 있으며 또 지원병 대부분이 지방관청의 모집률 통계 다툼에 의한 것으로 룸펜군과 같이 보이지 않을까 우려되며 명예로운 황군사상에 큰 오점을 남기니 신중히 고려해야 한다

    ㅡ당시 도쿄의 잡지였던 "동아연맹"에 기재되었다가 "조선 내의 치안 방해"라는 이유로 삭제 처분을 받은 기사


    樋口雄一, 『皇軍兵士にされた朝鮮人-十五年戰爭下の總動員體制の硏究』, 社會評論社, 1991, 93쪽.

    ㅡ일본군 내에서 조선인들이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는것에 대한 반박 사료

    징병제 실시 이전까지 군사동원은 모두 ‘지원’의 형식이었다. 하지만 병력을 동원하기 위해 일제의 행정·경찰 기구가 적극 개입하고 있었다. 조선총독부가 제출한 「제79회 제국의회 설명자료」에 보면, 1941년도 육군특별지원병 총 지원자 145,046명 중 자발적으로 지원한 자는 50,184명이고, 관청의 종용에 의해 지원한 자는 79,672명, 기타 15,190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ㅡ관련자료: 「제79회 제국의회 설명자료」, 『조선총독부 제국의회 설명자료』 6, 不二出版社, 1994, 104쪽.

    . 학도지원병의 경우에도 함경북도 청진 검사정의 보고에 의하면 지원자 256명 중 “자발적으로 지원하였다고 볼 수 있는 자는 도내 겨우 10명 내외에 불과하고, 다른 대부분은 모두 농후한 지도적 격려를 더하면서 결의 지원한 자”라고 하였고,

    관련자료ㅡ 高等法院檢事局, 「臨時陸軍特別支援兵の動向一斑」, 『朝鮮檢察要報』 1, 1944. 3, 2쪽.

  • 98ㅇㅇ2016/10/31(Mon) 13:28:41ID:I1NzcyNDM(6/6)NG通報

    >>93

    문장의 첫시작

    제가 -> 일본제국이

  • 99名無し2016/10/31(Mon) 16:46:26ID:IyNDEwNjM(2/4)NG通報

    日本帝国内の立場による違いが見て取れるね。
    朝鮮総督府は韓国人を積極的に日本軍にしたかった。
    逆に日本軍は、採用に消極的だった。
    創氏改名の時にも見られた構図だな。
    あの時も朝鮮総督府が改名を積極的に推進して、日本の国会議員や警察は改名に反対していた。
    結局、当時の日本人は朝鮮民族をどのように扱うかを、どのような地位にするかを決められなかったんだね。

  • 100名無し2016/10/31(Mon) 18:37:11ID:I3MjE4NjI(1/2)NG通報

    일본인들은 일본군 출신 한국군을 같이 싸운 동지라 포장하고 그들이 한국에서 같은 나라였던 일본을 위해 싸운것을 박수받고 경의를 받는걸 바라는거 같다. 글쌔, 세상 어느 독립 국가들중에 과거 지배국가의 종군한 사람들을 영웅으로 모시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단적인 예를들면 한국군의 초기 수뇌를 담당했던 만주군 출신들이 만든 간도특설대가 활동하던 간도는 1937년 기준 총인구의 71퍼센트인 46만명이 조선인이었고, 중국당국이 공인한 연변의 항일투사 3125명중 98퍼센트가 조선인이다. 연변대학의 명예교수이자 한국전쟁에 조선인민군으로 참전했었던 박창욱 명예교수는 조선인민군에 합류한 간도의 조선족들이 남한으로 도망간 간도특설대를 죽이자는 구호를 외치고 다녔다고 회고한다. 비록 만주군에 종군한 조선인 일본군이 후일 대한민국의 적이되는 좌익 공산계열 독립군을 상대했고 만주군 출신들도 최소한 우익계열 독립군과 싸우지 않았다고 우리는 죄가 없다, 현실에 충실했을 뿐이다 스스로 합리화하지만 글쌔, 보통 사람이 보기엔 역시나 유태인 게토 경찰따위로 밖에 보이지 않아

