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際 名將 기준으로 합니다.
高談德 (고담덕) : warlord... 50000 병력으로 遼東과 manchuria를 정복했다.
高奴子 (고노자) : 鮮卑族들에게 crashing victory를 달성했다.
乙支文德 (을지문덕) : 거대한 會戰으로 중국 세력을 격파.
楊萬春 (양만춘. 안시성주.) : 李世民의 공격을 막아냈다.
張保皐 (장보고) : war merchant. 해적토벌과 상인을 호위하는 것은 대단했다.
金法敏 (문무왕) : 買肖城의 전투. 伎伐浦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乙支文德에 비견되는 승리였다.
扶餘昌 (부여 창) : 百合野 戰鬪에서, king vs prince의 결투를 벌여 승리.
姜邯贊 (강감찬) : Battle of Kuju. 이 전투로 Khitan의 정예병력이 완전히 몰살당했다.
金慶孫 (김경손) : Battle of kuju. (vs mongol). 이 승리로 몽골의 1차 침입이 저지되었다.
金允侯 (김윤후) : 몽골 원정군 총사령관 Sartai를 죽이며 승리한다. 그러나 고려는 9차례에 거친 원정으로 국력이 탈진되어 점령되고 만다.
楊規 (양규) : vs khitan의 영웅.
拓俊京 (척준경) : THE SWORD MASTER. 인간병기. 한국사 최강의 남자.
崔瑩 (최영) : 고려 후기의 수호신. 중원을 누비며 여러 전설을 남겼다. 임진왜란 규모의 일본 해적을 혼자 토벌했다.
李成桂 (이성계) : 동아시아의 모든 세력과 싸워봤다. 그리고 모두 이겼다. 조선의 1대 국왕이다.
金宗瑞 (김종서) : 建洲女眞(àixīn juéluó 가문)의 땅을 모조리 빼앗았다. 그러나 전부 가지지 않았는데, 땅이 척박해서 결과적으로는 조금만 정복했다.
李舜臣(이순신) : 고독한 장군. 하나의 province를 방어하며 죽어가는 조국을 지원했다.
Young-Oak Kim (김영옥) : 세계 2차대전의 영웅. 3개국의 최고 훈장을 받았다.질문하기 전에 앞을 읽기를 원한다.
여기는 한국인이 일본인에 비해 적다.>>321
전략적인 면이 있었다.
여진족의 입장에서는 땅을 되찾겠다고 goryeo와 전면전을 하면 패한다.
고려는 반란이 생길 땅이 정치적 불안요소였다.
차라리 그냥 군대를 후퇴하면 그들의 goryeo에 외교가 어떻게 전개될지 뻔하지 않은가.
그들은 한민족을 절대 공격하지 않았다. 전성기에도 겁냈다.>>324
私と唐・ビンビンサイズ18
たして18cmつう意味?>>68
日本と明・朝鮮連合軍が五分五分?
9割の戦いで日本が勝ってるのにw金は中原攻略に目が向いていて、高麗には北宋と結託して後背を突くようなことをしなければ特に干渉しない方針だっただけ。
北宋の方が卑劣なことやりまくりだったので、より北宋を憎悪してたんだろうな。>>302
他所の国の王様へ悪口言う国に生まれなくて本当に良かったwage라고 말하면서 스레드를 올리는게 일본 인터넷 문화?
>>1
스레주는 왠지 europa universalis를 하는 것 같다한국과 고구려가 관계없다고 하는 일본인은 바보인가?
