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麗朝が独自性を維持出来た理由

53

    • 12017/02/26(Sun) 19:13:26ID:k0NjI3NTA(1/1)NG報告

      高麗はモンゴルの侵攻を受けるまでは朝鮮半島(韓国)の歴史の中で
      独立性の高い政権を維持出来たイメージが強いですが
      之は現在の高麗朝の大部分の時代において、現在の中国が常に分裂状態(宋・遼・西夏、或いは南宋・金)であり
      漢族政権である宋との間に嘗ての統一政権である唐よりも国力が劣る緩衝地帯(遼・金)が存在し
      どの勢力も完全に極東地域を掌握するだけの国力を持たなかった影響もあると思われますが

      皆様はどう思われるでしょうか

    • 4名無し2017/02/26(Sun) 21:44:52ID:I3ODY2NDQ(1/21)NG報告

      >>3 후삼국시대 --> vs요나라 --> vs여진 ---> vs몽골 ---> vs 홍건적---->vs북원 --->vs왜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진심으로 남자새끼는 저 시대에 태어났으면 몇번을 죽은거냐???

    • 5名無し2017/02/26(Sun) 21:46:17ID:I3ODY2NDQ(2/21)NG報告

      중국 분열의 문제야 그런것도 있지만 화북을 제패한 요나라와 전쟁에서 승리하고. 금나라의 완안아골타가 금나라를 건국하기 18년전에 대대적인 여진족 토벌이 있었습니다. 그런 노력이 없었다면 고려시대의 국제적인 위상은 불가능했습니다.

    • 6名無し2017/02/26(Sun) 21:57:17ID:g1NDY4OTI(1/1)NG報告

      遼も金も土地が豊かで文化の香り高い中原の攻略に目が向いていて、冷涼で雨が少なく土地の痩せている半島なんぞには興味がなかった。
      高麗が宋と共謀して遼や金の背後を襲うことさえしなければ、わざわざ滅ぼして直接支配など面倒なことはせず間接支配で十分という判断だったろう。

    • 7名無し2017/02/26(Sun) 21:57:36ID:I3ODY2NDQ(3/21)NG報告

      >>3 금나라는 그 이전에 18년전에 함경도 함락당하고 식겁하고 안쳐들어온거고.. 마음만 먹었으면 처들어 왔지.

    • 8名無し2017/02/26(Sun) 22:01:38ID:Y4NzM2MjA(1/7)NG報告

      완안아골타가 女眞族 을 통합해 가자 고려의 지배하에 있던 女眞族 이 고려의 지배하 에서 이탈 하지 못하게 고려는 17만 대군을 이끌고 女眞을 침략하고 女眞의 영토에 城을 쌓아았다 장기전으로 가자 女眞族 들이 화친을 요구하며 고려군이 물러가면 고려를 상국으로 모시고 고려땅에 기왓장 하나 던지지 않겠다고 고려로 철수하는 고려군을 위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고려가 쌓은 城 을 기반으로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송나라도 남쪽으로 몰아내고 화북을 차지하였다. 전기 고려가 강력한 군사 국가 였던것은 통일전쟁을 했던 호족들의 연합 국가 였기 때문이 었다.

    • 9名無し2017/02/26(Sun) 22:02:49ID:Y4NzM2MjA(2/7)NG報告

      >>7 남송과 고려가 동시에 금나라를 친다면 ?

    • 10名無し2017/02/26(Sun) 22:03:46ID:I3ODY2NDQ(4/21)NG報告

      >>6 그 요나라랑 3번이나 전쟁을 해서.. 천존제가 고려에게 참패를 당하고 최정예 부대가 전멸되었엇다..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Kuju

    • 11名無し2017/02/26(Sun) 22:04:27ID:I3ODY2NDQ(5/21)NG報告

      >>9 그렇죠. 그래서 금나라는 그 이전에 당한것도 있고. 실상 그 당시에 서북전선이 붕괴되지 않아서 요나라랑 같은 꼴 될게 뻔해서 안쳐들어간거죠..

