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刀は、最強との評価ですが韓国には匹敵する武器はありました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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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一太郎2017/07/07(Fri) 18:39:42ID:EyNDc0MTA(1/2)NG報告

      豊臣政権時代、日本から朝鮮へと出兵しました。
      瞬く間に朝鮮半島を縦断し明にまで進出し、明との協議で引き上げました。
      朝鮮側は、日本刀や鉄砲のように優れた武器は無く、また頑丈な鎧も無かったのが敗因とのことですが、どのような防衛措置を考えていたのでしょうか?
      明の属国であったために明に助けて貰うこと以外考えてなかったのでしょうか?
      確かに王様は一目散に明に避難してしまったことから防衛概念はなかったのでしょうか?

    • 30名無し2017/07/07(Fri) 20:16:54ID:IzNjk5NDI(1/1)NG報告

      사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

      화승총이 주력 무기였습니다

    • 31(´∀`)2017/07/07(Fri) 20:32:29ID:k3MjIyMjU(2/3)NG報告

      >>27
      刀も出来の良し悪しは あったと思うから すぐに
      刃こぼれするような物もあったんじゃないかなぁ?

      よくわからんけど(^^;)

    • 32(´∀`)2017/07/07(Fri) 20:34:34ID:k3MjIyMjU(3/3)NG報告

      >>23
      なるほどね そういう事なら威力も重要ではないかも
      弓の波状攻撃は確かに厄介ですね(´∀`)

    • 33名無し2017/07/07(Fri) 20:44:38ID:c1MTQ3ODI(1/1)NG報告

      秀吉軍が火縄銃を持っているところで330mの角弓があっても無駄でしょう。
      有効飛距離50-100m程度の火縄銃でも飛ばすだけなら1キロぐらい飛びます。

      そもそも、種子島でポルトガル人から1丁2億円くらいで買った火縄銃を即座に増産し、欧州全体の火縄銃並みに大量に日本中に普及させてしまった日本人。
      日本の黄金は魅力的でのどから手が出るほど植民地にしたかったけれども、銃の普及と侍の士気を見たポルトガル人はもスペイン人も戦闘による日本の植民地化はあきらめざるを得なかった。
      キリスト教の布教により民衆側の心の侵略も試みたが、幕府の禁教と厳しい弾圧により欧米が挫折。
      これが日本が明治期まで欧米の植民地にならなかった理由でもある。

    • 34名無し2017/07/07(Fri) 20:46:05ID:k1MzEzMjM(6/7)NG報告

      >>32
      뭐 시대가 시대였으니까 말이죠.
      화살을 보관할때 진공포장 해두는 것도 아니고
      창고에 처박아서 먼지투성이의 활을 쏘는대다
      수세식 화장실도 없었습니다.
      한국의 옛 화장실은
      땅을 깊게 파서, 거기에 대변을 보는 거였고
      종이는 귀해서, 나뭇잎 등으로 처리했습니다.

      그런 손으로 화살등을 만지작 거리면 대장균이라던가
      묻어있겠죠.
      긁힌 상처라도 입으면, 알콜이 있었겠습니까.
      물이라도 있으면 다행, 전쟁중이라 땀이 흘러
      따끔따끔. 상처에 구더기는 당연 생기는 겁니다.

      현대시대라면 무섭지 않겠지만
      당시시대라면 무서운 것입니다.
      파상풍에 걸리면, 죽습니다.

    • 35名無し2017/07/07(Fri) 20:53:01ID:gzNDM5MTY(1/1)NG報告

      >>27 事実です。当時は戦闘ではほとんど刀は使いません。敵の首を落とすもの。人を切ると歯がこぼれ、油がついてしまう。戦国時代でも刀での死傷者は7パーセントぐらい。この刀は、皆さんがよく見るようなものではなく、刃渡りが6~8cmあるものです。
      日本刀は、江戸末期頼山陽が作った言葉です。

    • 36一太郎2017/07/07(Fri) 22:10:38ID:EyNDc0MTA(2/2)NG報告

      いろんなご意見有り難うございます。
      朝鮮は、長射程の弓矢が最大の武器と言うことですね。
      日本の種子島銃も射程が長いほど威力が小さいでしょうね。
      槍は使ったことがありますが、先の尖っていない日本の槍は威力があるのかなって疑問に思う。
      戦国時代の槍を知っている人なら同じ考えの人もいるかと思うんだけど。

      日本では、部活で弓道部とか一般的にありますが、韓国にも弓を教えていますか?
      話が逸れますが、朝鮮では鉄砲、時計、蒸気機関車のような物をプレゼントされ分解して同じ物を作ったりしてましたか?

      日本では、いつの時代にも同じ物を作り、独自に改良して欧米人をびっくりさせていたのですが朝鮮には職人とかいましたか?

    • 37名無し2017/07/07(Fri) 23:38:24ID:IwMDc2MzM(1/1)NG報告

      エンコリで同じような話題があったね。

      朝鮮の弓は、
      ・動物の角などを利用した混合材料で作られている。(日本の弓は木材を利用した混合材料)
      ・騎乗で使用するため、取り回しが良い小さな弓が採用された。(日本の弓は大きい。)
      ・飛距離は長いが、命中力は低い。(日本の飛距離はやや短いが、命中力が高い)
      ・連射の間隔が短い、つまり短時間で沢山の弓矢を射る事ができる。(日本の弓は「狙う弓」という特徴があるために、大量の弓矢を投射する必然性が低い)
      ・威力については、弓矢の重量と速度が関係し朝鮮の弓は初速が早いために必然的に威力が大きい。(日本の弓矢もそれなりの威力がある…がこの辺りの議論は忘れた)
      ・朝鮮の弓は湿気が多い日本では有効ではない(日本の弓は湿気などに強い)。
      等々の特徴がありました。

      結局のところは、
      ・弓はその地域の環境や戦術によって求められる性能や特徴が異なり、「朝鮮の弓は朝鮮において最も最適化された弓であり、日本の弓は日本において最も最適化された弓である。両者を性能的に比較することは余り意味がない」という結論になったと記憶している。

    • 38名無し2017/07/07(Fri) 23:56:09ID:Y4NTg3NzM(1/1)NG報告

      >>1
      町中にあふれてた人糞
      あれは朝鮮最強の武器

    • 39名無し2017/07/07(Fri) 23:58:58ID:gwMDA4NTE(1/2)NG報告

      >>15
      味方を巻き込むから廃れた武器だけどね。
      個人戦なら強いらしいね

    • 40名無し2017/07/08(Sat) 00:03:20ID:M2NjAyNDQ(2/2)NG報告

      >>27
      >>35
      切れ味が鈍る程度で切れないわけじゃない。
      集団戦闘で刀を使わない理由は切れなくなるからじゃない。射程の問題で槍の方が強いから。

    • 41名無し2017/07/08(Sat) 00:22:35ID:gxODQxMzI(1/1)NG報告

      韓国弓は良く知らないからアーチェリーとの比較となるが、和弓の場合、弓がデカけりゃ矢もデカい。
      デカけりゃ重い。
      そういう矢を飛ばせば、必然的に運動量が大きくなる。

      ここで物理の計算をする気はないけれど、そういう質量の大きな矢をわざわざ飛ばすという事は、当然その必然性がある訳で、例えば甲冑等の防具がどのようなものであったのかを考慮する必要があるではないかと考える。敵の防具を貫けなければ、弓矢としては役に立たないからね。

      >>6 に紹介されている弓を使っていた時代の、朝鮮の一般的な鎧はどのようなものだったのだろう。
      ちょっと興味があるな。

    • 42名無し2017/07/08(Sat) 00:38:31ID:cxNjgyMzY(1/1)NG報告

      韓国の武人

    • 43名無し2017/07/08(Sat) 00:43:19(1/1)

      このレスは削除されています

    • 44名無し2017/07/08(Sat) 00:46:43ID:k2MDI2MTI(7/7)NG報告

      >>36
      한국 학교에서는 활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일본 학교에서는 활을 가르치는 장면이
      만화 등에서 묘사 됩니다.