백제가 고구려의 유민이 남하해서 세운 나라다
그리고 고구려 부흥운동때 고구려 일부 왕족은 신라에 복속하고
성씨를 김씨성으로 바꿨다
신라말 후삼국시대엔 후백제 후고구려 같은 국가가 서로 싸웠고
후고구려의 왕건이 통일을 하면서 세워진 국가가 고려다조선 1대왕 태조 이성계와 요동정벌에 관한 이야기
"우리 태조가 기병 5천 명과 보병 1만 명을 거느리고 동북면으로부터 황초령(黃草嶺)[12]을 넘어 6백여 리를 진군해 설한령(雪寒嶺)[13]까지 이르렀으며 다시 7백여 리를 행군해 갑진일에 압록강을 건넜다. 이날 저녁 하늘에 자줏빛 기운이 가득 찼는데 그 빛줄기가 모두 남쪽으로 뻗어 있었다. 서운관(書雲觀)[14]에서 그것을 두고 맹장(猛將)의 기운이라고 보고하자 왕이, "내가 이성계를 보내니 하늘에서 응답한 것이 틀림없다." 고 기뻐했다. 당시 동녕부(東寧府)의 동지(同知) 이오로테무르(李吾魯帖木兒)는 태조가 진격해 온다는 말을 듣고 우라산성(亏羅山城)으로 이동해 들어간 다음 험한 지세에 의지해 저항하려 했다. 태조가 야둔촌(也頓村)에 당도하자 이오로테무르가 와서 응전해 보다가 잠시 후 무장을 해제하고 큰 절을 올리며, "제 선조도 본디 고려인이니 저도 고려의 신하가 되겠습니다."고 하면서 3백여 호를 거느리고 투항해 왔다. 이오로테무르는 뒤에 이원경(李原景)으로 이름을 고쳤다. 그 우두머리인 고안위(高安慰)가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농성한 채 계속 저항해오므로 아군은 성을 포위했다. 마침 태조가 활이 없는지라 종자의 활로 편전(片箭) 70여 발을 쏘았는데 모두 적군의 면상을 명중시켰다. 이에 성안에 있던 군사들은 기세가 꺾여버렸으며 고안위는 처자를 내버려둔 채 밤중에 밧줄을 타고 내려와 도주해 버렸다. 이튿날 두목 20여 명이 무리를 이끌고 성을 나와 투항했으며 이 소식을 들은 여러 성들도 모두 투항해 오니 1만을 넘는 민호가 우리에게로 넘어왔다. 노획한 소 2천여 두와 말 수백여 필을 모두 원래의 주인에게로 돌려주자 수많은 북방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며 물결같이 귀순해 왔다. 이에 따라 동쪽으로 황성(皇城), 북쪽으로 동녕부, 서쪽으로 바다, 남쪽으로 압록강에 이르는 광범한 지역에서 적이 일소되었다.
ㅡ《고려사》 공민왕 19년 봄 정월 기사."結局朝鮮は大して国家間の戦いに勝利してないってことねw
相手が大陸ってでかいのだし仕方ないだろ
日本も大陸相手じゃ元寇みたいな防衛戦以外じゃ負けか勝敗つかずってのばっか
半島の人も歴史シミュレーションやRPSをどんどん作ってさ、名作になって広まればもっと色々興味持つ人増えると思うんだけどね
大陸vs半島のおおざっぱな戦い記録になって内部ではそれなりに固まってるから難しいのかな?>>287
確か韓国では「お酒飲みました。」と言うと
レイプも過失致死も飲酒運転も死亡事故も
みんな無罪になるんだよね。
それは韓国だけだから。>>339
아 아니었네>>339
うまくこの系統のゲームが発展していくと良いね!
