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전이 짙은 상황에서도 무리한 전쟁을 벌이다 원자폭탄을 맞고 사멸했다라고 쓰여있습니다.
자업자득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선인 피해자도 많았다고 배웁니다.>>15
대부분은 원자폭탄을 맞고 비참한 항복을 한것을 알고있으니
일반적인것이 아닙니다.중학교에 전근대사를 배우니 실려있지 않다고 생각되지는 않네요.
왜 일본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게되었는가 라는 내용의 과제를 내기도 하니까요.>>22
その番組では、新聞記者が「俺たちが、広島と長崎に原爆を落としたから」
と言ってます。
どう見ても韓国人の様ですが>>22
28歳 新聞記者
「俺たちが広島と長崎にリトルボーイ(原爆)を落としたから」>>23
It is true.
She is Korth Korea's school student.>>27
무엇을 의미합니까?>>35
なるほど、そういうことか。
その発想はなかった。>>36
정말?
그 이야기를 자세히 알려주세요>>38
군인도 인권이있다
그러나 다친 것은 민간인이었다ところで、独立運動家って貶されてるのか激励されてるのかどっちでしょうね。
>>38
アメリカは酷い。真珠湾攻撃を知っていて真珠湾に居たアメリカ軍に教えず見殺しにした。>>44
なんともいえないですね…>>46
不機嫌なのは、元在韓日本大使90年代の韓国では、ムクゲの花が咲きましたという題名の反日映画が流行りました。
内容は、南北朝鮮が協力して日本に核ミサイルを撃ち込むという内容です。
YouTubehttps://youtu.be/zaarZBA-RdQ조선인들 가르치지 않는다
무조건 조선인 관점으로 역사 교육
조선이 일제로부터의 독립은 조선인의 독립 운동 노력 덕분 이런식이다
조선인은 일본의 원폭은 천벌 받았다고 생각한다>>38
韓国人は、日本が真珠湾空襲したからアメリカが怒って原爆を投下したと考えてる?「日本人が酷い目に会えば嬉しい。」みたいな考えかたって、戦時中の異常な精神状態と変わらないと思うんだけど。
どこの国の人間だろうと命は尊いもの、大勢の命を奪う原爆は恐ろしいもの、という感覚すらあまりないんだな。>>52
面白い。
もっと色々そういう話がありそうだねㅋㅋㅋㅋㅋ미국오빠가 혼내줬다고 배웁니다만
VII. 全体主義の台頭と民族運動の発展 - 3. 国外民族運動の展開 - (3) 建国準備活動
・第2次大戦の終盤の国際情勢
1943年、米国のルーズベルト・英国のチャーチル・中国の蒋介石は、エジプトのカイロで戦後処理の問題について協議した(カイロ会談)。 その会談で、連合国は韓国の独立問題を議論した。
連合国の韓国独立の約束は1945年7月、ドイツで開かれたポツダム会談で再確認された。 米・英・中の首脳が集まった(ポツダム)会談で、連合国は日本の降伏を即座に要求した。
米国は、日本がポツダム宣言を黙殺したと判断して、二回にわたって原子爆弾を投下した。 また、ヤルタ協定によってソ連も参戦を決定して満州地域に進撃した。 これに日本は直ちに連合国に降伏した(1945.8.15.)。
(志學社の「高等学校 韓國史」(鄭在貞) 247ページより)>>36
Is this clown still on kaikai???
Schoenen Tag noch!
(´・ω・` )>>2
爆笑した。
これが韓国人の頭の中かw이전 나는 한국에서 원폭을 교과서에 싣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여기에서 듣고 있다고 잘못된 것 같다.ここやネット上で見聞きした内容を見てみると
どうも、使用した教科書や先生、教育を受けた年代によって
だいぶん違いがあるんじゃないかな、と感じるよ。>>55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
日本語訳まで^ - ^>>52
답변
감사합니다>>52
국사 선생님이 아마도 백범일지를 보고 한 말인 것 같다.
백범일지에서 김구는 일본의 항복 소식을 접하고 한탄했다고 한다. 당시 김구 선생은 현대식 군대인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여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에 선전포고했고, 연합군으로 참전하여 1943년 영국군과 함께 인도와 미얀마(버마 전선)에서 함께 작전을 수행했고 (전투는 안 함), 1944년에는 중국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지휘권을 갖게 되었다. 미군 전략정보처(OSS)와 특수훈련을 실시하면서 자주적으로 조국을 되찾기 위한 "국내 진공 작전"을 계획하여 부대를 꾸렸으나 일본이 항복하는 바람에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홀연 전화 소리가 울렸다. …… "왜적이 항복한답니다."라고 하였다. 이 소식은 내게 기쁜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수년 동안 애를 써서 참전을 준비한 것도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시안과 푸양 훈련소에서 훈련받은 우리 청년들을 각종 무기를 휴대시켜 미국 잠수함에 태워 본국으로 침입하게 하여 …… 미국 육군성과 다 약속이 되었던 것을 한 번 해보지도 못하고 왜적이 항복하였으니, 지금까지 들인 정성이 아깝고 그보다도 걱정되는 것은 우리가 전쟁에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장래에 국제간의 발언권이 박약하리라는 것이다." - 김구, "백범일지"
김구 선생은 국내 진공 작전이 실행되지 않고 일본이 패망하면 임시정부의 발언권이 작아질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한국에는 미군정이 통치했으며, 미군정은 한국 광복군을 인정하지 않았고, 영국 역시 전투를 하지 않았단 이유로 승전국의 특권을 부정했다. 그래서 일본의 항복이 조금이라도 늦춰졌다면 국내 진공 작전으로 승전국의 지위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며, 소련과 미국에의해 한국이 분단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원래 일본의 패망은 예정되었지만 미국이 원자폭탄을 투하로 전쟁이 일찍 종결 되었다.
그것도 지구에서 가장 파괴적인 무기에 죽은 안타까운 희생자들과 함께..
한국에서는 원폭을 어떻게 가르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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