      한국 학교에서 활을 가르치는 경우는
      올림픽등을 위한 전문기관뿐입니다.
      물론 그 경쟁이 매우 가혹해
      랭커도 고등학생에게 질 경우 탈락하며

      한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진검승부로 선수를 뽑아
      메달 획득률은 매우 높습니다.

      그리고 한국에는 일본 같은
      독창적인 것을 개량해서 서양을 놀라게 한다던가는 없습니다.

      한국은 유교사회로 '사농공상' 의 계급으로
      선비-농부-공업-상인.... 순으로 서열을 매겼기에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은 농부 이하였습니다.
      그래서 상공업이 발달하기 어려웠습니다.

    • 45名無し2017/07/08(Sat) 18:44:54ID:AyMzU1NTg(1/1)NG報告

      >>14
      誰もいないから満州まで走り抜けてしまった加藤清正
      一番やる気のない小西でもこんな突破力
      弱すぎて気の毒ですね。あれだけ将軍殺されて耳や鼻持ち帰ってきても朝鮮が勝ったんでしょ?ww

    • 46方舟さくら丸=左翼2017/07/08(Sat) 18:57:06ID:Q4ODE4NDQ(2/2)NG報告

      >>44
      下層労働者に対する差別意識は、世界中にあり、韓国が特殊なわけではない
      韓国は差別意識が強いので、その点は問題だが

      職人を大事にした点では、日本とドイツが特殊
      だから、技術立国に成功したのだろう
      最近の日本は、職人意識が希薄になりつつあるけどね
      ドイツは、職人志望の若者を、学力の高い若者と同等に優遇して育てている
      見習うべきだろう

    • 47名無し2017/07/10(Mon) 22:59:57ID:IzMzI2OTA(1/1)NG報告

      >>19
      >>37
      ものすごく勉強になる書き込みでした。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

    • 48名無し2017/07/11(Tue) 09:38:42(1/2)

      このレスは削除されています

    • 49名無し2017/07/11(Tue) 10:57:08(2/2)

      このレスは削除されています

    • 50名無し2017/07/12(Wed) 14:11:59ID:UzMTcyNDg(1/4)NG報告


      朝鮮弓が実際に何百メートルも飛ぶって実証した事があるの?
      短距離からの鉄板か?薄い板を貫いたのは韓国人が出してきた検証をみたのがあるが
      弓矢で何百メートルも飛ぶ実証はした事があるのかね

    • 51名無し2017/07/12(Wed) 14:18:23ID:UyMTIzMjg(1/2)NG報告

      >>7
      股間に9センチの武器をぶら下げて、悲しくならないか?

    • 52名無し2017/07/12(Wed) 14:20:39ID:UyMTIzMjg(2/2)NG報告

      >>44
      >日本の学校では、弓を教える場面が漫画など描かれます。

      授業じゃなくて、課外活動だよ。

    • 53포병2017/07/12(Wed) 15:36:10ID:Q3ODE2MDA(1/22)NG報告

      국궁이야기가 많이 나와서 namuwiki;;에 올라와 있는 국궁과 외국 활의 비교, 현대적인 관점으로 분석한 국궁의 내용을 올립니다. 다만 namuwiki의 신뢰성은 그다지 높지 않다는 것을 알아주세요.

      활의 장력만으로 따지면 국궁보다 강한 활은 많다. 세계최고의 활로서 자주 언급되는 터키 각궁은 130파운드, 영국의 잉글리시 롱보우는 150파운드를 넘기는 무시무시한 유물들이 떼거지로 발견되었다. 동유럽에서는 헝가리의 각궁도 유명하다. 또한 중국과 유목민족들의 복합궁은 재질, 제작법, 사용법이 다르지만 한반도와 유사성이 있다.[고려시대의 복합식 장궁 유물도 만주나 몽골식에 가까운 형상이었다. 따라서, 한반도의 활은 고구려시대부터 이어진 C자형 활에서 여러나라의 양식을 연구하고 교류하는 과정에서 등장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언제 연구될지는 미지수. 중국애들이 먼저할것 같다.]

      일본의 화궁도 무사들이 사용했던 종류는 약하지 않았다. 무로마치 말기~에도시대 나온 궁태궁(弓胎弓, 히고유미[에도시대에 등장한, 일본의 활 중에서는 가장 발달된 형태다.])이나 중등궁(重藤弓, 시게토 유미[전국시대의 상급 무사들이 자주 사용했던 활이다. 하급 무사들이 주로 사용했던 사방죽궁(四方竹弓, 시호다케 유미)과는 달리, 겉에 옻칠을 하고 등나무 껍질을 씌워 내수성과 강도를 보강한 활.])은 우리나라 활에 크게 밀리지 않는다. 물론 이런 활들은 당시 일본에서 멀리까지 활을 쏘는 유행으로 만들어진 특수한 활이지만 합성궁만이 뛰어난 활이 아니다는 점을 보여주는 예시 중 하나다. 하지만 일부 궁술단체들은 그렇게 믿는다.

    • 54포병2017/07/12(Wed) 15:38:15ID:Q3ODE2MDA(2/22)NG報告

      국내에서는 일본 활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 심한 편이다.(http://bbs.ruliweb.com/hobby/board/300143/read/23893618) 일본활은 활의 상단을 늘리는 방식으로 다양한 보완점을 얻었으며, 소형화에는 실패했지만, 중세 이후에는 위력을 늘리는데 국궁보다 유리한 면도 있었다. 또한 일본활의 특성은 현대적인 아름다움으로도 계승되었기에, 현재 전해지는 민간용 국궁의 성능에만 안주해서 외국의 활을 욕하는 행동은 국궁에 대한 연구를 위해서라도 옳지 못한 일이다. 다만 이러한 화和궁에 대한 오해는 종종 출신지인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인 경우가 있다.[다만 유의할것은, 댓글에서 인용된 색스턴 호프 교수의 책(HUNTING with the BOW & ARROW)에서 비교되는 활들은 제대로된 국가보단 아프리카나 알레스카, 아메리카 등지의 원주민들의 전통 활을 다루고 있다.]