  • 101名無し2016/10/31(Mon) 18:39:51ID:I3MjE4NjI(2/2)NG通報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해방시키려 했다는 서구 제국의 강압에 신음받던 동남아 국가들중에 서구제국에 붙어서 일본을 공격했던 반일 게릴라를 부정적으로 바라볼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서양인들 입장에선 우리들이 개발하고 잘 살게해준, 인프라를 정비하고 근대적 학교를세운 서구제국에 감사하며 충성하는 서구제국의 만주군일 뿐이야

  • 102名無し2016/10/31(Mon) 19:40:36ID:IyNDEwNjM(3/4)NG通報

    >>101
    東南アジアの反日ゲリラに否定的な日本人って全く聞いたことない。
    特にフィリピンなんて反日ゲリラができて当たり前とすら思う。

  • 103名無し2016/10/31(Mon) 19:47:38ID:IyNDEwNjM(4/4)NG通報

    >>100
    日本人は朝鮮出身の軍人が日本のために戦ったことを評価しているのではなくて、
    太平洋戦争後に韓国のために貢献したことを評価しているのです。
    靖国神社で祭られている朝鮮出身の軍人には、日本人として感謝と慰霊をしていますが。

  • 104名無し2016/10/31(Mon) 21:20:32ID:czNTI3MTY(1/2)NG通報

    >>103

    그렇다면 한국인의 평가는 한국인에게 맞기고 일본인으로 죽은 조선인은 일본분이 평가하면 됩니다. 한국인이라고 전부 일본군에 종사한 조선인을 욕하는것도 아니고, 일본군 복무를 후회했고 한국의 독재정권에 대항했던 김석원 장군이나 이종찬장군은 한국인도 존경하고 있으며 적어도 신태용 장군처럼 자숙한 장군에겐 일본군에 복무했다 공격하지 않아요. 백선엽은 그런게 없었기에 평가가 박할 뿐입니다.

  • 105名無し2016/10/31(Mon) 21:23:57ID:czNTI3MTY(2/2)NG通報

    참고로 김석원 장군은 일본군 대좌에 오른 사람이고 이종찬 장군은 일본군 최고훈장을 받고 소좌에 올라 연대장 대리를 하다가 종전을 맞은 사람이다. 하지만 이 사람들에게 극좌민족주의 단체가 아닌이상 반역자라 욕하지 않아 홍사익도 마찬가지다. 욕먹는다는 백선엽도 한국 국방부가 극진하게 예우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그의 회고록을 기반으로 한 만화도 연재되고 있다

  • 106名無し2016/11/04(Fri) 18:50:09ID:IxNDIzMDQ(2/6)NG通報

    >>105
    韓国人で、ここまで長文でコメントをしてくれている。有り難う。

    ちゃんと読み取りたいのだが、翻訳後の日本語が、文章の体をなしていない。
    意味不明なのだよ・・。
    きっと日本のコメントも、ハングル語に変換すると、意味不明なんだろうな。
    言葉の壁は、殊の外厳しい。
    二国語を話せる通訳が必要だと思うよ。


    ※  これだけは言っておく。 日本人は、嘘をつかない!
       それを恥とするからだ。 

  • 107名無し2016/11/05(Sat) 15:40:50ID:k5MDY5MTU(1/1)NG通報

    >>27

    猿で結構!
    ゴキブリよりマシww

  • 108名無し2016/11/07(Mon) 12:35:04ID:M4NjUwODI(3/6)NG通報

    >>27
    へぇ~! 転無理矢理引っ張られて行ったのか~ 意気地無しの反日ゴキブリ共

  • 109名無し2016/11/07(Mon) 12:39:26ID:M4NjUwODI(4/6)NG通報

    >>46
    日本の女性達が働いてるけど・・。誤爆か?

  • 110名無し2016/11/07(Mon) 12:47:39ID:M4NjUwODI(5/6)NG通報

    >>104
    ①バックソンヨブ ②停泊 の意味を知りたい。
     英語でお願いします。

  • 111名無し2016/11/07(Mon) 12:49:29ID:M4NjUwODI(6/6)NG通報

    >>104
    ③マトギコも、教えて。

  • 112招き猫2016/11/09(Wed) 04:59:09ID:k1NzEwNDk(1/1)NG通報

    >>106
    たまに、嘘をつく日本人もいるけどね。
    吉田清治とか、朝日の植村とか…(-_- )

    嘘をつくのを、恥だと教わるのは事実。
    何故なら日本人は、小さい時
    「嘘つきは、朝鮮人の始まり」と教わります(´・ω・`)

レス投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