    • 12名無し2017/02/26(Sun) 22:05:39ID:I3ODY2NDQ(6/21)NG報告

      >>9 윤관 별무반한테 후드려맞고 금나라가 식겁했었습니다. 만약에 고려가 요나라에게 전쟁에서 승리하지도 않았고. 그 이전에 윤관의 별무반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금나라도 무조건 침공했을겁니다.

    • 13名無し2017/02/26(Sun) 22:09:29ID:Y4NzM2MjA(3/7)NG報告

      후삼국을 통일 하기 위해 고려 와 후백제가 마지막 일전을 벌일때 고려군은 8만 후백제군은 10만이 넘는 대군을 동원 하였다 반도의 세키가와라 전투 요나라와 고려의 전쟁에서 고려는 40만명의 군대를 동원한다.

    • 14名無し2017/02/26(Sun) 22:13:10ID:Y4NzM2MjA(4/7)NG報告

      단순히 중원이 통일되지 않아서 독립적인 체제를 유지한것 보다 고려자체 군사적 역량이 조선같은 중앙집권 국가와 다른 호족들의 연합이 었기 때문에 군사력이 강했던것 같다.

    • 15名無し2017/02/26(Sun) 22:17:32ID:Y4NzM2MjA(5/7)NG報告

      >>13 후삼국 통일전쟁때 흑수 철륵 女眞族 1만의 기마병이 고려군으로 참전하였다.

    • 16左巻きの名無しさん2017/02/27(Mon) 16:53:19ID:Y5MjMzNDU(1/3)NG報告

       ハングルで書くと高麗は「고려」となり「考慮」と同じになるので、「高麗」がテーマの時の機械翻訳はよく考慮しなければ、ハングルが原文のレスはその言おうとすることが判らないね。それで、日本人は絡めないのかな?

       統一新羅、高麗、朝鮮と言う半島内に本拠地を置いた域内最大の歴代の排他的勢力を、比較することは、そもそも時系列的に時代が異なるので、論理的な結論は誰も示せず、単に好き嫌いの様に、特定の事象により引っ張られ、結論を述べるしか無いだろうね。

       確かに、「統一新羅」は、軍事力的には、「大唐国」に対抗出来る力は無かったし、百済も「高句麗」も「大唐国」の「遠交近攻策」で「新羅」を残り駒として壊滅させたことで、「百済」の全域と「高句麗」の半島内の影響領域の一部を縄張りに取り込んだことは事実だが、「新羅」単独の縄張りと出来たのは、「高句麗」の崩壊後、「渤海国」が「高句麗」の代わりに半島の付け根に興り、「大唐国」もそれと対峙することの方が優先事項に成ってしまったので、海路のみでの進軍しか適わない半島南部の直接支配は断念せざるを得なかった。その意味で、勢力的にはまだまだ発展途上ではありましたが、独立性と言う観点では、一番高かったものと個人的には想います。渤海国は日本に盛んに使いを出し、日本の援軍を求めていましたから、対大唐国への警戒は大変なものだったかと想います。ですから、新羅が南端に居る半島側にに攻め込む気も起きなかったでしょう。
       人気の高麗は触れませんが(笑)、それでも歴代最大版図を築いたのは朝鮮です。現中朝国境がそれなので、勢力面では朝鮮が一番だったのではないかと思いますよ。この時に半島北部の女真族の地を植民地にしてしまったくらいなのだから。

    • 17名無し2017/02/27(Mon) 20:44:38ID:YxMzg5OTA(6/7)NG報告

      >>16 반도 북쪽 만주는 사람도 별로 살지 않는 농사도 되지 않는 불모지였고 반도 남쪽 영토도 개간되지 않고 남아 돌았다.

    • 18名無し2017/02/27(Mon) 20:45:46ID:gyODIyMzM(1/2)NG報告

      『高麗記念日』とかあるの?