      최고의 활을 꼽을 때 언급되는 터키 각궁. 시위를 당긴 모습도 검색해보자.(http://www.google.co.kr/search?q=Turkish+bow&hl=ko&newwindow=1&sout=1&biw=1440&bih=773&tbm=isch&gs_l=img.3...6325.9021.0.9275.14.14.0.0.0.3.333.1914.6j2j3j2.13.0...0.0.sdGDC_Kydnc&oq=Turkish+bow&aq=f&aqi=g-L2&aql=) 시위가 없을 때의 독특한 모양이 유명하다. 시위를 걸면 명나라 장궁과 비슷한 선을 그리고, 당기면 우리나라의 각궁처럼 탄성이 높은 모양을 보인다. 활을 자주 쓴 민족답게 이밖에도 다양한 활이 있었다.

    • 55포병2017/07/12(Wed) 15:39:14ID:Q3ODE2MDA(3/22)NG報告

      북방 유목민족의 각궁. 가까운 한국, 중국, 몽골의 활보다 크고 두꺼워 내구성은 높지만, 탄성이 약해서 비거리가 짧은 편이다.

      만주활은 유목민족의 활 중에서 가장 거대하며, 비거리는 짧지만 저장되는 운동 에너지(J)가 높아서 무거운 화살을 쏠 수 있었다.[기마사격에는 비거리가 중요하지 않았으므로 발달한 특색이다. 궁기병들은 속력을 이용하여 1초도 안 되는 시간에 목표물을 정확히 쏘고 지나치는 공격 이탈 능력, 무거운 화살을 이용하여 일격으로도 확실히 살상력이 보장되는 '빠른 단발 사격'이 가능한 활을 선호했다. 한반도에서도 기마병을 많이 편성했던 시대에는 투박한 만주활을 닮은 국궁이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의 국궁은 약간 작지만 부려놓으면 만주활과 비슷한 형상이 되며, 고려시대의 국궁은 만주활과 쌍둥이처럼 닮았다. 특히, 한반도에서 기병의 편성비중이 높은 시대일수록 닮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한반도의 국궁은 만주활과는 정반대로 고탄성 활이라는 차이점이 있었다.

      목숨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에, 옛날 사람들도 외국의 활을 연구하는데 열을 올렸다. 특히, 조상들은 만주 지방의 활을 비교한 예시가 많다. "만주 활들은 너무 투박해서, 크기에 비하면 성능이 웃음이 나올 정도다" "하지만 습기에는 우리나라 활보다 훨씬 강하므로 단점만 보면 안 된다. 우리도 장마철에 쓸만한 활을 만들려면 본받을 점이 많다." 라고 비평과 반성을 하고 있었던 점을 알 수 있다.

      만주활은 궁기병에게 중요한 짧은 Draw Length와 파괴력을 중시했고, 한반도의 국궁은 탄성이 높은 재료를 이용하여 비거리와 연사력을 중시했다. 즉, 국궁은 극단적인 탄성을 중시했다는 점에서 탄력이 매우 낮은 만주활과는 정반대의 특성을 지녔지만, 목재 복합궁은 쌍둥이처럼 닮은 거대한 장궁을 병용해서 만들었기에, 서로 밀접한 교류가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 56포병2017/07/12(Wed) 15:40:21ID:Q3ODE2MDA(4/22)NG報告

      일본의 중등궁. 사거리는 중등궁은 180~200m, 궁태궁은 200~250m미터 가량이다. 우리나라 국궁이 무과에서 멀리쏘기 시험시 박두(고도리살, 혹은 목전(木箭))을 쏠 때 시험에 통과되는 기본 제한선이 240보(약 300m)
      http://book.naver.com/bookdb/text_view.nhn?bid=1462421&dencrt=h5p%253%396RfqwPdYf%252BWWYyuav22OAKOBlNdyFkzHo2%252FfdAQ%253D&term=240%BA%B8&query=240%EB%B3%B4인 것과 비교하면 그리 압도적인 차이는 없다. 이런 활들은 원목 위에 잘게 쪼갠 대나무 가닥들을 모은 뒤에 아교로 각 부품들을 붙인다. 즉 일본식 활도 접합시 아교를 사용했기에, 습기가 많으면 각궁처럼 박살나지는 않아도 영 좋지 않았다고... 최근에 발견되는 우리나라의 복합궁 기록에도 이런 단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57포병2017/07/12(Wed) 15:43:23ID:Q3ODE2MDA(5/22)NG報告

      부탄 죽궁. 출처는 국궁신문.(http://www.archerynews.net/news/view.asp?msection=8&ssection=31&idx=452) 2007년 국내에서 열린 세계민속궁축전에서 한국 각궁과 더불어 120m 떨어진 과녁을 맞추는 데 성공한 유일한 활이었다. 대나무 재질인데도(http://bbs.ruliweb.com/hobby/board/300075/read/16458534) 뛰어난 성능[link 하단]을 보여줬는데, 이것은 부탄 지역의 특수한 대나무 덕분이다.

      당시에 참석한 현대의 몽골, 터키, 헝가리 각궁은 부탄 죽궁을 따라잡지 못했다. 이는 부탄에는 근대까지도 전투용 활의 맥이 남아있었으며, 현대까지도 활이 스포츠로서 발달한 국가이기 때문이다. 즉, 활은 사용자와 필요성이 갖추어져야 발전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재질이나 형태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활의 성능을 판단해선 안 된다는 교훈도 준다.

    • 58포병2017/07/12(Wed) 15:44:43ID:Q3ODE2MDA(6/22)NG報告

      국궁의 현대적인 분석

      국궁에도 재미있는 특색이 있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국궁은 에너지 생성량이 매우 뛰어난 활이라고 한다. 하지만 극단적으로 탄성에 의지하는 만큼, 무거운 화살을 발사할 경우에는 장궁보다 불리하다. 또, 시위의 속력 에너지가 굉장히 높기 때문에, 화살을 걸지 않고 빈 활을 쏘려면 주의가 필요하다. 또한 일본의 화궁 명인의 글에 따르면, 145미터 거리의 한국 활터 비거리는 세계적으로도 먼 것이라 한다.(http://www.archerynews.net/news/view.asp?idx=759&msection=5&ssection=29&page=1)

      현대 전문가들이 분석한 국궁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높은 경량성과 휴대성.
      2) 극단적으로 작은 몸체가 되돌아가면서 발생하는 폭발적인 에너지 생성량.
      3) 'C'형 → '3'형으로 탄성이 집약된 활대가 에너지를 거의 손실하지 않고 전방으로 집중시켜줌.
      4) 작은 크기로 인하여 외국의 활보다 다양한 지형과 방향을 이용가능.
      5) 전방을 향하여 굉장히 빠른 조준 및 연사가 가능함.

      단점은 다음과 같다.

      1) 습기에 약해서 장마철에 쓰기 힘듬.
      2) 활에 시위를 올릴 때 상당한 시간이 걸림.
      3) 파운드가 낮은 만큼 살상력을 내기 위한 Draw Length를 길게 당겨야함.
      4) 내구도가 약해서 지속적인 관리와 휴대시 주의가 필요함.
      5) Draw Length가 길기 때문에 기마사격 시에는 오히려 단순궁보다 즉발 사격시에 불리할 수 있음.