娯楽から興味を持つ人が広まって調べる人が増える
やっぱ大衆文化が同好の士を増やす第一歩ですね>>342
イギリスがタイに対して好感度高い理由も理解出来ないのが韓国人だしほっとけ
王の権威や王室外交を否定しまくる半共産国家、左派15年の失政で教育から司法から真っ赤な情治国家だ>>350
多分ね、あったとしても中国人朝鮮人倭寇の方を攻めたんだよ
九州探題は変わらずにいて、宗氏は何かあったら毎度報告してる
対馬での日本の規模は大きくない
中国朝鮮の海賊根拠地が別にあった
そっちを攻めたのなら宗氏が関係無いので九州探題の菊池氏に報告行かない>>349
1350년 2월, 왜구는 현재의 경상남도 고성군(固城郡)인 고성을 통해 들어와 죽림, 현재의 거제시(巨濟市)인 거제를 연이어 공격하였다. 이에 합포(合浦)의 천호(千戶) 최선(崔禪), 도령(都領)이었던 양관(梁琯)이라는 인물은 왜구와 전투를 벌여 3백여명의 왜구를 죽였는데, 죽인 숫자의 왜구만 이 정도라고 한다면 규모가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수십 여년만에 왜구의 대규모 공세를 받은 조정에서는 이 일을 꽤 크게 받아들인 듯 싶은데, 왜구를 상대로 승전했다는 이야기를 듣자 조정에서는 왜적기양법석(倭賊祈禳法席)이라는 불교 관련 행사를 열며 이를 기념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앞으로 벌어질 이들의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고려 조정에서는 이권(李權)이라는 인물을 경상ㆍ전라도 도지휘사로, 유탁(柳濯)을 전라ㆍ양광도 도순문사로 삼아 혹시 모를 왜구의 다음 공격을 대비토록 했지만…… 이후 상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거의 도움이 되지 못했다.
아직 승전의 기쁨이 사라지기도 전인 불과 얼마 뒤, 여름 4월에 현재의 순천 지역인 전라남도 순천부(順天府) 앞바다에서는 무려 100여척의 왜선이 바다를 뒤덮으며 나타났다. 이 100척의 왜선들은 순천을 공격한 뒤 남원(南原)으로 향했는데, 여기서 남원은 전라북도라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즉 왜선들은 섬진강을 타고 내륙 깊숙히 진군하여 조운선(漕運船)을 모조리 약탈한 것이다. 물론 남원 뿐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도 공격을 받았는데 여기에는 구례(求禮)처럼 남원을 공격하는 길목에 있었던 곳도 있었지만, 배를 타고 남해안을 거슬러 가야 하는 장흥(長興), 심지어 서해안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영광(靈光)까지 약탈 당하고 만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서남해 전체가 단 한번의 공격에 털렸다는것.경상도 도순문사(都巡問使)로 나가있던 김속명(金續命)이 진해현(鎭海縣)에서 3천여명의 왜구를 격파한것. 이때 왜구는 김속명의 갑작스러운 기습을 당해 재빨리 배에 타서 도주하지 못하고 산으로 피할 수 밖에 없었고, 산에서 목책을 쌓고 버티려 했지만 김속명이 밀어붙여 공격을 퍼붓자 왜구는 결국 패퇴하고 말았다.
이 김속명의 승리는 당시까지 왜구에 당하던 고려가 거둔 최대의 승리였다. 왜구를 상대로 최대의 성과를 거둔 황산대첩 역시 1만 ~ 2만 사이의 왜구를 물리친 전투였으니, 3천명을 물리친 것은 대단한 것이었다. 김속명이 승리를 거둔 후 노획한 무기들을 바치니 공민왕은 중사(中使)를 보내어 옷과 술과 금띠를 하사했으며 군사들에게는 전공에 따라 관작을 주었다고 한다.
왜구는 굉장히 세력이 강했다.고려군은 왜구와 맞서 싸운 동안 가장 거대한 타격을 입는다. 무려 350여척의 왜구는 합포(合浦)의 고려군 군영을 공격하여 병선을 불지르고 박살을 내었고, 이에 죽은 고려군의 숫자는 무려 5,000명을 넘었다.