    • 19名無し2017/02/27(Mon) 20:47:19ID:gyODIyMzM(2/2)NG報告

      >>17
      韓国史というより、ただの民族してでしょ。
      朝鮮半島に住んでいた民族、というだけ。

    • 20左巻きの名無しさん2017/02/28(Tue) 08:39:22ID:Q4ODM1ODA(2/3)NG報告

      >>17

       レス有難う。

       その頃の「朝鮮王朝勢力」が攻め入ったときに、「不毛だから」って言ってたとしたら、「来るなよ」って女真族は思ったと想うよ。その様に今の「韓国人」の持つ価値観を時空を超越して被せて、村を襲われ殺され追われた民は救われないよ。時空を超えたらそれはもう「歴史」ではないよ。願望だ。一度、立場を入れ替えて考えて試てね。

       ただ、人類史に於いては結果のみが後の世につながるから、勝者が正統化された史書が残るだけのことだ。そして、その版図内で同じ文化水準で生活が営まれると民族が形成されるだけのことです。

       ただ、御免なさい。「朝鮮王朝勢力」はスレ外なので、もう、これ以上は深入りしないでおくよ。以降、自分は高麗に話しを戻します。

    • 21左巻きの名無しさん2017/02/28(Tue) 08:55:32ID:Q4ODM1ODA(3/3)NG報告

       少なくとも「高麗王朝勢力」が建国初期於いては国土が狭く、そこには白頭山の噴火が絡んでいたかもです。



      http://www.museum.tohoku.ac.jp/past_kikaku/paekdusan/sec3/second.html
      【史実に残されなかった巨大噴火】

       白頭山が10世紀に巨大な噴火をしていることは明白な事実です。…10世紀といえば中国は五代中国期、朝鮮は高麗が国家としてあり、史実を記録する文化があったにも関わらず、噴火の時期や推移についての記述を一切見つけることができないのです。

      ■ なぜ、白頭山の10世紀巨大噴火は文献資料に残されなかったのでしょうか?
                           鶴園 裕「高麗・朝鮮から見た渤海・白頭山への関心」

      この10世紀の中国では,唐(618-907)末を経て、五代十国の変動期、すなわち、後唐(923-936)や南唐(937-975)と呼ばれる地方政権乱立の混乱期にありました。また、東北アジアでは、渤海(698-926)が滅び契丹(遼)(916-1125)が興り、東丹国が成立するという変動期にあったと考えられてます。この時期、白頭山に最も近い地域を領域支配していた国家は、契丹族が建国した遼です。しかし、契丹文字で記録された資料は少ない上に、未解読文字も多いのです。しかも、一部の漢文資料は正史の形で残されているものの、その後の女真族による金やモンゴル族による元の支配によって、10世紀当時の資料は隠滅され、あまり残されていません。

      この時期、この地域で比較的安定した国家としては、新羅王国末期の後三国時代の混乱を制して朝鮮半島の中部地方を中心に成立した高麗(935-1392)ですが、10世紀初めのこの時期には東北アジアとの国境線はあいまいで、現在の中国・朝鮮の国境線よりもさらに南が高麗の支配地域でした。それゆえにこそ、先の高麗成宗10(991)年の記事では、前後の脈絡もなく女真族支配に関する一行のみが記載されています。言葉を変えて言えば、この時期、白頭山への関心は存在するものの、実効的な支配は行われていなかったと考えられます。10世紀の白頭山が大爆発を起こしたとされるこの時期には、「正史」に記録を残せるような安定した王国や政権が中国側には存在せず、…ある種の資料的な空白期となっています。

    • 22名無し2017/02/28(Tue) 09:01:32ID:Y5ODQwNzY(1/1)NG報告

      どれだけボコっても最後はみんな放置して帰っていく地域だから、身内に入れたくない下賎な人が住んでいただけでは・・・・

      外敵に侵略される→収奪を受けて疲弊→クーデターで王が変わる→外敵に侵略される→繰り返し

    • 23名無し2017/02/28(Tue) 16:17:33ID:M0MjczMTY(1/10)NG報告

      >>1
      高麗は独立性を維持したというのは間違いではないか?