    • 59포병2017/07/12(Wed) 15:46:34ID:Q3ODE2MDA(7/22)NG報告

      즉, 국궁은 일부에서 주장하듯이 최강의 활이었다기보다는, 중세 기준으로 섬세한 기술을 집약하여 만든 활에 가깝다. 특히, 고무줄에 가까울 정도로 휘어버리는 활대를 완벽한 "C" → "3"자 모양으로 변형할 수 있는 국궁의 탄성은 중세 기준으로 놀라울 정도의 연구가 집약된 것이다. 탄성 밖에 모르는 바보

      국궁의 특성은 고구려 시대부터 각궁을 극단적으로 소형화했던 성향과 맞물린다. 국궁은 2개의 손가락을 이용하는 속사형 단궁의 장점을 최대한 발전시키고, 약점은 상쇄하는데 투자한 활이라고 볼 수 있다. 덕분에 세계적으로 가장 극단적인 소형화에 성공하면서, 컨트롤의 폭이 넓으면서도 비거리가 길고, 전방을 겨냥하는 속도가 빠르다는 점이 현대까지 전해지는 국궁의 특성이다.

      종합하면, 국궁은 다른 활을 사용하는 궁수들보다 빨리 움직일 수 있으면서, 효율적으로 에너지를 분배하여 화살이 매우 멀리 날아가며, 빠르게 연달아서 조준이 가능이 가능하도록 설계한 활이라고 볼 수 있다.[특히, 국궁을 단련한 사람은 Target을 정조준하는 속도를 단축하기가 매우 쉽다. 활을 쥐고 끝까지 당기면, 전방의 타겟을 정조준할 수 있도록 매우 겨냥이 쉽도록 설계되어 있다. 또한, 동북아시아식 깍지 덕분에 재조준과 연사도 빠르다.]

      현대의 컴파운드 보우식 양궁이 달성한 기술에는 못 미치는 분야도 있지만, 국궁의 장점은 위와 같은 '가볍고 뛰어난 에너지 생성'이라는 특성을 고대와 중세의 재료만 가지고 실현했다는 점에 있다. 또한, 현재 전해지는 국궁은 습사용이라서 군사용보다 활이 가늘고 약해져서 많은 기술이 손실되었는데, 전투용 국궁은 활대를 길고 굵게 만들어서 장력을 키웠으며 이를 제대로 보급하기 위해서는 연구가 필요하다. (예:정량궁, 예궁)

    • 60포병2017/07/12(Wed) 15:49:56ID:Q3ODE2MDA(8/22)NG報告

      야스쿠니 신사에 보관중인 조선시대 전투용 활. 특별 전시회를 할 때 공개된 것으로, 큰 표지의 원군(元軍)이라는 글자는 해당 구역 전시물이 원의 일본침입 당시와 관련된 것이고, 활 바로 앞에 조선궁이라는 하얀 이름표가 있다.http://lyuen.egloos.com/m/5400449 활 안팍이 시꺼먼 것은 겉에 옻칠을 해서 방수성을 높인 간각칠궁(間角柒弓)이기 때문이다.

      그밖에도, 일본 정창원에 소장중이라는 최영의 신궁(神弓)이나 유인촌이 진행하던 역사스페셜에서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을 소개하는 에피소드에서 나온 고려시대 활들은 180cm가 넘는 장궁이었다.https://www.youtube.com/watch?list=PLCUvMJmhd5WyOcvCJwoZS0_kC5dYNvXUi&params=OAFIAVgC&v=5Ax4CutZYBY&mode=NORMAL&app=desktop 초기에는 전통적인 각궁보다 터키나 유목민족의 각궁과 유사한 장궁들이 발견되는데, 이 시대의 국궁에 대한 연구는 미비한 편이다.

      아래는 현대의 스포츠 국궁과 양궁(롱보우)으로 금속판을 관통하는 영상. 영국 장궁은 실제 전투용으로도 사용되었던 85~110파운드, 국궁은 활터에서 쓰는 습사용으로서 40~50파운드다. 다만, 영상에서 사용된 국궁은 전투용 활의 기준이었던 60~77파운드에 미치지 못하는 성능이므로 직접 비교가 어려우니 재미로만 보자.

      YouTubehttps://www.youtube.com/watch?v=KCE40J93m5c

      YouTubehttps://www.youtube.com/watch?v=4d3jZBNV5Qg

    • 61포병2017/07/12(Wed) 16:12:34ID:Q3ODE2MDA(9/22)NG報告

      이하글은 일본도의 역사적 평가, 각국의 일본도 도입, 전통 일본도의 성능의 글입니다.

      역사상의 평가
      일본도에 대한 평가는 중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은 11세기의 고려시대부터 일본과 물물교환을 통해 도검을 수입한 기록이 발견된다. 관상용으로. 이후 중국 해안지역에의 연이은 왜구 약탈이나 임진왜란에서 드러난 난전에서 일본도의 유용성은 동아시아인들에게 깊게 각인되었고, 징비록이나 명나라의 기록에서도 일본도의 유용함을 논하는 대목은 빠지지 않는다.

      무기가 결국 사용자의 능력에 좌우되는 것임을 고려해보면 약 백여년 간의 전국시대를 거친 일본인들이 비교적 평화로웠던 조선이나 중국에 비해 단병접전에 있어서 유리한 위치를 점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유가 있다고 한들 당대 일본인들과 맞서 싸운 주요한 인물들이 다른 것이 아니라 일본도를 위협적인 무기로 인식하였음은 사실이다.

      일본도가 제대로 무장을 갖춘 병사들에게는 별 효과가 없다는 말도 있지만 원래 창칼을 막기 위해 비싸고 무겁고 관리하기 힘든 갑옷을 입는 것이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갑주전투에 특화된 폴암류를 제외한 대부분의 무기가 갑옷을 상대로 별 효용이 없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송나라-명나라 기록에 화살과 창으로는 여진 철기병의 갑옷을 뚫지 못하니 얼굴을 찌르거나 투구를 벗기고 머리를 찍어서 죽여야 한다는 내용이 있고, 조선에서도 당갑(唐甲)을 입은 적에게는 화살이 통하지 않으니 총통을 써야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일본도만의 단점으로 보기는 어렵다. 협도곤이나 나기나타 등의 장대무기는 용도가 다른 무기이며 근접전에서 사용하는 짧은 둔기류는 급소를 정확히 노려야 갑옷 안쪽에 타격을 입힐 수 있다는 점에서 도검과 큰 차이가 없었고 서양의 롱소드와 비교하면 그레이트 헬름, 호버크, 사슬 쇼스 등이 조합된 밀폐형 갑옷을 일본이나 동아시아 등지에서 볼 일이 없기도 하다.

    • 62포병2017/07/12(Wed) 16:13:35ID:Q3ODE2MDA(10/22)NG報告

      송나라 시절에 일본과의 무역을 통해 타치(太刀)가 수입되긴 했지만 이때는 실전 무기가 아니라 독특한 양식의 외국 칼, 수집품 취급을 받았다. 일본도가 실전 무기로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명나라 시대에 왜구가 준동하면서부터였다. 당시 명나라는 이른바 해금정책으로 대외무역을 크게 제한하였는데 무역으로 큰 돈을 벌던 중국과 일본의 상인들이 이에 저항하여 용병을 고용하고 밀무역을 하면서 사실상의 해적 집단으로 변화되었다. 여기에 많은 중국인, 일본인 용병들이 한 몫을 잡기 위해 뛰어들면서 명나라 해안에 대한 노략질이 극심해졌다. 특히 저장 성 지방의 피해가 막심했다.