>>352
多分ごく一部の日本人海賊、多数の半島・大陸海賊の方、それ
九州探題 〈在任期間〉
⇔一色範氏 〈1336-1347〉(*~1369)二郎・宮内少輔・入道道献・九州探題。太郎・宮内少輔。尊氏派。公深の息子。母は今川国氏の娘。1336年菊池武敏を破る。足利尊氏の上洛に、仁木義長とともに九州の抑え、肥前守護。のち1337年仁木の上洛により、初代探題として大友・少弐・島津等を牽制する。1346年直氏に探題職を譲り後見。「観応の擾乱」に尊氏派。1353年筑前国にて懐良親王、菊池武光との「針摺原の合戦」に敗れる。1355年博多放棄。長門に渡る。1357年九州の経営に失敗し隠居。息に直氏、範光、範房。
⇔▽一色直氏 〈1348-1351〉(*~*1357)宮内少輔・右京権大夫・少輔太郎・入道。範氏の息子。肥前守護。1346年九州探題を世襲する。1347年筑後守護。1348~1351年肥前守護。太宰少弐頼尚と抗争。1353年筑前国「針摺原の合戦」に敗北。1357年南朝の征西将軍懐良親王と菊地武光に九州を追われる。京都に帰還。1356年再度、九州に上陸するが筑前国「麻生山の合戦」に敗北し京都に戻る。
⇔斯波氏経 (*~1367)尾張・民部少輔・左京大夫・入道道栄。斯波高経の次男。弟に氏頼、義将、義種。越前守護。1349年「観応の擾乱」に直義派。直冬党。菊池武光に対して、1361年九州探題に任ぜらる。1362年懐良親王に「長者原の合戦」で敗北。大内弘世を頼る。のち1367年出家隠遁。息に義高(詮将)。<末野氏の祖。>
⇔渋川義行 (1348~1375)武蔵守・右兵衛佐。九州探題職。足利一門。渋川義季の孫。直頼の息。母は高師直の娘。備中、備後守護。1366年斯波氏経の後、19歳にして九州管領に抜擢される。征西大将軍・懐良親王と対峙。菊池武光により九州上陸を阻まれる。京都に帰還し死去。28歳。今川貞世解任後、息・満頼が九州探題職を継承。息に渋川満頼(1372~1446)、義長、満行。娘婿に吉良満貞。
その当時に地元で大きな戦があるなら九州探題が呑気に中央で権力争いに参加してない1350年だと観応の擾乱中
西方の兵も中央の権力争いに参戦中
地元に半島から大軍攻めてくるなら地元に戻ってる
軍船あるなら中央での戦争に使ってる
足利 直冬 長門探題 が中央に兵を出して大戦を起こし敗走、その後九州の兵を纏めて再度上洛を目指している頃
この頃に攻めてきてるなら地元を放置して上洛なんて出来ないの으음... 일본 역사를 몰라서 의견을 내기 어렵다.
>>359
これらの事から中国人や半島人の海賊を攻めた
王様の権威を高めるために誇大記述
のどちらかの可能性が大きい>>361
? 어린시절도 알려져있는데?>>1
ためになります。盧武鉉に1票!
- 365名無し2021/08/17(Tue) 17:40:35(1/1)
このレスは削除されています
>>1
そもそも高麗は韓国ではないよね?せいぜい朝鮮までにしておこうぜ。王族皆殺しして仏教も破壊しちゃったんだしさFGO「朝鮮に英雄はいない」
>>1
意味のないスレ立てんなや!乞食。>>1
金時敏(1554- 1592)が、江戸時代を通じて日本での、朝鮮随一の名将です。
文禄慶長の役の、リアルタイムで、日本側から最大限警戒された、日本側の史書にも名を遺す、朝鮮の将軍は彼しかいない。
江戸時代に、日本での“フィクション”で英雄となったのは、他に李舜臣がいるが、リアルタイムでは、李舜臣は全くの無名人物だった。
その二人の、後世の知名度が変わったのは、江戸時代日本側の“脚色”が理由です。
金時敏は、文禄慶長の役の復讐のために、日本人になりすまし、日本に潜入する朝鮮の英雄。
李舜臣は、最強日本軍に立ち向かう最強将軍だが、最期は戦死してしまう、朝鮮の英雄。
このどちらも日本の脚色。前者は、鶴屋南北の「天竺徳兵衛韓噺」。後者は「絵本太閤記」で、どっちもフィクションだが、江戸時代日本の大人気作品である
明治以降、朝鮮人はこの二人を日本人経由で知ったのだが、金時敏の、「日本人になりすまして、日本に復讐」の部分が、要は、歴史捏造するには、無理があったのである。
なので、李舜臣だけ使うことにし、結果的に、史実として本当に活躍した、金時敏は、今では全く無名になった。李舜臣さんは、棚ぼた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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