      姜邯賛が勝利したりしてるが、基本的に高麗は遼の藩属国で、遼に対し服属していた。
      しかも、遼への反逆以後も遼の藩属国になると約束している。

      その後、遼が金に滅ぼされ、金に服属している。

    • 24名無し2017/02/28(Tue) 16:20:34ID:Y4MDI2MzI(7/21)NG報告

      >>23 사대를 보고 종속국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요나라가 고려에게 무슨 내정간섭을 했는데?? 강감찬에게 요나라의 정예병이 전멸당하고 요나라의 주요 인물들이 모두 전사해서 그냥 남자면 관료로 등용했던건 아나? 요나라는 저 전투 이후로 더이상 나라가 성장하지 못한다. 그도 그럴것이 당시 요나라의 최중요 인물들이 거의 다 죽었다. 그리고. 금나라가 건국되기 18년전에 고려에게 금나라는 수도가 함락당해서 고려에게 고려를 향해서는 돌맹이 하나 던지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고려가 퇴각했다. 금나라가 건국되고도 금나라는 고려가 옛 요나라 지역을 점령해도 외교적인 말 이외에 실질적인 물리적 행사는 단한번도 하지 않았다.

      종속국? 정확하게 중화사상에 입각한 시각이다.

    • 25名無し2017/02/28(Tue) 18:26:29ID:M0MjczMTY(2/10)NG報告

      >>24
      事実としてだが

      姜邯賛が戦った後、聖宗は次の高麗遠征の準備をしてる。
      1020年、高麗は遼に降伏し、遼の年号を使用してる。

      遼としては、自分らに服属するという高麗とそれ以上争う意味がない。

    • 26名無し2017/02/28(Tue) 18:29:32ID:Y4MDI2MzI(8/21)NG報告

      >>25 그럼 그 이전에는 요나라에서 단순히 요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기에 처들어오지 않은 것인가? 명분상으로 요나라가 승리한 것이지. 저 당시에 요나라가 고려의 성을 하나라도 제대로 공략하지 못했다. 심지어 강동 6주는 단 한성도 공략하지 못했다. 요나라 천존제가 그 당시에 자신들의 정예부대의 전멸에 대해서 뼈아픈 타격을 입은것에 고려에 대해서 새삼 놀랐다고 한다. 현실은 요나라의 당시 군대의 엘리트들이 상당수 죽었고. 이후로 요나라는 인력난에 시달리게 된다. 이후 금나라에게 멸망하기 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100년이다.

    • 27名無し2017/02/28(Tue) 18:30:45ID:Y4MDI2MzI(9/21)NG報告

      >>25 그리고 당신은 사대례에 대해서 잘 모르나 본다. 중국은 언제나 자신들이 천자의 나라이기 때문에. 패배는 없다. 다만 오랑캐가 불복종을 하는 것일 뿐이지. 왜냐하면 천자는 언제나 옳음. 정의. 天이기 때문에 하늘은 패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유교관념에 입각한 외교형식이니 자신들이 패배한적이 단 한번도 없다. 현실은 그 요나라마저도 중국인이 아니라 몽골의 역사다.

    • 28名無し2017/02/28(Tue) 18:31:18ID:Y4MDI2MzI(10/21)NG報告

      정의는 패배하지 않는다. 그래서 천자는 패배하지 않는다. 라는 것이 중국인들의 관념이다.