      이때 절강성에 부임한 군사령관 척계광은 낭선, 등패를 비롯한 신무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왜구의 주특기인 일본도 검술과 돌격을 저지하는 원앙진을 고안하고 기동력 있는 경량 화포(호준포 등)을 채용하고 화승총도 채용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도의 절삭력, 긴 길이에서 나오는 사거리를 보고 일본도의 영향을 받아 쌍수도라는, 화승총병이 백병전시 사용할 무기를 만들었다. 또 일본 검술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투항 왜구에게 검술을 배우는 동시에 1561년에는 일본에서 카게류(陰流) 검술[일본 고류검술 3대 원류(나머지는 넨류, 신토류) 중 하나.]도 수입하여 기술 목록[모쿠로쿠(目錄). 면허개전자에게 내리는 기술의 비전을 설명한 두루마리. 다만 아주 상세하게 설명한 건 아니고 주로 검술을 끝까지 배운 사람이 까먹는 것을 방지하도록 기술명과 간단한 묘사를 첨부한 것들이다.]까지 입수하였다(신유년에 입수하여 신유도법(辛西刀法)이라고도 부름). 이후로 명나라에서도 일본도를 이용한 검술 연구가 이루어져서 왜도로 창을 이기는 방법을 담은 정종유(程宗猷)의 단도법선(單刀法選)이 출판되었으며 1621년 모원외가 15년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 2천여 종의 병법서를 참고하여 정리한 병법서 《무비지》에도 '일본음류도법' 과 '왜구도법' 이 기록되어 있다.

    • 63포병2017/07/12(Wed) 16:14:40ID:Q3ODE2MDA(11/22)NG報告

      처음에는 일본도의 양식을 그대로 베껴서 생산했다. 이순신 장군에게 명 황제가 하사한 명조팔사품 중에 대도의 쓰바(鍔)는 일본의 기쿠 양식을 그대로 복제한 것. 하지만 나중에는 명나라 식으로, 중국 양식의 물건으로 대체된다. 명나라 멸망 때까지 이 중국식 일본도들은 상당히 많이 쓰였지만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기효신서, 무비지와 같은 병법서가 금서로 지정되고 일본도 형식의 도검들이 폐지되면서 더이상 사용되지 않게 된다.

      다만 중국의 소수민족인 묘족에게서는 이 명나라식 일본도와 왜도술, 단도법선(單刀法選)의 기술들이 그대로 전수되어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묘족 특유의 무기로 여겨지며 묘도, 묘도술로 불리고 있지만 그 시작은 명나라의 절강병법에 있는 것.

      중국 배경인 무협소설에서도 종종 언급되기도 한다. 보통 중국 배경의 무협물에서는 도는 두껍고 검은 가는 경우가 많은데 일본도는 검처럼 가느다란 도로 찌르기에도 큰 문제가 없어 검과 도의 장점을 고루 가진 무기로 평가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62 >>63 중국의 도입)

    • 64포병2017/07/12(Wed) 16:16:16ID:Q3ODE2MDA(12/22)NG報告

      조선에서는 왜검(倭劍)이나 왜도(倭刀)라고 불렀다.

      세종시절 일본에서 검을 만드는 법을 배워온 심을이 칼을 만들어 바치자, 그 예리함이 진품 왜검과 다를 바가 없어서 세종이 만족하고 장인인 심을에게 군역(軍役)을 면제시키고 그에게 옷 한 벌과 쌀과 콩 10석을 하사하기도 했다. 또한 삼포에 내왕하는 왜인 가운데 제도(製刀)술에 밝은 자가 있으면 이들로부터도 지속적으로 기술을 전습하려고 노력하였다.

      본래 임진왜란 이전에는 조선은 일본의 왜검에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물론 이전부터 왜검은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골동품 겸 병장기로 수입하는 경우도 자주 있기는 했지만 대대적으로 도입되지는 않았다. 삼포왜란 등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으킨 폭동에서 조선군은 활과 대포, 심지어 짱돌을 던져서 어렵지 않게 제압했기 때문에 도검이라는 무기 자체에 대해서 큰 의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에는 일본군이 조총으로 조선군의 대열을 흐트려놓은 다음 일본도를 휘두르며 돌격해왔는데 이러한 백병전 상황에서 일본도는 큰 위력을 발휘했다.

      임진왜란 이후엔 조선과 명의 장수들도 일본도를 모으는데 혈안이 되었을 정도라 할 정도로 당시로선 백병전에서 강력한 무기라는 인식이 있었다.[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권응수가 쓰던 일본도인 권응수 장군 유물 장검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항왜들의 총포술과 함께 일본도를 이용한 검술도 높게 평가되어 조선군에 채용된 바가 있다.

    • 65포병2017/07/12(Wed) 16:19:11ID:Q3ODE2MDA(13/22)NG報告

      (항왜(降倭)는, 한국에서 항복한 일본인들을 가리키던 용어이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칼을 잘 쓰는 것이 단병전(短兵戰)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일본(日本)과 절강(浙江)은 이것으로써 천하의 강병(强兵)을 만들었습니다." "군기시(軍器寺)에 간직한 왜도(倭刀)는 아무리 하품(下品)이더라도 몹시 날카로우니 진실로 군국(軍國)의 중한 기구인데 가볍게 화매(和賣)하는 것은 미편(未便)합니다" 란 기록이 있으며, 군기시에 소장한 왜도를 북방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분급하여 실전에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여진족을 상대로 아무런 효과를 보이지 못했는데, 보병부대가 원거리 화력전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기동력과 단위전투력이 월등한 기마부대를 백병전에서 맞상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다만 임진왜란의 일본군처럼 조총과 일본도를 이용한 전략을 펼 수 있을 정도로 두 무기의 보급이 된 상태가 아니었다. 승정원일기의 기사에는 선조 대부터 추진했던 검사 양성 계획이 광해군대에 폐기됐다가 이괄의 난 이후 수십년 만에 다시 시행됐다는 기록도 있고, 이괄의 난으로 정예병력을 상실한 상태라 무기의 효용성을 따지기가 어렵다.]
      임란 이후 조선은 군사력 강화를 위해서 일본도를 대대적으로 도입하였으며 검술을 도입하기도 했다. 무관 김체건은 일본에서 왜검술을 배워오기도 했고 조선 정조 시대에 편찬된 《무예도보통지》의 한 장에 왜검(일본도)을 사용하는 검법에 대한 설명 또한 전해진다.

      예술품으로서의 기능도 있어 삼전도 굴욕 이후 청나라 사신들에게 임진년 때 노획한 왜검을 하나둘씩 진상품으로 안겨주기도 했다. 실제로 조선왕조 실록을 보면 진상품에 노획한 왜검을 끼워 보내는 경우가 많았고, 사신들도 가지기를 원했다고 한다.

    • 66포병2017/07/12(Wed) 16:21:07ID:Q3ODE2MDA(14/22)NG報告

      조선이 왜검을 굴욕적으로 받아들였다는 현대적인 인식과는 다르게 조선사람들은 왜검을 받아들이는데 딱히 큰 거부감이 없었고 일부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기도 하였다. 이는 검을 바라보는 일본인과 조선인의 인식 차이에 관련이 있는데 일본인들은 검에 사무라이 정신, 혼과 기백 등등을 운운하면서 검과 그 수련방법을 하나의 정신수양의 방안[이러한 시각도 메이지 유신 이후, 급격한 수국주의에서 발생한거지, 도쿠가와 막부 치세 하의 일본도는 신분의 상징, 기본소양, 그리고 호신용 무기였다. 전국시대정도에나, 검으로 입신양명하고자 하는 무사들이 있었다.]으로써 바라봤다면, 조선인에게 있어 검은 사람을 죽이는 살상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시 조선은 검 만을 살상도구 운운하며 낮춰 본 게 아니라 무예 자체에 그다지 큰 관심이 없었다. 이는 조선 중기부터 세조, 중종과 같은 반정 세력이 왕조를 뒤엎은 것과 더불어 이괄 등과 같은 무신들의 반란으로 무예에 대한 보이지 않는 탄압과 감시가 존재했기 때문이다.][조선에서 정신수양에 쓰인 것은 되려 활이다.]
      당시 백병전에서의 일본도의 중요성을 부정할 순 없지만, 조선에서 이를 받아들인 이유는 단지 쓸만해보여서 일 뿐 별다른 생각을 가지지 않았다.

      왜검을 도입한 것은 전술 체계를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일종의 대항군 개념으로 주적인 일본군의 전술을 분석하기 위한 목적에 불과했다는 일부 십팔기 복원 단체의 주장도 마찬가지 이유로 근거가 빈약하다. 절강병법과 왜검을 도입하기 이전에는 애초에 조선검술이라고 부를만한 무술의 전통이나 훈련 체계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에 일본도는 현대로 치자면 개인화기와 비슷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는데, 자국민이 총에 맞은 역사가 있다고 해서 총을 배척하는 자가 세상에 어디 있는가?

    • 67포병2017/07/12(Wed) 16:22:39ID:Q3ODE2MDA(15/22)NG報告

      그러나 왜검(일본도)를 사용한 전술은 인조 대부터 사실상 형식만 남아있게 되는데 아무래도 종전에 써오던 무기와 다르다는 문제점 때문이었다. 특히 조선은 전통적으로 활과 같은 원거리 무기를 중시하고 칼은 일종의 호신용 개념으로 짧은 것을 선호하였기 때문에 활을 쏠 때 걸리적거리는 긴 칼은(지휘용 칼이 아닌 이상)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조선은 영토 확장을 위한 전쟁보다는 침략해 오는 이민족들을 방어하는 영토 보존에 더 중점을 둔 군사체계였기 때문에 방어에 최적화된 투사무기를 주로 운용했다. 근접병기도 물론 많은 수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산성을 위주로 한 요새에서 궁시나 화포로 요격하는것이 기본적인 패턴이었고, 북방에서 예방 전쟁을 수행할 때 역시 중장보병보다는 기병을 위주로 운용해 도검의 비중이 클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활이 주류고 단접병전 지분이 낮은 조선군에게 있어 굳이 종래의 무기체계에 왜검을 끼워넣을 필요가 별로 없었던 것이다. 환도도 무겁고 걸리적거린다고 나중에는 대나무칼로 대체해버린 판에...

      다만 승정원일기 인조 7년 4월 14일 기사에 의하면(http://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P0_A07_04B_14A_00170) 임진왜란 초기부터 선조에게 검사를 양성할 것을 건의하고 항왜를 모집해서 금군과 아동대를 훈련시키는 계획을 처음 추진한 사람이 류성룡이었기 때문에 광해군대의 권신 이이첨이 정적이었던 류성룡의 정책을 폐기한 것이라 한다.

      하지만 이 때문에 후기의 조선검에는 중기에 대대적으로 도입되었던 왜검의 영향이 다소 남아있게 된다. 날의 형상이나 손잡이 끈의 방식 등등. 참고로 영화 광해에서도 호위무사가 왜검에 가까운 검을 다루는 장면이 나온다.[대중들에게는 환도와 일본도의 차이점을 알기 어려울 뿐더러 일본도를 많이 접한 대중들에게 환도는 생소할 수가 있다.]

    • 68포병2017/07/12(Wed) 16:24:29ID:Q3ODE2MDA(16/22)NG報告

      전통 일본도의 성능
      서브컬처에선 일본도를 서양검에 비해 엄청난 내구성과 절삭력을 가진 사기템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잦으나, 일본도의 실제 내구성은 상당히 무른 편이다. 다다미나 대나무를 베다가 실수해도 이가 나가거나 휘어질 수 있고 2차대전 당시 일본군도도 전통 칼날을 쓴 경우는 예외 없이 휘어지고 망가지는 경우가 많이 문제가 되었다. 심지어는 일본도 칼날에 조각을 하는 호리모노는 열처리가 다 끝난 다음에 작업을 하는데 도검의 강도가 최상에 다다른 열처리 직후에 정으로 쪼아서 조각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일본도가 얼마나 무른 칼인가를 방증한다. 스테판 로트의 일본도가 한 방에 휘어버린 실험 영상을 통해서도 국내에 일본도의 엿가락 내구성에 대한 인식이 크게 퍼지기도 했다.

      일본도는 전통적인 강재와 제조법을 아직까지 그대로 사용해서 제조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에서 일본도를 전통문화유산으로 보며 무기금지법에 의해 현대 강재를 이용한 생산은 용납하지 않는다. 미군정 GHQ는 전쟁 중 일본군에 학을 뗀 나머지 무도를 전면 금지하고 일본도를 모조리 압수하여 폐기 처분하려고 하였으나 일본 측이 일본도는 전통예술품임을 강조하며 세세한 구분과 감상 포인트 등 예술품으로써의 특징을 보여주어 겨우 막아낼 수 있었다. 이때 이후로 일본도와 화승총, 창, 나기나타 등은 전통 예술품으로 분류되어 자유롭게 유통과 구입이 가능하지만 같은 도검이라도 현대 강재로 만들어진 총검이나 무라타도, 서양도검 등은 무기로 분류되어 소지가 까다롭다.] 근본적으로 수백년 전 이상의 오래된 공업능력 수준의 품질 그대로이다. 일본도의 특징은 도검의 구조 개선을 통한 강도 확보는 이미 청동기 시절부터 쓰이던 기술로 일본도나 노르만 소드에서 볼 수 있는 신가네를 하가네로 감싸는 형태의 구조는 중국으로 치면 무려 전국 시대부터 일상적으로 활용된 것이다. 당연히 기술적으로도 성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 69포병2017/07/12(Wed) 16:26:56ID:Q3ODE2MDA(17/22)NG報告

      물론 생산력이 떨어지던 시절에는 무조건 열등하다고 볼 수 없는 기술이나 질적으로 가장 우수한 무기였다고 보기는 힘들다. YouTubehttps://www.youtube.com/watch?v=tNXJL7K5PSY, http://ohmura-study.net/241.html