    • 29名無し2017/02/28(Tue) 18:47:00ID:M0MjczMTY(3/10)NG報告

      >>26 >>27 >>28
      遼に対して服属するという姿勢を示すことが当時の国家間における服属の形だった。
      そうでなければ、それこそ元王朝のように全部征服して、管理できないことになる。

      実際に、李氏朝鮮の仁祖も戦争に敗れたが、その後も服属国として存続し続けた。
      現代の植民地という関係が当時存在しない以上、その当時の関係で服属して安定を保ったと言う他ない。

    • 30名無し2017/02/28(Tue) 18:50:36ID:Y4MDI2MzI(11/21)NG報告

      >>29 청나라에게는 전쟁에서 패배해서 우리가 복속된 것이지만. 요라나라는 전혀 이야기가 반대다. 당신은 신라가 당나라에게 전쟁에서 승리하고도 항복한것에는 어떻게 생각하나?? 그리고 마찬가지로. 토번도 당나라에게 승리하고 항복한것으로 알고 있다. 토번도 당나라에게 패배해서 식민지가 된 것인가? 일본인들은 동남아시아 국가라서 중국을 비롯한 몽골 한국의 유교와 관련된 사대에 대한 관념이 전혀 없는 것 같다.

      정작 요나라도 몽골의 역사다. 몽골이 중화의 황제를 표방한 국가일 뿐이지. 진심으로 요나라가 중국인이라고 생각하나? 그것도 유교관념에 입각한 시각이다. 요나라는 고려와의 전쟁에서 패배해서 정확하게 95년 뒤에 여진족에게 멸망한다. 당신 말대로라면 고려를 복속시킨 요나라가 전성기를 누려야 하는것 아닌가? 현실은 요나라의 사신은 고려황제의 생일축하 자리에 늦은것에 대해서 고려의 귀족들이 요나라 사신을 놀리지만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간다.

    • 31名無し2017/02/28(Tue) 18:52:13ID:Y4MDI2MzI(12/21)NG報告

      >>29 내가 당신에게 질문하고 싶다. 고려가 요나라에게 승리하는게 도대체 무슨 상관인가? 당신 중국인인가?? 중국인도 아니면 몽골인인가? 몽골인이라서 요나라가 고려에게 승리했다고 말하고 싶은건가? 천존제는 어째서 그렇다면 고려에게 복수하지 않았나? 고려가 항복을 했다고 해서 도대체 요나라가 고려에게 전쟁배상금을 요구하지도 않은 이유는 뭔가?

    • 32名無し2017/02/28(Tue) 18:56:13ID:Y4MDI2MzI(13/21)NG報告

      참고로 고구려도 수나라, 당나라에게 승리하고 그들에게 항복했다. 내가 무슨말을 하는지 알겠나? 일본은 사대라는 외교관념이 없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토번, 신라, 고구려 모두 승리국이라도 天子에게는 항복형식의 전쟁 종결을 한다. 중화는 중심이기때문에 패배하지 않는다는 관념 때문이다. 지금도 체면에 목숨을 거는 중국인들 다운 세계관이다.

    • 33名無し2017/02/28(Tue) 19:03:06ID:M0MjczMTY(4/10)NG報告

      >>30
      一時的に戦争で勝利しても、それ以後攻め続けられたりすれば、本当に滅亡させられる。
      だからこそ服属するし、それが当時の常識だったというだけ。

      後、別に遼が高麗を服属させたことと、遼が最盛期を迎えることは関係ない。
      ただ、金(女真族)の力が強くなって遼を滅ぼしただけ。

      実際に遼が滅ぶまでの間に、高麗と女真族は何度も戦っているだろ?
      あんたの論法なら、高麗と敵対してる女真族がなぜ遼を滅ぼせたんだ?

      つまり高麗は関係なく、女真族が強かった。そして高麗は1125年に金に服属している。

    • 34名無し2017/02/28(Tue) 19:06:14ID:M0MjczMTY(5/10)NG報告

      >>31
      戦争で勝利したとか戦争で敗れたという事を言いたいわけじゃない。

      高麗が安定したのは、宋→遼→金→元の順番で服属したからである。
      そして、それぞれに服属する前は争いがあり、服属した後は強い独立性を保っていなかった。

      と言いたいだけ。

    • 35名無し2017/02/28(Tue) 19:06:51ID:Y4MDI2MzI(14/21)NG報告

      >>33 ?? 그 금나라가 건국되기 전에 여진이 고려에게 수도를 점령당하는 것은 아는지?? https://en.wikipedia.org/wiki/Yun_Gwan

      윤관이라는 장수가 정예병을 길러서 금나라가 건국되기 18년전에 여진족은 그야말로 멸망의 위기까지 고려에게 일방적으로 공격당했다. 요나라를 멸망 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지고 있던 여진족도 고려에게 공격당해서 오히려 고려에게 복속했었다. 당신 말대로라면 18년 이전까지 금나라를 건국이전에는 고려에게 금나라가 복속되었다는 말이다.

    • 36名無し2017/02/28(Tue) 19:10:06ID:Y4MDI2MzI(15/21)NG報告

      >>34 당신은 그리고 내 말에 자꾸 반박을 하는데. 요나라가 고려에게 패배하고 송나라에서 고려를 극진히 대접한다. 요나라에게 사대를 했다는 이유 하나로 요나라에게 복속했다고 하는데 오히려 고려는 송나라의 역법을 사용하고 송나라에게 그렇다면 복속하고 있었던 것이지. 2중 복속을 했다는 말인가??

      요나라가 95년만에 멸망하는것이 여진이 일방적으로 강해진것이 아니라 저 당시에 요나라의 중요 엘리트들이 모두 죽었다. 당신은 요나라역사도 고려의 역사도 잘 모르는것 같은데. 내가 민족감정으로 이야기 하는것이 아니라 이것은 사실이다.

      당신은 토번이 당나라에게 항복의 형식을 취한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가르친링에 대해서 알고 있나? 동북아시아의 역사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도 못하는것 같은데.. 자꾸 역사를 왜곡하면 안된다.

      요나라의 최정예 부대는 左 右 中 가운데 정예중의 정예인 中의 10만의 정병이 전멸당했다. 이 상태에서 송나라의 견제도 받고 있던 요나라가 고려를 추가로 공격할 상황이 되었다고 생각하나? 심지어 요나라에 고려가 승리하는 것을 보고 여진족도 상당히 자극받아서 고려로 내투하는 여진족이 급속도로 늘어났었다.

    • 37名無し2017/02/28(Tue) 19:13:26ID:Y4MDI2MzI(16/21)NG報告

      고려는 동북아시아 국가이기 때문에. 당시 몽골~ 고려에 이르는 만주를 비롯해서 중원 화남에 공유되고 있던. 유교형식의 사대의 형식을 취했을 뿐이지. 고려는 조공사절이 아니라 國臣使의 대접을 받으면서 최 전성기를 요나라와의 전쟁이후에 누리게 된다. 고구려시대의 황금시대의 연장이 고려시대다.

    • 38名無し2017/02/28(Tue) 19:15:40ID:Y4MDI2MzI(17/21)NG報告

      물론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중요한것은 결국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면 무조건 싸워서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조선시대는 어설프게 회피한 결과가 결국은 비극으로 이어졌다.

    • 39名無し2017/02/28(Tue) 19:16:53ID:M0MjczMTY(6/10)NG報告

      >>35
      何が言いたいのか分からんが・・・
      初め、高麗は遼に服属し女真族と戦い勝利した。その後、女真族の勢力が強くなり、遼が滅ぼされ、高麗も金に服属したというだけだろ?

      >>36
      俺の知っている歴史では、初め高麗は宋に服属していた。だから遼とも争っていた。
      その後、遼に服属した。そして女真族と争った。

      違うのか?両方に服属していたという話は知らない。

    • 40名無し2017/02/28(Tue) 19:20:18ID:Y4MDI2MzI(18/21)NG報告

      >>39 아 당신이 잘못알고 있다. ㅋㅋㅋㅋ 여진과 싸운것은 요나라에 복속한것에 대한 전투가 아니라 별개의 이야기다.