      이는 일본의 철이 매우 저질이었던 점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 일본에서 산출되는 철광석은 끽해봐야 모래와 섞여 불순물이 많이 포함된 사철이었으며 10kg를 타다라로 제련할 경우, 1kg의 강괴밖에 나오지 않을 만큼 생산 효율이 나빴다. 불순물이 많이 섞여있으니 기본적으로 재료의 내구도가 떨어지는것은 당연지사. 이조차도 접쇠 공정을 통해 계속 불순물을 제거하고 강재의 순수성을 높여야만 했는데 접쇠 공정은 엄마손파이 마냥 미세한 층을 만들어나가는 특성상 내구성이 나쁘면 나빴지 좋을 것이 없는 공정이며 잘해봐야 평균 수준이다.[비숙련자가 하면 용접이 제대로 되지 않아 내부에 하기레라고 하는 공간이 생기며 이는 일본도에서는 하품 취급도 못 받게 되는 결함 요소이다. 당연히 내부에 공간이 있는 만큼 내구성도 나쁘다.]
      또한 접쇠공정을 거치고 난 강재도 강도가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부드럽고 유연성이 높은 연철 소재의 심인 '신가네(心鉄, 心鐵)'[덧붙여 이 '신가네'라는 말은 연철 소재의 심을 뜻하기도 하고, 그 구성 소재를 뜻하기도 한다.]를 유연성은 낮지만 딱딱하고 단단하며 강도가 높은 고탄소강 소재의 표피인 '하가네(刃鉄, 刃鐵, 刃金)'[덧붙여 이 '하가네'라는 말은 고탄소강 소재의 피철(皮鉄, 皮鐵)을 뜻하기도 하고, 그 구성 소재를 뜻하기도 한다. 또한 이 말은 일본어로 강철을 의미하는 단어들 중 하나인 '하가네(鋼)'와는 동음이의어이다.]로 감싸는 꼼수로 가능한한 최대한의 내구성을 확보한 것이 일본도이다.

    • 70포병2017/07/12(Wed) 16:28:16ID:Q3ODE2MDA(18/22)NG報告

      허나 이러한 복잡미묘한 제법은 현대 금속공학을 동원해서 공장에서 기계로 수행하고 나서야 최종결과물의 품질이 보장되는 것인데[실제로 일본군도 중 철공소에서 이런 방식으로 만든 만철도는 뛰어난 성능으로 일본육군 내에서 큰 호평을 받았다.], 일본도는 그냥 장인의 감으로 이런 제법을 무리하게 구현하려다보니 연철 소재의 심인 신가네가 고탄소강 소재의 표피인 하가네로 덮여지지 않고 그대로 외부에 노출되어 칼날 전체의 성능과 내구성을 저하시키는 등 여러모로 칼날의 품질이 엉망일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재료부터도 망치로 깨 봐서 뭉그러지는 것은 '신가네(心鐵)'로 분류하고 깨지는 것은 '하가네(刃鐵)'로 분류하는 식일 수밖에 없으니 이쯤 되면 내구성이 잘 나오는게 오히려 더 이상한 지경이다. 이때문에 일본이 서양과 교류하면서 그들이 가져오는 남만철(서양 용광로식 제련법으로 제련되어 만들어진 유럽제 철강)은 전국시대 말부터 도검을 비롯한 일본의 철제 무기와 갑주 제작에 적극적으로 사용되었고, 남만철 무역 역시 꾸준히 지속되었다.[물론 일본 내에서는 서양이나 조선의 칼에 대해 "민달팽이가 힘없이 늘어진 듯 하다"며 외국의 칼과 철강을 곧잘 폄하하는 기록도 발견되지만, 정작 그렇게 말하는 일본인들은 꾸준히 남만철을 수입해 무기 제작에 사용하고 서양식 강철로 된 서양 갑옷이 튼튼하고 총알을 막아낸다며 적극적으로 수입/모방한 선례가 있다. 즉 이 시기까지 일본 내의 재료와 기술로는 남만철과 같은 고탄성강을 제조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는 19세기에 들어와서야 겨우 해소된다.]

    • 71포병2017/07/12(Wed) 16:29:31ID:Q3ODE2MDA(19/22)NG報告

      전투에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내구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칼날을 필요 이상으로 두껍게 만들 수밖에 없으니, 경량성이라든지 무게중심의 위치확보에서는 불리한 것이다. 하여 허리에 차고 다니도록 만들어진 도검류 계통에서는 칼자루가 상당히 긴 편인데 지랫대의 원리상 힘을 줘서 베어 내리기에는 좋지만 의외로 양 손의 간격을 짧게 쥐는 다른 문화권의 검들보다 운용이 불편하다. 일본도는 날 끝으로 가면서 날의 두께가 그리 줄어들지 않는데다, 중국이나 서양의 검들은 자루 머리나 퍼멀이 무게추의 역할을 겸하지만 일본도의 카시라는 무게 중심을 손잡이쪽으로 당기기에는 너무 작고 가볍다. 한 손 도검이지만 양손으로 쥘 수도 있는 칼자루 길이를 가진 타치가 카타나로 변하면서 칼자루 길이를 더 늘린 것은 운용의 불편함을 해결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무게 중심이 날쪽으로 쏠리면 휘두를 때 날 끝에 무게가 실려 길이와 무게에 비해 강한 파괴력을 얻기에는 유리하다고 볼 수도있으나, 결과적으로 롱소드 급의 두껍고 무거운 도검인데도 운용은 레이피어 마냥 해야되는 극한의 비효율이 발생하는 것이다.

      일본도에 대한 환상을 가중시키는 것은 가십거리에 혈안이 된 매스미디어들의 탓도 크다. 《디스커버리 채널》에 의하면 '베는 것' 에 한정해서 모든 인병기 중 가장 고성능을 발휘하는 무기로 묘사되며 사람과 같은 밀도를 가진 젤라틴을 베는 실험에서 오직 일본도만이 일도양단에 성공했다고 나왔으나 사실 그 정도의 절단 성능은 일본도 외의 타 문화의 검으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 72포병2017/07/12(Wed) 16:30:26ID:Q3ODE2MDA(20/22)NG報告

      그리고 정상적인 정규군이면 최소한의 갑주는 갖추어 입는다.[다만 일본 갑옷 자체가 서양 플레이트 아머만큼의 기밀성을 갖춘 것은 아니니만큼 갑옷이 노리지 못하는 부위를 공략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다. 일본 고류 중 전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파들의 경우 대갑주 검술을 다루는데 갑옷으로 보호하지 않은 빈틈을 포착해 공격한다. 도검으로 갑주를 입은 적을 상대하는 방식은 동서를 막론하고 갑옷 자체를 공격하기보다는 갑옷의 취약점이나 갑옷이 보호하지 못하는 틈새를 노리는 방식이었다.][반면, 플레이트 아머가 이례적일 정도로 완전 방어에 집착한 케이스이고 플레이트 아머를 제외한 다른 갑주들은 모두 플레이트 아머보다 한참 못한 수준의 기밀성에 한정된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일본 갑옷 역시 세계적인 기준에서 보면 상당히 철저하게 기밀성을 추구한 사례에 속한다. 당장 많은 나라의 갑옷이 찰갑 수준에서 더 이상의 발전을 멈춘 것에 비하면 통짜 철판을 여러 장 엮어서 기밀성을 추구한 일본 갑주는 상당한 방어력을 지니고 있었다. 전신을 갑주로 중무장한 일본 장수의 난감함은 이성계가 전신을 철로 두른 것으로도 모자라 철가면까지 쓰고 있어 화살로 도무지 공략할 방법이 없었던 아기발도를 신기에 가까운 활쏨씨로 쏴 죽인 일화에서 잘 묘사되어 있다.]

      디스커버리 채널 등에서 무술이나 병장기를 소개하는 프로그램들은 이러한 동양의 무술/무기에 대한 판타지를 그대로 보여주며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이야기하곤 한다.[실험에서 일본도를 사용한 것은 태권도 마스터로 출연한 사람이다. 도대체 일본도랑 태권도가 무슨 상관인지(...) 실제로 검도나 검술에는 전혀 문외한스러운 움직임을 보였다.]

    • 73포병2017/07/12(Wed) 16:31:28ID:Q3ODE2MDA(21/22)NG報告

      일본도로 총알을 가르는 시험도 원래 서부시대부터 총을 쏘아 풍선 두 개를 터트리던 식의 유희, 즉 트릭에 지나지 않는다. 권총탄은 납을 구리 외피로 감싼 것이며 열처리된 강철보다 훨씬 무르기 때문에 잘려나가는 것이 당연한데, 한국 환도는 물론 심지어 내구도가 한참 떨어지는 버터용 나이프로도 자르는 게 가능하다.(YouTubehttps://www.youtube.com/watch?v=1Qy-Be2cDGQ) 굳이 일본도 뿐이 아니라 쇠를 갈아서 날을 세운 것이라면 그 무엇도 가능하다. 그리고 관통을 목적으로 하는 철갑탄을 쓰면 간단히 망가뜨릴 수 있다. 실제로 M2 중기관총의 철갑탄을 상대로 한 실험에서는 심각한 날 손상이 즉시 발생했으며 얼마 못 가 부러졌다.[또 한 가지 의혹은 하가네를 현대 강재를 사용했을 경우다. 100% 전통 강재로만 제조하면 시참을 하거나 할 때 하도 휘므로 특별히 청지강 같은 현대 강재를 하가네로 써서 만든 이른바 <수련도>도 하나의 중요한 상품이다. 이것도 눈으로 봐선 절대 구별할 수 없다.] 워터젯 커터 실험도 비슷한 트릭이며 날카롭게 세워진 칼날은 단면적이 현미경으로 봐야 할 만큼 좁으므로 이것을 중심으로 고압 수분이 2갈래로 갈라져 빠져나간 것이다. 더불어 기관총의 총신을 가르고 박혔다던지, 사람과 갑옷까지 절단한다던지 하는 헛소문들도 이런 환상에 크게 일조한 바 있다.

      여러 중세시대 매니아들의 실험 결과 칼로 숭숭 잘 베일 것만 같던 가죽 갑옷조차도 베기에는 굉장한 내성을 지닌다는 것이 확인된 바 있다. 하물며 금속으로 만든 갑옷은 쉽게 베지 못한다. 같은 맥락으로 기관총의 총신을 가르는 것 또한 철 갑옷을 절단하는 것 이상의 헛소리. 애초에 총신은 장약이 폭발하며 일으키는 팽창방향의 변형과 탄두가 총강 내에서 나아가며 일으키는 격심한 마멸을 자체 내구성으로 씹어내면서 끝까지 본모양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총기부품중에서도 가장 공들여서 견고하게 만들어진다.

    • 74포병2017/07/12(Wed) 16:32:03ID:Q3ODE2MDA(22/22)NG報告

      풀 메탈 재킷에서 하트먼 상사로 등장했던 로널드 리 어메이가 이것에 대해서 실험을 해본 바 있다. 서양의 롱 소드와 일본도를 비교해보는 실험이었는데, 가죽 갑옷은 잘 베어냈지만 역시 철 갑옷은 상대하기 무리였다. 절삭력에 있어서는 롱 소드보다는 나았지만, 찌르기의 위력은 거기서 거기인 듯.하지만 이 유튜브에 있는 영상은 논란이 아주 많은 영상이니 [자세가 어설퍼서 베기에 힘이 실리지 않거나 칼자루에 가까운 쪽으로 치는 등], skallagrim이나 다른 아마추어들이 카타나와 롱소드를 비교하는 비디오를 보고 자기가 알아서 결정하자. skallagrim은 카타나나 비슷한 사이즈의 서양 롱소드나 베기 실험에서 별 차이가 없었다며 카타나를 숭배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인듯.

      하여튼 결론은, 그런 조악한 칼이라도 어떻게든 써먹어보려고 고심하여 만들어낸 검술이 뛰어나게 잘 발달했던 것을 마치 일본도가 뛰어난 칼이었던 것 처럼 착각하고 환상을 품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참고로, 날의 성능에만 집중하여 기타 도장구에 대한 평가는 잘 이뤄지지 않는데, 우치가타나 양식이 성립된 이후의 일본도는 그 칼자루의 그립감이 가히 예술(...)로 특유의 천끈과 매듭법으로 인해 맨손에 착 감겨들고, 무엇을 베었을 때 손에 가해지는 충격도 나무나 가죽만으로 마감한 도검들에 비해 훨씬 부드럽다. 목재에 가죽을 감은 것은 그나마 낫지만, 그도 없이 나무조각을 나사로 붙여놓은 수준의 물건들은 장갑이 없으면 오래 다루기 힘들 정도로 손에 가해지는 충격이 크다. 그 반대급부로 오염되기 쉽고 내구도가 떨어지는 문제는 있어서, 아예 마음대로 교체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기도 하지만.

    • 75名無し2017/07/12(Wed) 22:15:44ID:M4MjU1Mjg(1/1)NG報告

      たくさん書き込みしてもらって悪いけど、翻訳率がものすごく悪い。
      本当に必要な部分のみ、翻訳されやすい文章で投稿してくれ。

    • 76名無し2017/07/12(Wed) 22:35:51ID:UzMTcyNDg(2/4)NG報告

      >>74
      外国人の検証動画とかあるけど
      基本的に日本刀は切るもんであって、ぶん殴るような切り方は向いていないわけなんだよ
      外国人の検証動画も基本的には間違えた日本刀の使い方をしているわけ
      日本刀は円を、描くように降り下ろして切るのが日本刀なんで
      貴方の言っているのは物事を知らない素人のバカが騒いでいるだけの話な訳

    • 77名無し2017/07/12(Wed) 22:40:17ID:UzMTcyNDg(3/4)NG報告

      >>74
      あと朝鮮の弓が本当に何百メートルも飛んだのか?実証検証をした事があるの?

      前に韓国人が朝鮮弓の動画を張り付けていた事があるけど
      朝鮮弓矢じゃあなくても鉄板は貫くんだよね基本的には

    • 78名無し2017/07/12(Wed) 22:47:31ID:UzMTcyNDg(4/4)NG報告

      日本の鉄生産技術について
      こんな話がある
      日清か?日露?かの戦争当時
      日本軍は最新式銃が不足していた
      その銃の不足分をカバーする為に、火縄銃を最新式の弾を使えるように改良した
      改良された火縄銃は暴発することもなく
      日本の銃不足を解消する事ができた

    • 79名無し2017/07/13(Thu) 10:53:32ID:A4NjUxODM(1/1)NG報告

      >>46
      ドイツはホワイトカラーとブルーカラーは同党だけど、小学校の段階で教育を分けてるな。
      だから逆に技能がたかい。
      日本でも大卒よりも高専卒の方が即戦力で就職率が高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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