      그리고 요나라에게 복속되었다는 당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송나라에게도 복속되어 있었다.

      즉, 2중 복속이 된다는 말이다. 당신의 말대로라면 ㅋㅋㅋㅋ

      요나라는 황제의 국가를 자칭하던 국가이기 때문에 절대로 패배와 같은 단어를 쓰지 않는다.

      당나라의 이세민이 고구려에게 패배했다는 기록이 없고.

      당나라는 토번도 당나라가 승리하여 복속시킨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현실은 그 반대이다.

      신라도 마찬가지다. 그 이외에도 마찬가지. 이것은 중화사상에 입각한 역사시각이기 때문이다.

      중국인 정도를 제외하고는 요나라와 고려의 전쟁은 결국 고려의 승리로 모두 인정받고 있다. khitan korea war 라는 영문 위키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유교라는 이념에 입각한 시각에서 바라보면 고려는 복속을 한 국가가 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

      당나라와 토번의 관계가 요나라 - 고려의 관계다.

    • 41名無し2017/02/28(Tue) 19:22:35ID:Y4MDI2MzI(19/21)NG報告

      >>39 俺の知っている歴史では、初め高麗は宋に服属していた。だから遼とも争っていた。
      その後、遼に服属した。そして女真族と争った。

      違うのか?両方に服属していたという話は知らない。

      그 복속이라는 것이 그러니까 형식상의 복속이라는 말이다. 현실은 반대라는 이야기.

      요나라는 고려에 대한 무리한 침공을 하지 않았다면 여진족이 강해졌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허무하게 망할 나라가 아니었다. 하지만 3차 전쟁에서 정예병이 모두 죽었고 당시의 훌륭한 지휘관들도 모두 죽었다. 이후로 인재난에 요나라는 시달리게 되면서 요나라의 황금시대는 끝을 고하게 되었다.

      그리고 중국의 유명한 시인 소동파를 알 것이다. 소동파가 제일 싫어했던 사람들이 고려사신들이다.

      고려사신들은 조공이라는 명목하에 송나라로부터 엄청난 이득을 취해갔다.

      이에대해서 애국자였던 소동파는 고려와의 국교를 끊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 42名無し2017/02/28(Tue) 19:24:55ID:M0MjczMTY(7/10)NG報告

      >>40
      聖宗の時、高麗は宋との関係を切り、遼の冊封を受ける条約を結んでいるだろ?

    • 43名無し2017/02/28(Tue) 19:26:10ID:M0MjczMTY(8/10)NG報告

      >>41
      悪いが日本語と韓国語を同時に入れられたら翻訳されない。

      ここの翻訳も分かりにくいが、PCの翻訳はもっとひどいから何言ってるか分からないw

    • 44名無し2017/02/28(Tue) 19:27:10ID:Y4MDI2MzI(20/21)NG報告

      >>42 그건 약속으로만 그쳤었다 ㅋㅋㅋ 계속 고려는 송나라와 통교했었다. 그리고 요나라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당장 고려에게 그에 대한 실질적인 보복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이후 송나라는 금나라가 중원으로 처들어오자 고려에게 원군을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었다. 소동파는 1037년경에 태어난 사람이다.

      이사람이 관료를 지내던 시대가 고려사신의 만행이 가장 심했던 시대다. 심지어 송나라에서 요나라 사람들이 있는데도 고려인들이 승전축하 파티를 열었었다 ㅡㅡ; 이에 대해서 송나라 사람들이 분노하기도 했었다.

    • 45名無し2017/02/28(Tue) 19:28:16ID:Y4MDI2MzI(21/21)NG報告

      >>43 그렇군.. 내 문장이 이상한건지도 모르겠다.. 미안하다 ㅜㅜㅜ 내가 민족 감정으로 요나라에게 이겼다! 같은 거짓말을 하는게 아니다. 당신이 말한 청나라의 경우는 맞는 말이다. 우리가 압도적으로 패배해서 복속한 것이다.

      하지만 요나라는 반대다. 요나라가 고려를 무리하게 공격하다가 그 역공으로 군사력의 큰 공백이 생기게되었다.

    • 46名無し2017/02/28(Tue) 19:32:35ID:M0MjczMTY(9/10)NG報告

      >>44
      でも年号は宋の年号ではなく遼の年号を使い、宋の服属国をやめてるだろ。
      もちろん交易は行われているが。

      服属国に入ることで安定を保ったという事だ。

      服属=現代の併合と考えすぎじゃないか?

    • 47名無し2017/02/28(Tue) 19:35:34ID:M0MjczMTY(10/10)NG報告

      >>45
      いや、清の頃も併合はされてないだろ?
      李氏朝鮮は残り、自国内では権限を有していたし、軍隊も持っていた。

      昔は、俺たちの言う併合という状態が無いのだから服属という言葉で表現する他ないが・・・。

    • 48名無し2017/03/01(Wed) 08:51:17ID:E3NzYzNzA(7/7)NG報告

      >>46 요나라가 금나라에게 공격받을때 고려국에게 바지가랭이 매달리며 도와달라고 애원을 했었다.
      금나라가 화북을 차지하였을때 고려가 사대 하였지만 금나라 황제가 고려국에 보낸 편지에 고려국 황제에게 라고 쓰여져 있었다. 고려의 반란군이 몇개의 변방 城을 가지고 금나라에 투항하려고 했는데 금나라 황제는 고려국에게 이사실을 통보하고 반란군과 고려의 변방 城을 돌려 줄 정도로 친한 사이었다.

    • 49名無し2017/03/01(Wed) 12:28:39ID:U5MTMzMjI(1/1)NG報告

      後百済や三別抄や鄭成功が日本に援軍を求めたのを自慢げに話すとか、日本人だったら恥ずかしくて出来ない芸当だなあ

    • 50名無し2018/04/11(Wed) 10:57:10ID:MxMzI4OTg(1/1)NG報告

      高麗가 契丹에게 패배했다고? 事大관계는 전쟁이 끝나고 高麗가 그만 싸우자고 和親을 제의함으로써 맺어진 관계이다. 高麗가 전쟁에서 패배해서 契丹 황제의 요구로 맺은 관계가 아니다. 契丹과 高麗의 마지막 전투(龜州大捷)에서 10萬에 가까운 契丹의 精銳軍인 '天雲軍'과 '右皮室軍'이 潰滅하되었다. <遼史>와 <續資治通鑑(北宋)>에서도 契丹의 패배를 인정한다.

    • 51名無し2018/04/11(Wed) 11:07:32ID:U2MTE4NDQ(1/1)NG報告

      >>1
      맞습니다.
      또한 중국의 한족의 나라는 침략을 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 고려, 조선을 침공한 국가는 모두 북방민족의 왕조였을때 입니다.

      북방민족의 국가들이 한반도를 침공한 원인은 고려, 조선도 북방민족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족의 국가는 침공하지 않았죠..

    • 52世界最高美男◆GOFcoHrlP22018/04/11(Wed) 15:59:42ID:cyNjU3MjA(1/1)NG報告

      고려시대가 가장 이민족들과 싸움이 많았던 시기이다.

      고려 초에는 거란족, 그 다음에는 여진족, 그 다음에는 몽골, 그 다음에는 홍건적(紅巾賊), 왜구 해적들, 명나라까지
      고려의 남성들은 진짜 힘들었겠네

    • 53coolieinblue2018/04/12(Thu) 00:35:38ID:AxOTA5NDA(1/1)NG報告

      고려는 중국인 王氏의 정권이였슴, 물론 귀족도. 逼迫당하던 女眞人 이성계가 신라출신 鮮卑族의 지원을 받아 건국후 중국인들이 씨를 말렸슴.

レス投稿

画像をタップで並べ替え / 『×』で選択解除